Level 20. 메인 퀘스트 : 힐링 타임 (04)
쟤가 왜 지금 저기서 나와?
나는 잠시 당황했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마력! 다시 받을 때가 됐구나!’
그렇다. 미하일이 나에게 나눠 줬던 밤의 마력.
한번 나눠 준다고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그에게 받은 마력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원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힘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마력을 받아야 하는 건 맞았다.
그래야 부정의 마력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미하일이 다시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대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온 거야?”
우리 가족이 별궁으로 온 건 정말 충동적인 일이었다.
당연히 공개적으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그런데 제국 안에 있지도 않았을 미하일이 내가 있는 장소를 어떻게 정확히 알고 온 걸까.
미하일은 매끄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마력을 나눠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절로 당신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게 된다고?
전생에는 자신의 마력을 타인에게 나눠 줬다고 그 사람의 위치까지 아는 건 불가능했다.
혹시 지금 세계에선 다를 수도 있지만, 여러 경험이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각성이나 마력에 대한 기본적인 성향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 같았다.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럼 나도 누구한테 마력 나눠 주면 위치 추적할 수 있는 거야? 아닌 것 같던데?”
전생에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나스카의 마력이 가진 특성입니다.”
“……그래?”
좀 미심쩍지만 어쩔 수 없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미하일이라면 전생에도 가능했으면서 일부러 숨긴 걸 수도 있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일 끝나면 앞으로는 너한테 절대 마력 빌리면 안 되겠다.”
“어째서인가요?”
“계속 추적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
미하일의 눈꼬리와 어깨가 추욱 처졌다.
꼭 시무룩한 강아지가 연상되는 태도.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미하일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내게 다가와 말했다.
“손을 주십시오.”
마력을 나눠 받으려면 신체적인 접촉이 꼭 필요했으니까.
나는 선선히 손을 내밀었다.
밤과 달빛 속에서 나타난 소년의 것임에도 미하일의 손은 따스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약한 것을 건드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매만졌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손등에 키스했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은 그의 손보다 조금 더 온기를 품고 있었다.
마력을 나눠 줄 때 이런 건 왜 필요하냐고 뭐라고 하고 싶었는데, 어째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손등에 키스를 한 미하일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행동했다.
그대로 내 오른손을 제 오른손으로 마주 잡아, 손깍지를 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밤의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마력은 이번에도 안온하고 따스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 버린 건.
마력 충전을 마친 뒤, 돌아가려는 미하일을 잡은 건.
“잠깐 거기 서 있어.”
“……네?”
“엄청 의외라는 반응이네.”
“그야 당신답지 않은 일이니까요.”
“뭐,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그간의 맺힌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할 수 있는 대상이 정해져 있었다.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나 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전생의 기억을 일부라도 가진 게 확실한 건 미하일이 유일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계속 목 끝에 걸려 있지만, 내뱉지 못했던 말을 하필이면 이 녀석 앞에서 하게 된 것은.
“음. 대답하지 말고 그냥 듣기만 해. 절대 대답하지 마. 아, 이걸 두 번째 소원으로 하자.”
처음은 마력을 나눠 달라는 것이었다.
소원이 세 개니까, 하나 정도는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써도 되겠지.
미하일은 내가 시키는 대로 인간 대나무 숲이 되어 그냥 서 있었다.
이건 대화라기보다는, 내 일방적인 독백에 가까웠다.
그래서 앞뒤 다 자르고 말을 시작해 버렸다.
못 알아들어도 무슨 상관이람.
“사실 가족들이 전생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조금 안심했어.”
“…….”
“가족들이 전생의 일을 믿어 주지 않을 거라는 의심을 한 건 아냐. 그리고 가족들이 받을 상처를 걱정하긴 했지만, 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랬다. 이게 진심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된다던 가족들의 말에 안심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더라고. 생각보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슬프고 쓸쓸했어. 사실 이건 환생하고 처음 눈 떴을 때부터 그랬는데…….”
“…….”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아무도 기억을 못 하고, 오로지 나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가족을 되찾은 건 기쁘다. 어떻게든 이번에는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 상실 자체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내가 말로 설명해서 가족들이 정보로 이해하는 것하고, 실제 추억과 기억을 공유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전생의 기억을 잊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허무하다거나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때의 나와 우리 가족, 모든 이들이 치열하게 싸운 결과니까.
하지만, 아무리 곱씹는다 해도 상실이 슬프지 않을 수는 없었다.
쓸쓸함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유일하게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전 동료이자, 배신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마 널 영원히 용서 못 할 거야.”
인간 대나무 숲은 끝까지 그 의무를 다했다.
***
라이언은 사흘째에 별궁에 합류했다.
그랑디오르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가족들은 당연히 라이언의 보고 자리에 함께했다.
라이언 역시 가족들이 그랑디오르와 사교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았다는 걸 이미 전달받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전부 보고했다.
덕분에 나는 엄마 무릎에 앉아 오빠가 건네주는 무화과 파이를 냠냠하면서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아니, 소공작에게 황녀님의 명령대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공작은?”
“황녀님을 뵌 그 날 바로 전서구를 날렸고, 영지에서 출발했다는 답신 역시 전서구로 왔다고 합니다.”
“흠. 그러면 얼마나 걸릴 거 같아? 공작이 황도에 도착하는 데에.”
나는 아빠가 내민 상큼한 아이스티를 꼴깍거리면서도, 머리는 열심히 굴렸다.
아빠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드셨다.
“그랑디오르의 영지 성에서 출발한다면 시간이 꽤 있겠구나.”
“예, 일반적으로는 한 달 가까이 걸리는 길입니다. 그래서 소공작과 제가 황녀님의 탄일에 맞춰서 출발할 때에도 실제 탄일보다 한참 일찍 성을 나섰었죠.”
라이언은 씁쓸한 표정을 능숙하게 감췄다.
“하지만 아마도 공작은 훨씬 일찍 도착할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토록 염원하던 주인을 뵙는 일이니까요. 소공작의 태도를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공작은 몇 배는 더합니다.”
하긴, 이미 사교도가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잘 아는 나도 소름 돋는 광기였다.
소피아가 없는데도 이만한 조직을 만들어 낸 것이 현 그랑디오르 공작이다.
아마 어지간한 수준의 광신자가 아니겠지.
전생에 가졌던 사교도 내에서의 지위 역시 높을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내가 얼굴을 아는 자일 수도 있겠네. 기억도 일부지만 가지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도 하고.’
어쩌면 그랑디오르 공작과 대면하는 순간, 내 사기극은 들통이 날지도 몰랐다.
그랑디오르 공작에게 나에 대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역시 대비가 더 필요했다.
나는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가족들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랑디오르 공작은 나를 보면 자기들의 성녀가 아니라는 걸 알 수도 있어요.”
“흐음. 그러면 최대한 만나는 걸 미루는 게 낫지 않겠니?”
“그래. 이미 사교도들의 명단을 확보했고, 그들에 대한 감시와 포위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기도 하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소공작은 만나고 공작과의 만남을 거부하면 의심을 살 거예요. 그러다가 일이 확대될 수도 있고요.”
“그건 확실히 그렇지…….”
역시 가족들은 내가 공작과 직접 대면하는 위험한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티가 났다.
하지만 동시에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기도 할 거다.
‘내가 공작과 만나야 한다는 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지 않나.
뭐, 이 경우는 호랑이를 우리 굴로 끌어들여 잡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지만.
어쨌든.
라이언이 가져온 소식으로 인해 결정되었다.
우리의 짧은 휴가는 곧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환하게 웃으며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 내일 환궁해요! 공작을 맞을 준비를 충분히 해 둬야 하니까요!”
나도 많이 아쉽고, 가족들은 특히나 아쉬워했지만, 내 굳은 의지를 가족들도 꺾지 못했다.
대신.
“그럼 오늘은 다 같이 자자!”
“그래! 엄마 아빠 사이에서 우리 아가들 코 자는 거야!”
그 말대로, 짧고 달콤한 휴가의 마지막 날.
우리 가족은 내 침실에 딸린 커다란 침대에 넷이 나란히 누워 잠들었다.
그날 밤. 나는 아주 행복했던 시절의 꿈을 꾸며 달게 잠들었다.
***
[……유저 인식. 허용된 사용자가 아닙니다. System Error…!]
[…비 정상^ 접근*& ㏙※▤▩▩%€―――!]
[강제『∂≫√㈨㈊ΥωΘ……]
[……loading……]
“……빠!”
“응?”
“오빠!”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여동생이 있었다.
늘 안쓰럽고 고맙고 미안한, 그래서 뭐든 다 해 주고 싶은 동생.
그런데 어째선지 모습이 좀 이상했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분명히 그의 여동생 아나트리샤는 아빠를 닮은 적금발에 엄마를 닮은 청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데?
게다가, 그가 기억하는 동생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였다.
아홉 살, 열 살?
하지만 동생이 맞았다. 틀림없었다.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과 나이의 여동생이 말했다.
“야! 안서운!”
처음 듣는 낯선 이름. 그럼에도 더없이 그리운 이름.
그리고 거기에 발칵 말대꾸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그는 알았다.
“안서운 말고, 오빠! 내가 너보다 밥을 먹어도 5475그릇은 더 먹었거든!”
자신이 절대 할 리 없고, 할 수 없는 말.
그제야 루퍼스리안은 깨달았다.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