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1. 메인 퀘스트 : 덫을 놓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03)
***
황도 르펜시아의 그랑디오르 공작저.
이곳은 실로 오랜만에 주인을 맞이했다.
공작이 황도에 올라온 것은 근 10년 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은 부친이자 스승인 공작을 극진히 마중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버님.”
그녀의 표정에서는 흐린 기쁨이 묻어났다.
이것은 단순히 가족을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들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주인의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구나, 로헨.”
노인의 백발에 회색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공작은 말에서 내려 공작저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발걸음에 초조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전서구로 한 말은 사실이겠지?”
“예, 아버님. 제가 어찌 그분의 일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랑디오르 공작 크레티온의 표정은 평온했으나, 눈빛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네가 뵌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 맞다고 보느냐?”
“……아버님께서는 의심하십니까?”
“신중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렇긴 합니다만…….”
실내로 들어온 공작이 먼지투성이인 망토를 벗어 들자, 집사가 날렵하게 달려와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물러난다. 부녀가 단둘이 비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공작저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께서 저를 먼저 알아보고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아니시라면 그게 가능할까요?”
그러자 공작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간악하고 강대하니. 게다가, 하필이면 루스템의 혈족 사이에서 태어나셨다라…….”
“감히 그분을 사칭하는 사특한 자들의 농간이 아닐까 불안하신 모양이시군요.”
로헨은 부친의 의심을 이해했다.
스스로도 처음 성녀를 보았을 때, 바로 믿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제가 이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분은 검은 수정의 결계 안에서도 자유자재로 힘을 사용하셨습니다.”
“…….”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아버님의 세례 없이 진리를 깨달은 이도, 진정한 힘을 각성한 이들도 없습니다.”
사교도들이 말하는 진리란 세상이 마땅히 멸망을 향해 가야 한다는 사실이며.
진정한 힘은, 곧 부정의 마력이었다.
“그분께서는 우리 중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진리와 진정한 힘을 깨달으셨습니다. 성녀가 아니시라면, 누가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이 말만은 공작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미미하게나마 남은 의심과 불안을, 그는 다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은 불안 때문에 황녀를 만나러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정말 그분이 맞다면, 깨어난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앞에 가 무릎을 꿇지 않는 건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니.
‘아아, 내 영혼의 주인이시여. 진실로 깨어나신 겁니까.’
공작은 불안을 누르고, 심신을 정갈히 하며 알현을 기다렸다.
***
정식으로 공작의 알현 요청이 왔을 때, 다행히 우리 쪽의 대략적인 준비는 끝나 있는 상태였다.
그를 맞이할 덫의 준비가.
물론 완벽한 준비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기는 했다.
‘가족들의 아스트라도 완성이 된 후에 만난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고.’
사실 내 아스트라를 3주 안에 만든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
‘그래도 오빠의 아스트라까지는 빨리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오빠의 아스트라 제작에 필요한 재료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빠가 전생과는 다른 성질의 마력을 더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내 기억이 소용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반만 소용 있었다.
처음 시도 몇 번이 실패하자 나는 좀 당황했다.
“백금은 황자님이 가지신 태양의 마력과는 잘 맞지만, 눈과 얼음 속성의 마력과는 잘 맞지 않네요.”
때문에 공작의 알현 전에 오빠 것까지 완성하는 건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아멘다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며 너무 미안해해서, 내가 도리어 달래 주어야 했다.
‘어쨌든 내 아스트라는 완성되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전력은 충분해.’
게다가 나 혼자 공작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대비 중인 가족들과, 기드온 삼촌을 비롯한 우리 쪽 사람들도 많으니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공작은 내가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둔 안마당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누가 유리할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신이 날 지경이다.
‘전생에는 늘 반대 위치였는데.’
사교도 놈들이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지를 알지 못해서, 늘 방어하기에도 급급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달랐다.
우리 쪽의 움직임은 공작을 목표로 한 것만이 아니었다.
공작이 영지를 떠났다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이미 황실의 군대가 그랑디오르 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상당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손을 쓴 건 사교도의 본거지임이 분명한 그랑디오르 영지만이 아니었다.
소공작을 통해 확보한 사교도의 주요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들과, 그들의 가문에 대해서도 이미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공작이 황녀궁의 문을 밟는 순간. 이 체포령은 바로 발동될 예정이었다.
그야말로 사교도 박멸 작전!
‘한 번에 뿌리까지 전부 뽑아내야 하니까.’
절대로 실패할 리 없는, 아니, 실패하지 않을 준비였다.
***
나는 응접실에서 조금 심호흡을 하며 공작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긴장되었다.
얼마나 긴장되냐면…….
무의식적으로 아스트라를 칼로 변형시켰다가 팔찌로 돌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티가 많이 난 모양이다.
옆에 있던 오빠가 다가와서 물었다.
“리샤, 괜찮아?”
“응. 끄떡없어.”
대답은 잘하면서도, 심장이 자꾸 두근거리고, 손이 잠시도 한 자리에 얌전히 있지를 못했다.
오빠는 못 미더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내 이마를 톡 건드리는 손가락에 걱정이 묻어났다.
‘하긴. 한번 쓰러졌었으니 당연한가.’
그때 이후로, 가족들은 나를 설탕 유리처럼 조심조심해서 대했다.
‘설탕 유리는커녕 다이아몬드도 맨손으로 박살 내는 게 난데…….’
하지만 가족들이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걱정되는 ‘일곱쨜 리샤♥’일 테니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런 어린아이가 지금은 사교도의 현재 우두머리와 직접 만나려 하고 있었다.
걱정이 될 수밖에 없을 거다.
나는 씩 웃었다. 오빠도, 나 자신도 안심시키기 위해.
“사실, 심장이 막 뛰긴 해. 손도 안절부절못하겠고.”
“…리샤, 역시 내가…….”
“너무 기대돼서 말이야!”
“……?”
나는 눈을 빛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마력이 아무리 강하든 일곱 살짜리의 몸이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감자 같은 작은 주먹이지만.
팔목에 달랑달랑 매달린 아스트라가 내 호승심에 반응해 위험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사교도 놈들의 대장을 직접 패 버릴 수 있는 거잖아. 너무 기대돼서 심장이 막 두근거려.”
“…….”
아스트라를 한 번 더 칼로 바꿔서 휘릭휘릭 돌리다가, 팔찌로 돌려보냈다.
내 진심 100%의 대답을 듣고 오빠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나는 신신당부했다.
“내가 때려잡을 거니까 절대 끼어들지 마.”
“아니. 위험할 것 같으면 끼어들어야지.”
곁방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엄마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루퍼스 말이 맞아. 엄마도 끼어들 거란다.”
“힝.”
“허억! 내 딸 너무 귀여워!”
엄마는 곁방에 있다가, 빠르게 뛰쳐나와 내 뺨에 뺨을 비비적거린 다음 빠르게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랑디오르 공작에게 기척이 들키지 않도록 미리 결계를 펼쳐 둔 상태로, 곁방에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아빠도 역할을 맡고 움직이고 있었다.
오빠는 내 옆.
엄마는 기사단과 함께 옆 방.
아빠는 별동대.
이것이 바로, 절대 나 혼자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도록, 가족들과 상의해서 정한 위치였다.
“…….”
오빠는 어째선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데도 웃는 게 아닌 것 같은 표정.
온갖 감정들이 한 번에 떠올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열두 살짜리 꼬맹이의 표정이라기엔 너무 복잡 미묘해 보여서 이상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있어, 오빠?”
“……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
의아해서 더 말을 하려는 찰나.
긴장한 표정의 엘제가 다가와서 알렸다.
“그랑디오르 공작과 소공작이 들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이제, 가면을 쓸 시간이었다.
***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그랑디오르 공작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황자까지?’
다른 수행원들은 전부 물려 놓았는데, 황자만은 황녀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은 아직 황녀가 자신의 주인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데다 당연히 적이라 판단하고 있는 황자를 옆에 두고 있는 상황은 그에게 불안과 의심을 부추길 뿐이었다.
거슬리는 금빛을 머리에 간직한 작은 소녀는 우아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명령했다.
소녀의 산홋빛 입술에서는 공작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내 구두에 먼지가 묻었구나, 루퍼스리안.”
“……?”
공작과 소공작은 물음표를 떠올리며 굳어 있었다.
그런데, 동생에게 이름으로 불린 루퍼스리안 황자가 더없이 순종적으로 명령을 따랐다.
직접 손수건으로 아나트리샤의 구두를 닦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감히 성녀님의 발끝이 이토록 더럽혀지게 두다니. 부디 용서치 말아 주세요.”
‘그래! 이번엔 혼자 치는 사기가 아니라구!’
남매 사기단의 이번 설정은 이러했다.
‘루스템의 황족마저 단숨에 사교도로 끌어들인 위대하신 성녀님을 경배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