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8화 (149/218)

Level 21. 메인 퀘스트 : 덫을 놓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04) 

***

그랑디오르 공작이 소공작과 함께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냥 놀라서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달려 나가서 공작을 주먹으로 후려쳐 버리고 싶었다.

그렇다.

그랑디오르 공작의 얼굴은 역시 내 기억 속에 있는 이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부정적으로.

‘헌터 협회장!’

으득, 절로 이가 갈렸다.

헌터 협회의 협회장 서청운, 본인 역시 1기 각성자 중 한 명인 A급 헌터 출신으로.

나라 전체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다.

그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저놈만 아니었으면 열음 언니가 암살당할 일도 없었는데!’

그가 배신자였다는 것이 드러난 것은, 소피아의 정체가 드러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미 무수한 희생을 치른 뒤였고,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늦게 알았다.

전생에 몇 가지 분통 터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였다.

‘저 인간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게 한이었는데! 이번엔 반드시 날려 주겠어!’

그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S급 던전을 클리어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때문에, 귀환하고 나서 결과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사실은 헌터 협회의 회장부터 많은 중진들이 사교도였고.

바로 헌터 협회 지하의 숨겨진 시설에서 마왕 소환을 위한 마법진이 건설되고 있었다는 걸.

미완성 상태의 마법진이 발각되며, 배신자들과 헌터들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피아를 가릴 것 없이.

‘그때 협회장도, 그리고…… 하무현 역시 전사했었다는 소식만 들었지.’

긴장한 태도를 숨기고 옆에 선 라이언에게 잠시 시선이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나와 오빠 일행보다 조금 먼저 귀환했던 소피아는, 동료들을 돕겠다며 협회로 향했다.

그리고……, 최악의 때에 최악의 방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사교도의 성녀가.

새삼스레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다.

나와 오빠는 협회장의 배신을 안 뒤에, 어쩌면 부모님의 전사에 협회장의 농간이 있었던 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다행히 이 분노와 동요를 조금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괜찮아. 지금은 옆에 오빠가 있고, 옆방에 엄마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저자를 믿지 않았으니, 배신당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뒤통수를 갈겨 줄 테니까!’

의욕이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청신호도 있었다.

‘협회장, 아니, 공작은 내 얼굴을 기억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해졌어. 성녀의 얼굴도!’

공작은 아마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리라 예상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조마조마했던 건데.

그 기억 속에 나에 대한 정보가 확실하다면, 그는 지금 나를 보자마자 반응해야 했다.

나처럼 알면서 속이려고 한다기엔 공작의 리스크가 컸다.

‘무엇보다…… 사교도 놈들의 성녀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을 생각하면, 내가 성녀를 사칭한 걸 깨달은 순간, 분노해서 달려들어야 정상이야.’

그 정도로 사교도들에게 성녀는 절대적인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성녀 본인의 명령이 아닌 한, 그들이 이런 성향을 숨기고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놈의 얼굴에 드러난 건, 당혹감과 의혹뿐.

정말 내가 성녀가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이미 발동시켜 둔, <궁예> 스킬로 놈의 정보와 속내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이름: 크레티온 그랑디오르(서청운)]

[지위: 그랑디오르 공작, $%#@$]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외에는 당연히 다 깨져 보였다.

그리고 속내 역시.

[System Error!]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요즘 들어 시스템의 효용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퀘스트나 보상도 제대로 된 걸 별로 안 주고 말이야.’

내 일곱 살 생일날, 레벨 업 시스템이 복구되고 난 뒤부터였다.

그전까지 내게 주어졌던, 마치 미래를 예측해서 정보를 주려는 듯한 퀘스트 내용이나, 왜 이렇게까지 퍼주지 싶었던 보상들도 사라졌다.

그저 줄줄이 쓸모가 하나도 없는 잡템 퍼레이드.

‘힘이 다하기라도 한 것처럼.’

레벨 시스템이 복구되었을 때의 내 엄청난 성장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꽤 아쉬웠다.

지금의 시스템은 기계적으로 반응만 내놓던 전생의 것으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그랑디오르 공작.이 자를 어찌 요리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공작은 눈앞에 있는 이가 정말 성녀라는 걸 알 수 있었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고.

한눈에 가짜라는 걸 알았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로 황녀의 목을 치려 할지언정.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예상외였다.

“날이 조금 덥구나, 루퍼스리안.”

“예, 성녀님.”

황자가 황녀의 옆에서 공손하게 마력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얼음의 마력을 일으켰는지 시원한 바람이 순식간에 응접실 안을 휘돌았다.

그럼에도 공작은 침착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랑디오르의 주인 크레티온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공작의 등 뒤에서 소공작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의 인사는 어디까지나 그랑디오르 공작이 황녀에게 올리는 인사였다.

사교도의 추기경이 그들의 성녀를 뵙고 올리는 인사가 아니었다.

이를 보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던 황녀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소녀는 다리를 반대로 꼬며,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불신에 눈이 멀었구나.”

“…….”

소공작이 안절부절못하는 것과 달리, 공작은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황녀를 뜯어볼 뿐이었다.

“당신이 진정 우리의 주인이시라면, 이 무릎이 스스로 꺾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나트리샤의 옆을 지키던 황자가 사납게 말했다.

“감히 성녀께 이렇게 무례하다니. 목숨으로 갚게 하겠습니다!”

루퍼스리안의 목소리에서는 성녀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분노가 묻어났다.

아나트리샤는 공작에게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중이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나트리샤가 손을 들자, 루퍼스리안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성녀를 지키는 광신자 연기를 위해서든, 여동생을 지키고 싶은 오빠로서도.

아나트리샤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마력을 품은 비단 레이스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그것참 비싼 무릎이네, 추기경.”

“……!”

이 말에 내내 의혹으로 가득하던 공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동요가 드러났다.

그가 사교도 내에서 주교들의 우두머리로서, 성녀 바로 다음 가는 위치의 추기경이라는 건, 내부인이 아니면 알 수 없으니.

아니, 이미 그의 딸이자 주교 중 하나인 로헨은 저 소녀를 성녀로 거의 믿고 있었다.

관련된 정보를 로헨을 통해서 얻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공작의 의혹에 대신 대답해 주듯, 등 뒤에서 로헨이 경탄하는 말투로 외쳤다.

“여, 역시! 성녀님이십니다! 저는 우리 내부의 지위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

“맞습니다, 확실히 그분이십니다. 아버님!”

로헨은 감격에 겨워 바닥에 이마를 댔다.

그걸 보며 아나트리샤는 속으로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완전히 넘어온 것처럼 굴고 있었어도, 마지막 의심은 안 놓고 있었던 모양이네.’

아나트리샤가 공작이 추기경이라는 걸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에 그의 배신이 알려진 뒤, 소피아의 입으로 그가 사교도의 추기경이라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이걸 알 리 없는 지금의 사교도들은 당연히 아나트리샤가 성녀이기에 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공작은 여전히 무릎을 꿇지 않았고, 아나트리샤를 성녀로서 믿고 있는 듯했던 소공작조차도 조금 전까지 일말의 의심은 남겨둔 듯했다.

‘이런 식이면 이야기가 달라져.’

이 자리에서 이 둘을 죽이고, 사교도 명단에 적힌 자들을 전부 솎아 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것이 사교도 전체를 도려내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나트리샤를 완전히 믿지 않은 이들이 최후의 보루만은 남겨 두었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나트리샤는 순간적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부정의 마력을 이용해 허공을 걸어 제 몸을 띄웠다.

저들을 위에서 내려볼 수 있도록.

더없이 오만한 어투와 몸짓.

하찮고 어리석은 것들에 대한 경멸을 똑같이 연기해 보였다.

지금 이 세상에서 소피아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아나트리샤였다.

매일같이 악몽 속에서 배신자의 얼굴과 행동을 되새기고 있으니까.

그러니 당사자가 본다 해도 놀라서 웃을 정도로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었다.

“그대는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나?”

“……!”

“못하겠지. 그러니 그리 멍청한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일 테니.”

“…….”

“서청운.”

그랑디오르 공작 크레티온의 전생의 이름.

아나트리샤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공작의 눈동자가 홉뜨여지며, 어깨가 벼락 맞은 것처럼 떨려 왔다.

“……알겠어, 서청운?”

아득하게 흐린 전생의 기억 일부가 되살아났다.

우아하게 비틀린 미소와 살을 찌르는 듯 살기 어린 목소리.

목소리는 달랐다. 표정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저 묘하게 날 선 태도와 오만함이 기억 속 그림자와 닮았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경악으로 굳은 공작의 앞에서 아나트리샤는 어마어마한 부정의 마력을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검은 바람이 된 것처럼.

파아앗---!!

순간, 강한 힘이 공작의 왼쪽 어깨를 짓눌렀다. 쇄골과 어깨의 관절이 으스러지며, 몸의 절반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쿵!

공작의 무릎이 마침내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가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무릎이 제자리를 찾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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