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50/218)

Level 21. 메인 퀘스트 : 덫을 놓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05) 

“다, 당신이, 정말……?”

공작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나트리샤의 차가운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내리깔렸다.

“제 주인의 이름도 모르는 백치 주제에 입만 잘도 살아있군. 수치스럽지 않은가?”

“……당신은, 아십니까? 기억하십니까? 당신의 이름을?”

“당연하지.”

노인의 주름진 손이 소녀의 어깨를 잡으려다, 감히 닿지 못하고 다시 멀어졌다.

황녀가 다시 짓누르지 않았음에도 차마 손을 뻗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나트리샤는 노인의 눈빛에 아직 희미한 의혹이 남아 있음을 눈치챘다.

‘기억도 못 하면서 무의식적으로는 내가 소피아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가. 정말이지 짜증 나는 영감이야.’

전생에도, 지금도.

아나트리샤는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을 떠올렸던 원수의 말투를 그대로 제 입으로 옮겼다.

“소피아, 머레이.”

“……!”

“네 주인의 이름이다. 제대로 그 머리에 박아 두도록 해.”

소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한 번의 죽음과 두 번째 삶을 넘어 다시 노인의 귀에 닿았을 때.

공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줄기 눈물이 노인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걸 보며, 아나트리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징글징글한 미친놈들이야.’

천천히, 그러나 더없이 정중하게 노인은 두 무릎을 바닥에 댔다.

그리고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그, 이름이었지요. 그 더없이 성스러운 이름. 그것이 그분의 이름이었어…….”

노인의 주름진 두 손은 숭배하듯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다.

됐다!

아나트리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공작까지 손에 넣는 데에 성공했…….

그런데 멍하니 눈물을 흘리면서도, 공작은 황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한데 어째서 나의 영혼은 아직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뭐?”

“그 이름은 분명 그분의 것이 맞습니다. 들은 순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당신이 그분이라면 당신을 보는 순간 내 영혼이 먼저 알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한데, 그렇지가 않군요.”

***

쓸데없이 예리한 늙은이.

역시 그냥 지금 죽여야 하나?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공작은 아직도 내가 성녀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고, 소공작 조차도 날 완전히 믿는 게 아니라면, 지금 이들을 죽인다고 사교도를 완전히 박멸할 수가 없어…….’

저들이 숨긴 사교도의 잔당이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대장 BQ벌레를 죽여도, 벌레 소굴이 남아 있으면 완벽한 박멸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다시 결심했다.

‘지금 바로 죽이지 말고, 사기를 더 치자!’

원래 독도 잘 쓰면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의자로 돌아가 우아하게 앉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의 차갑고 잔인하던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래. 과연 추기경다워.”

“……!”

이 말에 공작은 다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분명히 내가 성녀가 맞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는 내 공격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내가 성녀가 아니라는 확신 또한 하지 못하는 거다.

그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내 폭력에 저항하지 못할 만큼, 사교도 놈들은 미친놈들이었다.

“다른 자들과 달리 보는 눈이 있긴 해. 내가 위협까지 하였는데도, 의지를 꺾지 않은 것도.”

“무슨, 말씀이신지……?”

공작 본인마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급조한 설정을 덧붙였다.

“어찌 보면 내가 성녀임을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네 말도, 완전히 틀리지는 않다는 소리다.”

“……!”

옆에서 오빠가 경악과 걱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 왔다.

라이언 역시 최대한 숨기고 있지만, 내심 당황한 듯했다.

하긴,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사전에 준비한 게 전혀 아니었으니까.

나는 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나는 완전하지 않다. 그러니 네가 영혼부터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분명 공작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웃었다.

“배신자가 있었다.”

“예?!”

“나를 따르던 자들 중에 배반자가 있었느니라. 그자의 음모로, 내 영혼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다. 기억 역시 그러하지.”

“그런……!”

공작의 주름진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소공작 역시 당황하고 분노한 상태.

“때문에 깨달음 역시 늦어졌고, 힘 역시 완전치 않아. 모든 것이 나를 따른다며 거짓으로 가장한 자의 배반 때문이다.”

충동적으로 급조한 설정을 설명하는 목소리에서는 선명한 분노가 묻어났다.

적어도 이 분노만은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내 뒤통수를 때린 놈들이 한둘이었어야지!’

그 대표가 지금 어깨 한쪽 부러진 채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저 노인이다.

그러니 이 분노는 연기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간악한 배신자가 마지막 순간 내 등을 찔렀고, 나의 적이 끝내 나를 죽였지.”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과거를 떠올리다 보니 화가 아주 많이 나긴 했는데, 이건 내가 낸 소리 아닌데?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를 북북 가는 오빠가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오빠는 정신을 다잡고 연기를 이어 갔다.

“감히 성녀님을 해한 배반자라니, 혹시 저자입니까?”

공작에게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것이,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고 싶어하는 듯했다.

공작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배반, 배반자가 있었단 말씀입니까?”

노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꾸했다.

“그래. 나나 너희가 그런 것처럼 이미 배반자 역시 새로운 생을 얻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가장 큰 벌레를 죽이는 데 성공해도, 찾지 못한 벌레 굴이 남아 있다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누구보다 숨겨 놓은 굴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은 벌레들 스스로였다.

전생에 몇 번인가 보았던 살충제 광고가 생각났다.

그 살충제는 벌레를 바로 죽이지 않았다. 벌레가 제 굴속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굴속의 잔당에게 약의 효과가 함께 퍼져서, 싹 죽여 버릴 수 있도록!

나는 독을 푼 셈이었다.

사교도 내부에 감히 성녀를 배반하고 해친 배신자가 있다는 독을.

그리고 내가 던진 미끼를, 공작은 냉큼 물었다.

“설마, 설마 그놈들이……!”

***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은 경외감과 안타까움 그리고 두려움이 공존하는 눈으로 자신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성녀시여.”

성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너 역시 내가 불완전하다 하여 네 아비처럼 나를 부정하려 하느냐?”

“아닙, 아닙니다! 그리고 아버님 역시 성녀님을 부정하려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도 핏줄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공작은 조금 전 성녀의 명으로 공작이 끌려 나가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배반자와 그로 인해 지금 자신의 존재가 불완전하다는 성녀의 말에, 공작은 이해하고 또 분노했다.

황녀가 보이는 강력한 부정의 마력.

또한 추기경인 그보다 선명하게 가진 전생의 기억.

그럼에도 황녀가 성녀라는 사실을 그의 영혼이 인정하기 힘든 이유까지 모두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저 설명이 완벽하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 지주인 성녀의 존재를 찾아 헤매온 공작이었다.

그의 목마름과 갈망은 너무나도 컸다.

조금은 허술한 저 말을 누구보다 믿고 싶을 만큼.

“배반자…, 배반자를……. 당장 이 손으로 그자들을……!”

그렇게 분노로 온몸을 떠는 공작에게, 성녀는 더없이 자애롭게 웃었다.

그리고.

퍽!

자비 없는 손속으로 공작의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공작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기절했다.

“서, 성녀님?!”

“하지만 그 전에, 감히 나에게 범한 무례에 대한 처벌은 확실히 해야겠지. 데려가라, 라이언.”

기절한 공작은 라이언과 황자의 손에 질질 끌려갔다. 어디로 갔는지, 어떤 상태인 것인지 소공작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소공작에게 성녀의 지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

공작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사심 절반, 계산 절반이었다.

‘조금만 머리가 식으면 공작은 또 날 의심할 수도 있어.’

그러니 인질 겸 감시할 겸 잡아 둔다.

그리고 사교도 놈들로 사교도를 잡는 데에는, 소공작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나는 오만하고 도도하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감히 나를 배신한 자를 찾아내라.”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였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나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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