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1. 메인 퀘스트 : 덫을 놓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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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나의?”
칼키나는 나를 보고 안 그래도 찌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렸다.
“감히 그분을 사칭하다니!”
“맞다니까? 너희들이 성녀라 부르는 소피아가 나야.”
나는 더없이 재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이죽거렸다.
사실 소피아를 이미 봤다는 칼키나 앞에서도 가짜 성녀 행세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빡치게 해 주려는 거지.’
사교도들에게 성녀는 그만큼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그렇게 불러들이려 하는 마왕보다도 더.
그러니 그랑디오르 공작도, 소공작도 성녀와 연관된 일에는 아이큐가 팍 떨어진 것처럼 행동하지.
그런데 더없이 신실한 사교도 앞에서 가짜가 성녀 사칭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머리에 피가 몰릴수록 다루기도 더 편해질 거다.
“그, 그 이름은……!”
아, 이 칼키나라는 노파도 소피아의 이름까진 기억을 못 하고 있었나 보다.
한쪽뿐인 눈이 경악으로 홉뜨여지는 것이 꽤나 추했다.
하지만 진짜로 소피아를 만난 건 맞는지, 공작처럼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분의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노파의 주름진 손끝에서 강력한 부정의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꽤 강하네?’
내가 지금까지 본 사교도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랑디오르 공작은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으니, 그의 힘은 알 수 없었다.
칼키나는 양손을 부정의 마력으로 검게 물들이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콱!
돌바닥이 치즈처럼 잘려 나간다.
나는 여유 있게 칼키나의 공격을 피한 다음,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칼키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내가 한발 빨랐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노파의 머리를 발로 지르밟았던 것이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주는 건 잊지 않았다.
쿠궁!
바닥에 작은 구덩이가 파였다. 거기에 머리가 처박힌 칼키나의 비명은 바닥이 부서지는 소음에 먹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주교님을 놔라!”
칼키나에게 위험을 알리러 온 사교도가 단검을 꺼내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도 자신을 견제하는 공작 일파를 감시하기 위해 숨겨 둔 간자였으리라.
그러니 칼키나를 따르던 다른 이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던 이 은신처로 바로 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너무 하찮은 피라미라 작은 마력탄을 날려 주는 걸로 충분했다.
사교도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끄, 어어억…….”
나는 발을 치우고 칼키나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 눈이 나를 보도록.
생긋 웃어 주며, 별명을 불렀다.
“오랜만이야, 마녀.”
“……!”
칼키나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렇다. 칼키나의 얼굴……을 보고 안 건 아니고.
마력 패턴과, 무엇보다 뒤통수를 밟았을 때의 감촉이 익숙해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칼키나는 전생에도 꽤 악명이 알려진 사교도였으니까.
마녀, 사브리나.
무려 내가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유명했고, 무수한 악행을 저질렀다는 소리다.
대표적으로……, 열음 언니 암살이 그러했다.
나중에 내 손으로 죽여서 원수를 갚긴 했지만.
칼키나는 피를 줄줄 흘리는 한쪽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경악을 넘어 폭발적인 분노와 증오로 온몸을 떨었다.
“너! 너, 너는 분명히……!”
아, 알아봤나.
뭐, 별로 상관없지만.
“그러니까……, 그게……!”
주름진 입술이 벙긋거렸지만, 내 전생의 이름을 토해 내진 못했다.
맞추면 맞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이 새 버렸다.
“기억 안 나?”
“그, 어……!”
“…3, 2, 1 땡!”
“어?”
“기회는 끝! 못 맞췄으니까 끝이야!”
눈치를 보니 내 이름까진 기억 못 해도, 내가 전생에 싸운 적이라는 건 기억하는 모양이다.
공작이나 소공작과는 확실히 달랐다.
칼키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소피아를 직접 만났다더니 그 영향이 있는 건가?’
이제 칼키나로부터 소피아에 대한 정보를 뽑아낼 시간이다.
나까지 포함해 환생 이후에는 소피아를 직접 만난 이가 하나도 없었다.
칼키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러니 이 유일한 목격자에게서 최대한의 정보를 뽑아내야 했다.
‘진실의 거울 아이템이 남아 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건 이미 사용 횟수를 다 채워서 없어졌다.
이 미친 광신도가 순순히 아는 사실을 다 불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말하더라도 그게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으, 어…….”
노파의 입에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지금 칼키나를 패고 있지 않았다. 그저 얌전하게 머리채만 잡고 있을 뿐.
그러니까 나 때문에 저렇게 숨 다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건 아닐 텐데?
혹시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단지, 상태가 이상할 뿐.
하나 남은 눈을 까뒤집고 침을 흘리며 듣기 싫은 신음을 흘린다.
뭐지?
내가 더 뭐라고 말하기 전.
다 까뒤집어졌던 노파의 눈이 완전히 풀렸다.
동시에, 완전히 실명한 듯 탁한 흰색이었던 다른 쪽 눈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왔다.
단, 눈동자의 색이 반대쪽과는 완전히 달랐다.
‘주홍…색?’
붉은색도 오렌지 빛도 아닌, 기묘한 색.
하늘을 불태우는 석양을 닮은 더없이 불길한 색깔.
내가 에릴이 소피아를 닮았다 생각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 기이한 눈 색 때문이었다.
“소피아?”
피에 젖은 노파의 입가가 말려 올라가며, 아름답고 더없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그린다.
이 추한 노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용사들이, 이 순간만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순간, 칼키나의 전신을 불사르며 피어오른 부정의 마력이 나를 덮쳤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
“……?”
그리고 나는 한 초라한 성에 서 있었다.
뭐지? 분명히 방금 전……?
하지만 내가 당황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들이 서로 얽혔다.
“아이는 어디 있지?”
“천한 집시가 어디서 감히……!”
내 눈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잔뜩 사나운 표정을 한 젊은 여자.
‘홀덴 영애?’
에릴을 데리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가, 음모가 전부 까발려진 뒤 처형당한 그 홀덴 영애다.
단, 내가 만났던 때보다 몇 살 정도 더 어려 보였다.
“난 그분의 명을 받아 네 아이가 재료로 쓸 만한지 살피러 온 사자다. 죽고 싶으면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해.”
“그, 그러면…… 대공 전하께서 보내신 건가?”
“아니, 그보다 더 위에 계신 분.”
이제야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 알겠다.
사실 비슷한 걸 이미 경험해 봤기에 바로 적응이 가능했다.
‘이건 과거의 기억이야. 아마도 칼키나의 기억. 하지만 나에겐 지금 진실의 거울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칼키나는 홀덴 영애를 이미 만난 적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 칼키나는 충실하게 그랑디오르 공작을 따랐다고 했으니까.
그녀가 공작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 건 약 3년 전.
‘소피아를 만났다고 주장한 이후부터라고 했어.’
그렇다면, 지금 이건…….
그사이, 두 여자는 성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향했다.
낡고 방치된 티가 역력한 아기 방.
갓난아기나 쓸 법한 낡은 요람에, ‘그 아이’가 누워 있었다.
작고 마른 몸. 태어난 이후 한 번도 자르지 않아 길게 자란 검은 머리.
인형처럼 깊게 감긴 눈이, 두 여자가 방 안에 들어서자 천천히 뜨여졌다.
선명한 주홍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에릴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름답고 또 불길한 색깔.
아이는 생긋 웃었다.
그러자, 칼키나는 경악하며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그녀의 몸이 희열로 부들부들 떨렸다. 기쁨의 눈물이 하나뿐인 눈에서 흘러넘쳤고, 두 손은 신을 경배하듯 들어 올려졌다.
“드디어, 드디어 당신를 뵈옵는군요! 아아, 아아, 성녀님! 너무나도……, 너무나도 길었습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이, 소피아는 자신을 만나고 감격에 젖은 신도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흐린 미소를 지은 채 빤히 바라볼 뿐.
“성녀시여……?”
주홍색의 시선은 모든 걸 꿰뚫고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칼키나 같은 하찮은 존재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훨씬 먼 곳.
동시에, 먼 미래.
그러니까, 칼키나의 기억을 엿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소피아의 입술이 열리고, 환생 이후 처음으로 들어보는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에요, 안서나 씨.”
“……!”
이제 알겠다.
내게 진실의 거울 아이템이 없는데도, 칼키나의 기억을 볼 수 있는 이유를.
이건 소피아가 미리 남겨 놓은 메시지였던 것이다.
칼키나를 통해,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