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4/218)

Level 21. 메인 퀘스트 : 덫을 놓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09) 

아이가 웃었다. 분홍색 입술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명백한 조롱의 웃음.

뇌리가 분노로 하얗게 타올랐다.

“너!!!”

손을 뻗어 소피아의 멱살을 쥐었다. 아니, 그러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타인의 기억을 매개로 만들어진 환영의 공간.

당연히 지금의 내게는 행동을 실천할 육체가 없었다.

그저, 칼키나의 의식 속에서 과거 기억 속에 남겨진 소피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니까.

“당신은 여전히 폭력적이군요.”

“너는 여전히 음험해.”

“칭찬 감사해요.”

“나야말로.”

아마도 육체가 있었다면, 나는 이가 부러져라 갈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저, 몇 년 전 소피아가 남긴 사념체와 의사 교환을 하는 것이 전부.

“내가 얼마나 반가운지, 당신은 이해 못 할 거예요.”

“아니. 너야말로 이해 못 할걸. 내가, 얼마나 널 다시 만나고 싶었는지.”

누구보다 다시 보길 원치 않았지만, 동시에 가장 보고 싶던 사람이 바로 소피아다.

“이번에는 반드시 네 목을 내 손으로 잘라 버릴 테니까!”

그러자, 소피아는 마치 최고의 찬사 혹은 프러포즈라도 받은 것처럼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려, 기괴하게 웃었다.

“미하일을 죽인 것처럼요?”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

소피아는 키들거리며 내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어떻게 죽였죠? 목을 베었나요? 아니면 심장을 찔렀을까? 혹은 둘 다였을지도?”

양쪽 다였다.

심장을 찔렀고, 마지막엔 목을 베었다.

그러고 보면 뒤늦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굳이 목을 쳤던 걸까. 이미 그때 미하일은, 미하일의 몸을 입은 마왕의 죽음은 이미 확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때 목을 베는 것은, 확인사살이라기보단 차라리…….

나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끊었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다.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반응했죠? 아아, 이 눈으로 그 광경을 못 본 게 너무너무 아쉬워요.”

소피아의 두 팔이 내, 아니, 내 의식을 담은 칼키나의 목에 걸쳐졌다.

“역시 당신은 최고예요. 이 비루하고 증오스러운 삶을 다른 세계에서까지 반복하는 건 정말 싫지만…….”

긴 눈매를 반쯤 접고서, 소피아는 눈웃음을 쳤다.

“그래도 한 가지는 좋네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개소리.”

“당신이 나를 비난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보다 더 짜릿한 일은 없으니까.”

아이는 해사하게 웃었다.

이 순간만은 사교도의 성녀니 인류의 배신자니 하는 것은 상관없이, 그저 순수한 한 소녀다운 미소.

이 세상에서 소피아에게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표정은 없었다.

그리고, 연이어 그 미소는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콰득!

내 손이 소피아의 목을 조른 것이다.

칼키나도, 홀덴 영애도, 뺴빼 마른 어린 시절 소피아의 모습도 녹아내려 사라졌다.

배경을 채우고 있던 낡은 성의 모습도 온데간데없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건, 지금의 나.

그리고, 나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 소피아.

그 목을, 내가 조르고 있었다.

“컥!”

소피아의 증오스러운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온 순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적이나마 기억과 환상을 뛰어넘어, 내 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소피아에게 닿은 것이다.

분명히.

체온과 피부의 감촉이 선명했다.

나는 한 자 한 자 씹듯이 내뱉었다.

“잘, 기억해 둬. 네가 어디에 숨어서 뭘 꾸미든, 내가 반드시 전부 부숴 버리고, 이번에야말로 널 죽여 버릴 테니까. 그리고 다음 삶 따윈 생각도 못 하도록 영혼까지 박살 내 주겠어.”

잠시 일그러졌던 소피아의 얼굴에 다시 황홀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하고 있도록 할게요. 아아. 정말이지…….”

그러나 딱 한순간이 끝이었다.

다시 내 손아귀에는 어떤 감촉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타인의 의식에 심은 사념을 매개로 삼아 본체에까지 닿은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었다.

자유로워진 소피아는 장난치듯 내 앞에서 빙글 돌아 인사했다.

흰 모피 치마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살짝 굽혀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의 미소는 어디로 가고,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표정이 이상했다.

“하지만 말이죠. 이번엔 당신이 실수했어요, 안서나 씨.”

“뭐?”

“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너무 오래 이성을 잃었다고요. 아아. 지금 당신이 죽어 버리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곧 멸망할 텐데.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너무 시시하잖아요?”

“……!”

벼락 치듯 깨달음이 왔다.

한 발짝, 아니, 반 발짝 늦었지만.

‘이건 환상이야! 그리고 현실의 나는 칼키나를 붙잡고서…….’

그리고,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젠장!’

추락하는 듯한 감각이 내 몸을 감쌌고.

연이어 어마어마한 충격이 내 현실의 육체를 덮쳤다.

“……!!!”

비웃음 섞인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재회를 기대하고 있도록 하죠, 안서나 씨.”

***

“커헉!”

얼어붙은 창에 매달려 하늘을 보던 검은 머리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그러자 방구석에 있던 여인이 달려왔다.

“소피아 님! 괜찮으신……, 헉!”

그녀는 소피아의 상태를 살피다가 목을 보고 경악했다.

마치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조른 듯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피아의 상태 역시 평소와 달랐다.

다량의 마력과 체력을 소모한 듯, 낮은 신음을 흘리며 혼절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역시… 대단하네.”

작은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소피아를 안은 여인은 경악하여 호들갑을 떨어댔다.

“의사를 당장 불러오겠……!”

짝!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벽난로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릴 정도로 잠시간 침묵이 방을 지배했다.

이를 깬 것은 소피아였다.

“시끄러워. 소란피우지 마. 흥이 떨어지잖아.”

어린 주인의 차가운 목소리에, 여인은 황공하다는 듯이 바닥에 엎드렸다.

“송구합니다.”

소피아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종에게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상처가 남은 목을 쓰다듬으면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 창은 남쪽으로 나 있었다.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재회를 기대하고 있도록 하죠, 안서나 씨.”

***

3년 전, 공작의 명으로 벨론드 대공의 사생아를 이용하기 위해 칼키나는 홀덴 백작가의 성에 왔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소피아를.

“아아, 성녀시여! 드디어!”

“네가 한 가지 쓸모가 있겠구나.”

“영광이옵니다!”

소피아는 칼키나의 한쪽 눈을 빼앗고, 그 안에 자신의 마력과 사념을 심어 두었다.

한 번은 칼키나가 아나트리샤와 마주할 것을 예지했으니까.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었다.

아나트리샤가 칼키나를 제압했다가, 소피아의 덫에 빠진 그 짧은 시간 동안.

칼키나의 육체는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검게 물들어 기괴망측하게 부푼 팔다리가 마치, 촉수처럼 아나트리샤의 육체를 휘감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리고 이제 인간의 모습을 잃은 칼키나의 마력 코어와 회로가 한계 이상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폭탄으로서.

아직, 아나트리샤의 정신은 소피아가 만든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 채였는데.

아나트리샤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의식을 되돌렸으나, 한 발, 아니, 반 발짝 늦었다.

황도 르펜시아의 외곽, 거리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릴 규모로 부정의 마력이 폭발했다.

콰과광!!!

***

엄청난 충격이었다.

재빠르게 환상에서 나 자신을 깨우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칼키나의 육체 폭발이 먼저였다.

너무 방심해 버렸다.

‘이런 덫에 빠지다니, S급 헌터 경력 반납해야 된다. 나!’

뒤늦게 마력으로 결계를 펼쳤지만, 상당한 타격은 피할 수가 없었……?

없었을 텐데?

그런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다.

‘뭐지? 설마 몸이 가루가 되어 버려서 안 아픈 건 아닐 테고.’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심장이 떨어질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을린 은발이 거칠게 휘날렸다.

짙푸른 눈동자에는 걱정과 분노가 가득했다.

늘 나를 볼 때면 헤헤 풀려 있던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있으면 절대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여기 있었다.

나를 보호하듯 끌어안고서.

“오빠?!”

오빠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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