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2. 메인 퀘스트 : 되새김의 시간 (03)
***
쩌적!
황도에 위치한 그랑디오르 공작저의 문이 얼어붙었다.
장화를 신은 발이 거칠게 걷어차자, 절대 영도로 얼어붙은 철문은 속절없이 박살 나서 흩어졌다.
와장창!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예, 황후 폐하!”
광휘 기사단의 단복을 입고 있는 이젤리아 황후는, 방패를 연상시키는 대검을 휘둘러 그 앞을 막아서는 사교들을 베고 때려눕혔다.
기사들은 충실히 황후의 명령에 따랐다.
황후의 옆에는 굳은 표정으로 검을 들고 선 갈색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이젤리아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리샤는 너를 이곳으로 보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자청했지.”
“……예, 알고 있습니다. 황후 폐하.”
안 그런 척하지만, 많이 상냥한 황녀님은 라이언을 그랑디오르 공작가 토벌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억지로 우겨서 토벌에 참여하겠다 말한 건 라이언 자신이었다.
그것도 공작저로 와서 모친과 직접 대면할 본대에 말이다.
“각오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본인에게 가혹할 일을 자청한 이유는 대략 짐작이 갔다.
제 손으로 토벌에 참여하는 대신, 그랑디오르 가문 자체의 멸문만은 피하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사교도에 물들지 않은 막냇동생의 안위도 보장받고 싶었을 터이고.
그렇다 해도, 절대 쉬운 결정일 수 없었다.
이젤리아는 더는 묻지 않고 앞장서서 나아갔다.
그랑디오르 공작저, 황도 르펜시아 내, 아니, 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사교도들이 우글거릴 것이 분명한 곳으로.
황후가 이끄는 광휘 기사단이 공작저에 들이닥친 그 시각.
소공작 로헨은 공작저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보고 말았다.
수하들을 베면서 달려오는 토벌군의 모습과, 그편에 서 있는 장남을.
그랑디오르의 그 누구보다 먼저 성녀인 황녀의 곁에 선 라이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설마, 설마…… 내가 속은 건가? 완전히 놀아난 건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에 소공작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어! 성녀님이셨다! 분명히 그분은 성녀님, 나를 믿어 주셨어……!”
그렇게 현실 부정하면서도, 로헨은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갖췄다.
공작저 곳곳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준비되어 있던 검은 수정이 일제히 발동한 것이다.
쩡!
새카만 결계가 공작저 전체를 둘러쌌다.
결계가 발동된 이상, 그 범위 안에서는 태양의 마력은 물론, 다른 어떤 마력도 발동할 수 없었다.
부정의 마력 외에는.
로헨은 피를 토하듯 외쳤다.
“전부 죽여! 하나도 남기지 말고 쓸어 버려!”
사교도에 있어서는 마지막 발악, 혹은 희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검은 수정에 대해 전생부터 기억하고 있었던 아나트리샤가 대비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검은 수정이 발동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공작저 상공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나는 태양을 등지고 서서 마치 태양 그 자체처럼 빛나는 남자.
현재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태양신의 대리인을 자청할 자격을 가진 자.
루스템 제국의 황제 카스톨트.
그가 마치 징벌하는 태양처럼 마력을 흩뿌렸다.
강렬한 태양의 마력은 순식간에 검은 결계를 뚫고 들어갔다.
과연 딸의 말대로였다.
“검은 수정의 결계는 내부에서 다른 마력이 발산되는 걸 막는 게 전부예요.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까지 무효화하진 못해요.”
쿵! 쿠궁!
단번에 결계가 박살 나고, 잠시 힘을 잃었던 이젤리아의 마력이 거침없이 뻗어 가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와 단단한 돌벽이 얇은 얼음처럼 박살 났다. 당연히 사람의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눈부신 흰색의 마력을 두른 채, 대검을 휘두르는 이젤리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카스톨트가 제국과 하스티아의 국경 지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 카스톨트는 몬스터를 얼려서 박살 내는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었다.
카스톨트는 새삼 추억에 젖은 채, 아내의 곁으로 날아 내려갔다.
***
지난 며칠간 나는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을 있는 대로 닦달했다.
“배반자 칼키나는 멀쩡히 살아 도망쳐서는 황도에 대 폭발까지 일으켰더군.”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게 네 충성의 증거냐, 아니면 단순히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냐.”
칼키나는 이미 죽었지만, 당연히 저들이 그걸 알 리 없다.
빈민가에서의 대폭발은 칼키나 일파가 내가 있는 황궁을 노리고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한 일로 꾸며졌다.
공개적으로는 사교도 무리가 벌인 테러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둘 다 맞는 말이니까. 소피아가 날 죽이려고 놓은 덫이었고, 사교도들이 한 짓인 건 분명하니.’
덕분에 그쪽 빈민가에 인명 피해가 좀 있었다.
날 구한 오빠와 빠르게 뒤따라온 가족들이 최대한 사람을 구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진실들을 묻어 둔 채.
나는 소공작을 마구 밀어붙였다. 성녀 소피아로서.
그 결과, 소공작은 어떻게든 사교도 내의 배반자를 잡아내어, 성녀 앞에서 면을 세울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노력이 얼마나 크고 가상했는지는, 그 며칠 사이 사교도 내부에서 벌어진 살육으로 증명되었다.
로헨은 사실 이젠 있지도 않은내부 배신자를 찾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면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배신자가 되었다.
없으면 만들어서 처단하기까지 했다.
내 입장에서는 사교도 손으로 사교도를 잡는 효율적인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무한정 이어질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이성이 날아가 있지만, 곧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정한 마무리의 때가 바로 오늘이었다.
당연히 이번에는 나 혼자 정한 게 아니라 가족들과 상의도 마쳤다.
“음. 이제 슬슬 남은 사교도들을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
“그럼 우선 그랑디오르 공작을…….”
“공작은 제가 죽이겠어요!”
상의할 때, 오빠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끼어들었다.
나랑 남매 사기단을 하면서 공작을 마주했을 때 유난히 화를 많이 낸다 싶었는데.
그게 그랑디오르 공작의 전생인 헌터 협회장에 대한 전생의 기억을 일부 찾아서였다.
부모님은 협회장이 배신자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나 오빠만큼 강한 분노와 증오심을 가지진 않았다.
두 분이 활동하시던 때까지만 해도 협회장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잘 실감이 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하지만 오빠는 달랐다.
“그놈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라고!”
이를 북북 가는 오빠의 모습에서는 열두 살짜리 루퍼스리안만이 아니라.
전생의 베테랑 S급 헌터 안서운의 얼굴과 말투가 엿보였다.
부모님도 그렇지만, 오빠가 더 기억을 많이 찾아서 가장 두드러졌다.
그건 아주 그립고 또 소중한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귀염성이 많이 없어졌어!’
물론 이게 얼마나 배부른 투정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안다.
아마 나에게 환생 후 오빠의 귀여움과 전생의 기억을 놓고 선택하라고 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후자를 택할 테니까.
애초에 호적 메이트의 귀여움만큼 별 의미 없는 것도 없으니.
물론 오빠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리샤 귀여움 절대 지켜!”
여하튼, 이미 제압된 데다 확고한 덫에 갇힌 공작을 처리하는 건 우리 남매가 맡기로 했다.
또한 그랑디오르 소공작과 그녀의 손에 너덜너덜해진 사교도 무리는 부모님이 기사단을 직접 이끌고 처리하러 가시기로 하셨다.
우선 황도 내의 사교도를 치고.
이미 그랑디오르 영지에 대기 중인 군 병력 역시 움직일 예정이었다.
사전에 미리 움직여 두었기에 며칠 대기했다가 다시 움직이는 정도는 무리 없다고 했다.
원거리 통신 같은 건 없지만, 이곳에는 마력으로 작동되는 신호기가 존재해서, 실시간으로 정해진 신호를 주고받는 건 오히려 쉬웠다.
게다가 그랑디오르 성에는 주교급은 아니라도 꽤 강한 사교도가 많을 게 분명해서, 이에 대한 대비도 미리 해 뒀다.
진압군에 내 마력을 담은 아티팩트를 주었던 것이다.
그걸 받고 기드온 삼촌은 아주 환하게 웃었다.
“황녀님의 선물! 귀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이익! 부러워라!”
거기서 왜 피오나 이모가 남편을 질투하고 있었던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 저 때 우리 가족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해 줘서 다들 풀렸지만.
“우리 가족은 내 마력 아티팩트가 아니라, 나를 통째로 가졌잖아요!”
덕분에 가족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할 일을 하러 갔고.
피오나 이모는 홀로 손수건을 물어뜯었다.
‘미안, 이모.’
하지만 사교도 박멸이 먼저라 이모를 달랠 여유는 없었다.
뭐, 이모도 진지하게 질투하는 건 아니었을 테니까.
…아니겠지?
아무튼 그러한 과정으로 잠시 미뤄졌던 사교도 토벌은,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진행된 것이다.
우두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진 사교도 세력을 상대로 말이다.
당연히 압승일 수밖에 없었다.
관련된 좋은 소식들이 들린 이후, 나는 오빠와 함께 그랑디오르 공작이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그가 전생에 저질렀고, 현생에도 저지르려 했던,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사슬에 결박된 상태인 그랑디오르 공작은 며칠 새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아직도 미천한 종이 저지른 무례에 분노가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주인이시여?”
나는 씩 웃었다.
“아, 그 짜증 나는 X 말투 흉내 내느라 죽는 줄 알았네.”
“…뭐, 라고?!”
공작의 눈에 떠오른 경악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너네가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준 덕에, 이제 다 망한 거라는 소리야.”
아, 시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