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2. 메인 퀘스트 : 되새김의 시간 (04)
***
쨍그랑!
그랑디오르 소공작 로헨의 손에 들린 검이 허무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소공작은 공작저 안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사교도였다.
그녀는 피 흐르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싼 채, 자신에게 칼을 겨눈 아들을 노려보았다.
“라이언! 네가 감히 네 어미인 나를, 그리고 네 조부를, 우리의 주인을 배반하는 것이냐! 그랑디오르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 네가!”
라이언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사리물었다.
하지만 곧 미소를 입가에 다시 그려 낼 수 있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어머니도 저를 믿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그래, 아버님께선 네가 배신할 만한 놈이란 것을 진작 아셨던 거겠지. 그래도 너를 믿고 싶어 했었던 내가 어리석구나!”
로헨의 말은 제 자식을 향하는 것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했다.
“후회할 거다.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반드시 올 거다!”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기사단을 이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이젤리아는 라이언의 말에,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들과 또래인 소년을 바라보았다.
흐린 기억 속에, 비슷한 외모와 성격을 가진 아이가 아들과 어울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근거는 없음에도, 어쩐지 소년의 말은 그냥 하는 다짐이 아니라, 실제로 전생에서부터 실현되었을 것이라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이젤리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랑디오르 소공작의 몸에서 강력한 부정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사방으로 강력한 마력탄을 수십 방 쏘아대며, 로헨은 마지막 비기를 발동했다.
기억을 되찾은 카스톨트와 이젤리아는 그 광경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폭!’
전생에 사교도들을 상대하며 지긋지긋할 정도로 보았던, 부정의 마력을 이용한 자폭 공격.
주교급의 능력을 가진 로헨의 자폭은 당연히 피해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로헨의 저주에 가까운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라이언 그랑디오르. 너를 낳은 것을 후회한……!”
하지만 그녀의 저주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태양의 마력으로 만든 결계를 두른 두 사람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두른 것이다.
피가 튀며, 스스로 죽음을 실감할 사이도 없이 로헨의 몸이 허물어졌다.
“……!”
라이언은 손을 떨면서도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소년의 꾹 깨문 잇새로 피가 흘렀다.
***
그랑디오르 공작의 주름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못내 통쾌했다.
전생에 나는 그에게 제대로 된 반격이나 복수를 해 주지 못했으니까.
그저 협회장의 배신과 함께 그의 죽음도 들었을 뿐이다.
배신을 앎과 동시에 복수할 기회마저도 끝나 버린 것이다.
당연히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때의 몫까지 한꺼번에 정산하는 듯한 쾌감이 짜릿하게 손끝까지 내달렸다.
짜릿해. 늘 새로워. 역시 사이다가 최고라니까!
나는 아직 현실 도피를 하고 싶어 하는 듯한 공작에게 속삭였다.
“사실 난 네가 날 보자마자 알아볼 줄 알았어. 네 가장 큰 적의 얼굴인데, 설마 못 알아보고 홀랑 속아 넘어갈 줄이야.”
“……!”
공작의 얼굴 근육 전체가, 그리고 온몸의 뼈와 힘줄들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고마워. 서청운. 전생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됐지만, 이번에는 한 번 정도는 도움이 됐으니까. 그건 감사해야지.”
“너, 너는……!”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공작의 얼굴에는 절망과 혼란, 분노만이 떠돌았다.
내가 누구인지, 이름은커녕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살짝 무릎을 굽혀 그와 시선의 높이를 맞추었다.
공작은 목에까지 사슬이 채워져 있어,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서나.”
“!!!”
“기억나? 내 이름.”
내 입에서 전생의 내 이름이 나온 순간.
공작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교도들을 보면, 전생의 자신, 혹은 중요한 인물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기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공작의 앞에서 내 이름을 말해 준 것이다.
그가 기억해 내게 하기 위해.
이번 생만이 아니라, 전생의 그 자신을.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동료들의 원수인 서청운을 되돌리기 위하여.
그래서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이다.
한 번의 죽음과 두 번째 생을 거쳤음에도 그는 결국 나에게 또다시 패배했고, 장대한 계획 또한 실패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예상과 바람은 제대로 통했다.
공작의 눈에 벼락같은 깨달음과 아득한 절망이 함께 치솟았기 때문이다.
“넌 기억하고 또 알면서 죽어야 해. 전생에도, 이번에도, 네 이상과 목표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걸.”
“으아아악!!!”
공작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그는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분노에 찬 공작은 온몸으로 발악했다. 몸의 모든 관절이 전부 묶여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내 앞으로 조금 다가오는 데에 성공했을 정도였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진심을 다해.
그에 대한 분노와, 못다 푼 전생의 남은 원한까지 모두 모아서, 조롱으로 바꿨다.
“아, 정말이지 웃겼어. 어떻게 나를 네 신이라던 소피아 그 X이랑 착각할 수가 있어. 추기경 실격 아냐?”
“너어어!!!! 너 따위가! 감히!!!”
“나야 처음부터 적이니까 작정하고 속인 거라지만, 그래도 네가 속으면 어떡해? 네 딸도 그렇고.”
촤르르!
사슬이 요동치며, 사로잡힌 짐승의 울부짖음을 드러낸다.
“차라리 칼키나가 더 추기경 자격 있는 것 같은데. 그 여자는 적어도 날 한 번도 소피아랑 착각 안 했다고.”
“!”
이 말은 내내 분노와 증오로 발버둥 치던 공작을 잠시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착각하지…, 않았다고?”
나는 미소와 함께 친절한 대답해 주었다.
“응. 걔도 내 이름까진 기억 못 했지만, 적어도 날 소피아와 착각하지는 않았어. 단 한 순간도.”
너와 달리.
나는 뱀이 독니를 사냥감의 목덜미에 박아 넣는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칼키나의 주장도 맞아. 그 여자, 진짜로 소피아를 만났더라고.”
“……!!!”
이미 흔들리고 있었던 공작은 내 회심의 일격에 지독한 타격을 입었다.
“말도, 안…… 그럴 리가…… 그러면 안…….”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현실 부정을 하고 싶어 하는 노인에게 강제로 현실을 들이밀었다.
그가 가장 원치 않을 게 분명한 현실을.
“그리고 칼키나에게 본인의 힘을 일부 남겨 놨었어. 덕분에 죽을 뻔했지.”
옆에서 나와 공작을 지켜보던 오빠가 이를 으득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공작은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거다.
나는 검지로 공작을 가리켰다. 동시에 전생에 내가, 우리 가족이 믿었지만 결국 배반당했던 협회장 서청운을.
“네가 이럴 걸 알아서 소피아가 너에게는 나타나지도 않은 게 아닐까? 나라도 이렇게까지 쓸모없는 도구는 그냥 버릴 거야.”
확인 사살.
‘너는 네 주인에게 쓸모없어서 버림받았다.’
-라는, 그가 가장 원치 않을 현실을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노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분이, 그분이 날 버리셨을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그래서는 안 돼……!!!”
발버둥 치는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사슬이 몇 줄 끊어지며 공작의 피투성이 손이 나에게 가까이 접근했다.
퍽!
그리고, 그걸 놔두고 볼 오빠가 아니었다.
으직, 뼈 부러지는 소리가 감옥 바닥을 긁었다.
“어딜 감히……!”
“끄어어, 으아악! 으어어억!!!”
제 주인에게 버림받은 종이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남매에게, 이 울음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멜로디는 없었다.
전생의 몫까지 합쳐 결국 이뤄 낸 복수는, 몇 번이라도 기꺼울 수밖에 없으니.
오빠는 더는 참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마구 손발을 날렸다.
“내가! 너 같은 놈 때문에! 얼마나……!”
나는 차가운 눈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공작을 노려보았다.
그에게는 먼지만큼의 동정심도 사치였으니까.
오빠가 분풀이를 할 만큼 했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
나는 공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의 다리를 얽어매고 있는 사슬 중 몇 개를 끊었다.
그러자 남은 몇 개의 사슬은 공작의 발광을 견디지 못하고 마저 끊어져 나갔다.
진작 눈치채고 있던 오빠는 아주 리얼하게 연기를 해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이런…!”
콰드득!
사슬이 우그러지고 뜯어지며, 공작은 네 다리로 바닥을 기었다.
우리가 열고 들어오며 부러 닫지 않은 문을 향해.
그는 두 번의 생 모두를 합쳐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필사적으로 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저 밖에 비치는 빛이 그의 주인, 성녀인 것처럼.
노인의 피투성이 손끝에 빛이 닿으려는 순간.
오빠는 뽑아 든 칼날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콰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고, 벽으로 피가 튀었다.
주인에게 버려진 종은 결국 외따로 끝을 맞이한 것이다.
그다지 장렬하지도 숭고하지도 못한 끝이었다.
그래서 나도 오빠도 만족했다.
***
공작저에서도 그랑디오르 영지 쪽에서도 연달아 좋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소공작은 죽었고.
부상자들은 있었지만, 준비를 단단히 한 덕분에 큰 희생자들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남은 잔당 역시 내가 뿌려 둔 추적향이 그동안 움직인 궤적을 감시해 두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물론 거기서도 도망친 놈들은 있지만 거의 다 잔챙이였다.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하고 주요한 세력의 중추는 완전하게 잘라 내는 데에 성공했다.
전생과는 다른, 이번 생의 완전한 승리였다.
우리 가족은 이제 순수한 기쁨에 젖을 차례였다.
제국 내 사교도을 쳐 냈고, 다 같이 전생의 기억을 되찾았다.
그야말로 기쁨과 행복만을 느끼기에도 부족한 시간.
하지만 누군가는 어쩐지 미묘하게 거슬리는 듯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오빠에게 작게 물었다.
“왜 그래, 오빠?”
오빠의 시선은 나나 엄마, 아빠가 아니라 한쪽 구석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