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60/218)

Level 23. 메인 퀘스트 : 추운 나라에서 온 사절단 (01)

루스템 제국 황궁 한쪽이 10세부터 16세까지의 귀족 영애, 영윤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들이 여기 이리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드디어 황녀님께서 황녀궁을 개방해 파티를 여시는군요!”

“저는 오늘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구요!”

“후-, 흐아아. 너무 긴장되네요.”

“파티 초대장을 손에 넣는 건 정말 전쟁이었죠.”

이 자리에 선 이들은 그야말로 전투에서 개선한 승리자들이라 할 만했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황녀가 드디어 공식적인 사교계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관련 소식이 돌았을 때, 제국 내는 물론, 외국에서까지 어떻게든 참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이미 온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다.

‘황녀님은 황실의, 더 나아가 제국의 실세이시다!’

-라고 말이다.

안 좋은 이유로 헤어졌다가 황녀 덕분에 화해하고 재결합한 황제와 황후가 어찌나 딸을 사랑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녀와 황위를 두고 싸우는 정적이 될 황자가 제일가는 동생 바보라는 사실 역시.

게다가 제국 내의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이 황녀의 추종자였다.

어떻게 해서든 황녀의 눈에 들어보기 위해 다들 애를 썼는데.

그 황녀가 직접 준비한, 기념비적인 첫 파티가 바로 오늘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본격적인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황녀궁 앞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 황녀의 첫 파티를 앞두고 황궁 내에는 이상하게 어슬렁거리는 인파가 늘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닌 척, 황녀궁 주변을 서성이다 미리 자리를 잡으려 기회를 노리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꽤 늘어나자, 결국 파티 당일인 오늘은 황녀궁 앞에 기나긴 줄이 늘어서기에 이른 것이다.

다들 최대한 빨리 파티장에 들어가려는 이들이었다.

‘그래야 황녀님의 눈에 한 번이라도 들 확률이 높아지지!’

‘안 된다면 그 측근들의 눈에라도!’

심한 경우에는 파티장 입장 순번을 두고 싸우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아니, 새치기를 하면 어떡해요!”

“새치기라니요! 나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것뿐입니다!”

또 한쪽 구석에서는 순번을 두고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나 더 줘야 순번을 당겨 주겠다는 거예요?”

“조금 더 쓰시죠? 시세보다 너무 낮게 부르셨어요.”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난장판.

이 많은 이들은 그저 황녀님의 눈도장 한 번을 받기 위해 이 난리를 치르고 있었다.

그때, 황녀궁 앞에 잔뜩 모여 줄을 선 귀족들 사이에 놀라움이 번졌다.

“헉! 저분은……!”

“그랑디오르 경!”

“아, 아니죠. 이제 그랑디오르 공작 각하라 불러야죠.”

“하긴 얼마 전에 작위를 정식으로 승계하셨으니까요.”

나이를 불문하고 귀족 영애들은 하나같이 볼을 붉히며 방금 정원에 들어선 훤칠한 청년을 보았다.

라이언 그랑디오르.

5년 전, 사교도의 반란 때 눈물을 머금고 부모와 외조부를 고발한 공신.

그리고 얼마 전에 성인이 되어 그랑디오르 공작위를 계승한 이였다.

그를 두고 상반된 평가가 엇갈렸다.

“조부와 부모를 배신하고도 저리 뻣뻣이 고개를 들고 다니다니. 뻔뻔해.”

“눈물을 머금고 충성을 택한 거죠. 황실에서도 저분의 공을 칭찬하셨는걸요.”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한 가지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라이언은 지난 5년 사이에 놀라운 수완을 보이며, 그랑디오르 가문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고 흩어진 가신들까지 모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주군으로 택한 레이디인 황녀에게 충성하고 있다는 사실.

실제로 지금 그는 그랑디오르 공작으로서가 아니라, 황녀의 기사로서 온 것이었다.

그는 광휘 기사단 중 황녀의 호위를 전담하는 제4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다.

“감히 황녀님의 거처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청년의 한마디에 조금 전까지 시장처럼 시끄러웠던 황녀궁 입구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중에 감히 그랑디오르 공작이자 황녀의 기사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었다.

동시에 줄의 순번을 두고 다투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자리를 양보하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오랜만입니다, 그랑디오르 경. 아니, 그랑디오르 공작님.”

짙푸른 머리를 길게 길러 곱게 땋고 안경을 쓴 소년이 라이언의 앞에 섰다.

라이언의 엄한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아, 그렇군. 가르텐 소공작.”

라이언의 미소와 목소리가 더없이 상큼했다.

청년과 소년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히면서, ‘파지직!’ 하는 소음이 들린 듯했다.

라이언은 이제 공식적으로 코넬에게 반말을 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 아주 기꺼웠다.

그래서 절로 말도 웃음도 시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코넬은 평정을 잃은 것이 표정에 드러날 뻔했다.

가르텐의 포커페이스가 흔들리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라이언은 생각보다 자주 소년의 동요를 본 적 있었다.

황자님도 놀려 먹는 라이언에게 코넬은 아주 귀여운 상대였던 것이다.

“아무리 오래 친교를 나눠 온 가르텐 소공작이라 해도, 순번을 당겨 들여보내 줄 수는 없어. 게다가 아직 파티는 시작하기 전이니.”

라이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선 이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랬다간 폭동이라도 날 것 같거든.”

코넬은 발끈했다.

“공정의 가르텐은 그런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일이지?”

코넬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그려졌다.

“저는 파티의 준비를 돕기 위해 황녀 전하의 초대를 받아 방문한 겁니다.”

깨끗한 흰 장갑을 낀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은, 황녀의 인장이 찍힌 편지 봉투였다.

“그렇군. 틀림없어.”

놀리는 듯한 라이언의 미소를 보고서야 코넬은 깨달았다.

그는 코넬이 파티 준비를 돕기 위해 방문한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황녀의 측근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 알면서도 어깃장을 놓다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라이언이 왜 이렇게 행동했는지, 그 이유 역시도 짐작이 가서 대놓고 화낼 수는 없었지만.

‘만인이 보는 앞에서 가르텐의 후계자가 황녀님께 가깝다는 걸 알리려는 목적이군.’

태도는 묘하게 얄밉지만 확실히 라이언 그랑디오르는 황녀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코넬은 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사방에서 부러움의 탄성이 터졌다.

“가르텐 소공작이 황녀님의 추종자라더니 정말인가 보네요.”

“이미 그랑디오르 공작은 황녀님의 기사고, 에아루스 소후작은 시녀로 봉직하고 있죠.”

“정말 대단해요. 세 가문 모두 원래 중앙 정치나 사교에 잘 참여하지 않기로 이름이 높은데 말이에요.”

그들은 눈앞의 두 사람에 대한 경외를 감추지 못했다.

또한 이렇게 대단한 자들을 자신의 영향력하에 둔, 황녀의 능력에 감탄을 연발했다.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가르텐 소공작은 황녀궁 안으로 당당히 들어갔고.

그랑디오르 공작은 황녀궁의 앞을 지켰다. 황녀의 기사로서.

파티가 열리기까지 아직 반나절이나 남은 때였다.

***

나는 조금 질려 버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침실 창문에서 내려 보는데,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귀족들의 줄이 구불구불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면 준비한 파티장의 공간이 모자란다.

그래서 줄이 심상찮게 늘어설 기세가 보이자, 다른 궁에서도 대대적인 지원이 나왔다.

“분명히 초대장은 500장 한정으로 뿌렸잖아?”

옆에서 오빠가 얄미운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500장은 너무 많다고 했잖아. 사교계에서 초대장을 가진 사람과 동행하면 입장이 가능한 게 불문율이니까.”

“아니, 그래도 보통은 초대장 한 장에 한두 명만 같이 오잖아. 저 줄은 초대장 하나당 최소 네 명씩 오는 것 같은데? 내가 이럴 줄 어떻게 알아!”

그러자 오빠는 여우처럼 눈웃음을 치더니.

길쭉해진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이제 열일곱 살, 아직 소년 태가 남아 있지만, 어지간한 성인 남성에 가까운 키를 뽐내게 된 오빠다.

정말이지 재수 없을 정도로 팔다리가 길었다.

‘어째 전생보다 더 길어진 것 같단 말이지. 그때도 엄청 길었는데.’

나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거울을 보았다.

거기에는 주황색에 금사로 화려한 자수가 들어가 있는 알라나의 신작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키도 꽤 컸고, 팔다리도 길쭉길쭉해졌다.

이제 팔짱을 제대로 못 껴서 짜증 날 일 따윈 없다!

난 당당한 열두 살이니까!

지금 나는 평균적인 열두 살짜리 여자애들보다 키는 꽤 큰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통통한 볼살이 신경 쓰였다.

솔직히 내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답다거나 멋지다는 말보다는, 귀엽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였다.

으윽.

‘그렇게 열심히 쑥쑥 포션 먹고 컸는데, 아직도 어린애잖아!’

아니면, 이렇게 어린애처럼 리본을 달고 있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커다란 빨강 리본이 달린 티아라가 신경 쓰여서 자꾸 매만지자.

오빠가 옆에서 찻잔을 떨어뜨렸다.

“커흑!”

하지만 양탄자가 젖거나 찻잔이 깨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던 카렐만이 찻잔을 부드럽게 받아 냈기 때문이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니까.

오빠는 열일곱 주제에 나잇값을 전혀 하지 못했다.

황자로서의 위엄도 전혀 지키지 못했다.

툭 하면 바닥을 네 발로 기며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아아. 리샤가…… 내 동생이……, 너무 귀여워서 큰일이야. 이 귀여움을 널리 알리고 싶은데, 반면 나만 알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어쩌면 좋을까.”

오빠의 주접은 어째 기억을 되찾을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오빠를 보는 사이.

문이 부서질 듯 세게 열리며, 오빠의 주접에 격렬한 동의가 이어졌다.

“루퍼스 말이 맞구나, 아가!”

“맞아! 우리 아가의 귀여움은 이 엄마만의 것이니까!”

이렇게 외치며 들어오신 부모님은…….

나는 조금 아연하게 물었다.

“왜 두 분 다 이렇게 번쩍번쩍하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자 아빠는 만개한 장미꽃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하셨다.

“그야 당연히 우리 딸의 첫 번째 파티가 열리니까!”

“우리가 얼마나 설레면서 준비를 해 왔는지 아니? 엄마는 어제 두근거려서 잠도 못 잤단다?”

지금 두 분, 대관식에 당장 나서신다 해도 전혀 무리 없을 정도이신데요?

……그러고 보니, 오빠도 만만찮게 차려입고 있었다.

잠시 넋을 잃고 있는 내 앞에서, 우리 가족은 정말로 의미 없는 말싸움을 시작했는데.

마치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장엄한 전투에 임하는 듯 진지했다.

“우리 리샤의 첫 파트너는 제가 할 겁니다!”

“루퍼스 넌 이미 몇 번이나 하지 않았느냐!”

“그치만 여보, 루퍼스. 나는 우리 셋 중 우리 아가랑 공식 석상에 나간 횟수가 제일 적은데…….”

엄마의 예쁜 청보랏빛 눈동자에 살짝 이슬이 어리자, 아빠도, 오빠도, 나도 이길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엄마의 드레스 자락에 매달렸다.

“엄마랑 갈래요!”

“그래, 우리 딸!”

오빠랑 아빠는 아쉬워하면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크흑. 여보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가 없지.”

“엄마에겐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우리 가족의 파티 입장 파트너가 정해졌다.

나랑 엄마.

그리고 아빠랑 오빠.

그렇게 평소처럼 투닥투닥 아웅다웅 내 첫 파티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우리에게 놀라운 소식이 도착했다.

시종장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왔던 것이다.

“폐하. 하스티아로부터 사절단이 도착했사온데……!”

이어진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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