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0화 (161/218)

Level 23. 메인 퀘스트 : 추운 나라에서 온 사절단 (02)

***

저녁 6시.

마침내 예정된 황녀의 첫 파티가 열렸다.

황녀궁의 문이 열리자 목을 빼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큰 사고나 소요가 벌어지지는 않았는데.

라이언을 중심으로 한 황녀의 직속 기사단이 질서를 지킬 수 있도록 관리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줄 순번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거나, 거래를 하는 등의 일은 전부 막을 수 있었다.

파티는 원래 황녀궁의 유리 정원에서만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계획을 바꾸어 황녀궁 전체를 다 쓰는 것으로 규모를 확장했다.

황녀궁의 시녀장이자 유모인 엘제가 본궁과 황후궁, 황자궁에도 협조 요청을 넣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궁 앞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고 경악해서 빠르게 결정을 내린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급하게 규모를 늘렸음에도, 꽤나 그럴듯한 파티가 마련될 수 있었다.

황녀궁에 들어선 이들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궁 정면에 위치한 미로 정원이었다.

특히, 정원의 장미꽃 덩굴 위에 자리 잡은 눈부시게 빛나는 크리스탈 천사상.

황녀 또래의 소녀들이 재잘거렸다.

“저게 그 유명한 조각상이군요!”

“과연 황궁 앞 광장에 있는 분수대 천사상과 닮았어요!”

“모델이 같으니 그렇겠죠.”

그들의 말대로였다.

황녀궁 정원에서 사랑스럽게 서 있는 천사상의 얼굴은 이 궁의 주인을 꼭 빼닮았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분수대 천사상보다 두세 살 정도 나이를 더 먹은 듯하다는 것 정도?

“황녀님의 열 살 생일을 기념해서 황후 폐하께서 직접 만드셨다죠?”

“게다가 저 조각상은 크리스털이 아니라, 황후 폐하의 마력이 결정화된 마석이래요!”

“아, 들은 적 있어요. 황자 전하께서 아끼시는 피불라도 그 안에 든 황녀님의 선물이 망가지지 않도록 마력을 결정화하신 거라고.”

“마력을 이렇게 결정화하는 게 가능하다니, 정말로 신기해요.”

“세상에. 황후 폐하도 황자 전하도 황녀님을 정말 끔찍이 아끼시나 봐요.”

“황녀님께선 너무 감동하셔서 눈물까지 보이셨다네요.”

“어쩜. 부러워라. 저희 가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사방에서 찬양과 감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조각상과 연관된 사실은 대부분 소문난 대로였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소문과 달랐는데…….

황녀가 보인 눈물은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으아앙! 왜 저런 조각상이 내 궁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건데! 난 저렇게 가증스러운 표정은 안 짓는다구!”

그러나, 조각을 만든 당사자인 황후 이젤리아가 이렇게 말하자.

“아가. 사실 엄마가 하스티아에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날만을 기다리면서 생일마다 마력 결정으로 조각상을 만들었단다. 그걸 이번 네 생일에도 재현해서 보여 주고 싶었는데……. 우리 딸 마음에 안 든다면 어쩔 수 없지.”

“아뇨! 마음에 들어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것 보세요,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났는걸요!”

처연한 표정을 짓는 엄마의 말에 아나트리샤는 재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특히나 엄마의 마력 결정은, 오빠의 마력 결정만큼이나 아나트리샤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키워드였다.

이젤리아가 돌아온 후.

황녀궁 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마력석 블록을 보고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한 뒤로 말이다.

[아. 이건 정말 오랜만에 보네. 내전 중에 내 마력 결정으로 만들어서 보냈던 거야. 아가가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기뻤는지…….]

그렇다. 

평범하게 가지고 놀았던 블록 장난감이 사실 엄마의 선물이었다는 것을, 아나트리샤는 꽤 늦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루퍼스리안에게도 이런 식의 선물이 꾸준히 도착했다고 했다.

아나트리샤는 기쁨의 눈물이 새삼 핑 도는 걸 애써 억누르면서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이 장난감을 제일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요! 고마워요, 엄마!]

그런 사정이 있다 보니, 엄마가 딸을 위해 직접 마력 결정으로 만든 조각상이라는 말에, 아나트리샤는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을 본뜬 조각상이 정원 한가운데에서 번쩍거리는 것을, 황녀는 해탈한 표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저건 천사야. 내 조각상이 아니라구. 저렇게 가증스럽게 귀여운 척하고 있는 건 내 모습이 아니야. 레드 썬!’

그 밖에도 파티에 참석한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지게 하는 것들은 많았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오는 데에 성공한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 곳곳에 놓인 아름다운 장식물이나, 조각상, 정원수와 꽃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곳곳에 놓인 각종 음료와 핑거 푸드들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갈하고 귀여웠다.

눈썰미가 있는 이들은 파티장의 시중인들 사이에, 황제나 황후 직속의 시종 시녀들이 끼어 있는 걸 눈치챘다.

“과연 두 분 폐하께서 황녀님을 그렇게 아끼신다더니.”

“줄이 엄청나서 내심 다 수용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다들 어떻게든 이 파티를 통해 황녀에게 눈도장을 찍어 보겠다는 열의를 불태웠다.

게다가 어린 영애들을 설레게 하는 사실이 또 있었는데.

‘아까 분명히 가르텐 소공작이 파티 개최를 돕겠다고 먼저 들어갔었는데……. 어디 있는 거지?’

‘그랑디오르 공작님은 계속 입구를 지키고 계실 생각인가? 그래도 곧 파티에 참여하시겠지?’

‘황자 전하께서는 반드시 오늘 나타나실 거야! 평소에는 파티나 살롱 같은 자리를 안 좋아하신다지만, 무려 황녀님께서 직접 준비한 첫 파티니까!’

루퍼스리안 황자.

그랑디오르 공작.

가르텐 소공작.

모두 기라성 같은 이름이지만, 워낙 성격이나 활동 영역이 달라 공통점이라 할 것은 몇 없었다. 

그러나 사교계에서 통하는 이들의 가장 큰 이미지는 하나였다.

‘현재 사교계에서 영애들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인 소년 및 청년들이라는 것.’

그리고,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황녀님이 아니면 절대 한 번에 볼 수 없는 라인업이야!’

작게는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직접 눈에 담겠다는 의지, 혹은 그들의 옆자리를 노리겠다는 의욕이 정원이 뜨거워질 정도로 불타올랐다.

그렇게 소녀들의 열기가 불타는 가운데.

이 자리의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이 제국의 빛나는 영광, 아나트리샤 루스템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얼마 전 열두 살 생일을 맞이한 황녀는 이제 제법 의젓해 보였다. 

물론 그 이상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태였다.

아나트리샤는 당당한 걸음으로 황녀궁의 건물에서 나와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녀의 작은 손을 잡고 함께 입장한 이는, 그야말로 대관식 때처럼 찬연한 은빛 성장을 한 황후 이젤리아였다.

“세상에! 황후 폐하께서 직접 참여하시다니!”

“게다가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께서도 함께 오셨어요!”

황자의 참여는 다들 예상했다.

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등장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아무리 황제 부부의 딸 사랑이 지극하다지만.

루스템 황실의 예법상 다른 사람이 주인으로 있는 자리에 황제와 황후가 손님으로 참여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든 누구도 제국의 태양 앞에서, 그 대신 주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황녀의 입장이 먼저 호명된 것은, 황녀가 이 자리의 주인이라는 걸 알리는 방증이었다. 황녀가 직접 준비한 자리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방에서 경악과 경탄의 말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두 분 폐하께서 얼마나 황녀님을 아끼시는 건지…….”

“게다가 황자님도 엄청나게 유명하시잖아요. 황녀님 사랑으로.”

“그야말로 황실의 보물이자 중심축이시네요.”

게다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황녀를 중심으로 한 황실 일가족의 뒤를 따라.

제국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함께 자리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사교계의 별들이 모인 자리였다.

“허. 에아루스 소후작이 정말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군. 그동안 황녀궁의 대장간에서 두문불출한다고 들었는데.”

우선, 황녀의 시녀로 봉직하고 있는 에아루스 소후작, 아멘다.

그녀가 귀족 영애로서는 드물게도, 전설적인 능력을 가진 무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전 대륙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한 번이라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애태운다는 건 유명했다.

특히나 지금 황녀의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가 아멘다의 첫 작품이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팔찌가 황녀의 의지에 따라 모습을 바꿔 마치 태양신의 무기 같은 형상을 띠었고.

이를 우연히 목격한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찬양했기 때문이다.

“아, 드디어 그랑디오르 공작님이 들어오셨어요.”

“역시 바로 황녀님께 가시네요. 하긴, 황녀님의 첫 번째 기사이시니까.”

여러 가문의 견제도 많이 받고 있지만, 그만큼 무수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현 제국의 최연소 공작.

“아,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은 종을 가르텐 소공작이 가지고 오는군요!”

황녀가 입장한 맞은편에서 은쟁반에 받친 은 종을 들고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바로 가르텐 소공작 코넬.

소년은 공손하게 황녀에게 은 종을 바쳤다.

“황녀 전하. 이제 종을 울려 연회의 시작을 알리시지요.”

“고마워. 코넬.”

루스템 제국에서 고귀한 혈통의 여성이 처음으로 사교계에서 파티나 살롱을 주최할 때.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은 종을 가져와 울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은 종은 비슷한 지위와 나이 대의 소년이 가져와 주는 것이 관례였다.

가족이나 소녀를 모시는 기사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은 종을 건네는 자리를 눈 뜨고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루퍼스리안은 은쟁반을 든 소년을 불퉁하게 노려보고 있었고.

라이언은 사람 좋게 하하 웃고는 있었지만, 사실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들은 코넬이 황녀에게 이름을 불린 순간, 아주 희미하게 볼을 붉힌 걸 놓치지 않았다.

특히, 루퍼스리안은 아주 눈으로 정원까지 불태울 기세였다.

‘역시 내가 하스티아의 왕손 신분으로 은 종을 들겠다고 계속 우겼어야 했는데!’

황자가 하는 건 관례상 안 된다고 하자, 루스템 황족 지위가 아니라 하스티아 왕손으로서 하겠다고 땡깡을 부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실패했지만.

서로서로 엇갈리는 생각 속에서, 아나트리샤는 아멘다가 만든 은 종을 들어서 가볍게 흔들었다.

딸랑-, 딸랑-.

청명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짐과 동시에.

정원과 유리 정원, 황녀궁의 홀 안쪽에까지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작은 태양을 닮은, 하지만 경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빛나는 구슬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꺅! 이 빛은 뭐지?”

“화, 황녀님의 마력이다!”

궁 내부와 유리 정원에는 각종 촛대와 등잔, 마력석을 이용한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이미 저녁이고 곧 해가 질 테니 당연했다.

하지만 원래 예정과 달리 급하게 파티장으로 쓰게 된 정원에는 광원이 모자랐다.

아나트리샤는 그걸 자신의 마력으로 만든 빛 구슬을 띄우는 걸로 단번에 해결해 버렸던 것이다.

‘후. 그럴듯해 보여서 다행이야.’

아나트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그러면 모두 파티를 즐기도록.”

황녀궁 전체가 부드러운 빛에 감싸인 채, 기쁨과 감탄의 환호성 속에서 황녀님이 처음으로 개최하는 파티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어떤 근심도 없다는 듯 행복하게 웃고 계셨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사절단을 만나러 바로 안 가 보셔도 되는 걸까.’

우리가 파티에 참여하기 직전 도착한 소식은 바로 하스티아의 것이었으니까.

“폐하. 하스티아로부터 사절단이 도착했사온데, 폐하를 한시라도 빨리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파티장에 들어오는 걸 택했다.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하스티아를 지키느라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한 시간이 길었던 게 미안하신 거야.’

나는 괜찮은데.

그러자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찡긋했다.

동시에 엄마가 시종장에게 한 대답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군. 사절단이라니. 나는 사전에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어.”

하스티아의 왕세녀인 엄마는 당연히, 본국 내부와 직접 소통하는 창구를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 공식적인 사절단이 오면서 엄마에게 어떤 언질도 없었다는 건 이상했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사실.

그리고, 파티가 끝난 그날 밤.

뒤늦게 엄마가 하스티아의 사절단을 접견하는 자리에 끼어들었을 때.

나는 낮에 느낀 불길함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절단은 더없이 불손한, 적의마저 느껴지는 태도로 엄마에게 선언했던 것이다.

“하스티아 국왕 폐하의 명에 따라, 왕녀 전하를 나라에 배반한 죄와 국왕 및 왕세자 전하에 대한 반역의 죄를 물어 체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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