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1)
눈앞이 온통 새하얗다.
휘이잉-.
고막을 갈라 버릴 듯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진동했다.
바람의 움직임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지금 이곳에선 그 움직임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눈과 얼음 파편이 칼바람을 따라 어지럽게 춤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 하고 입김을 내뿜자, 하얗게 김이 서리는 정도를 넘어서.
공기 중에 엄청나게 작은 얼음 파편이 만들어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물론 이건 내가 마력으로 시력을 강화하고 있어서 가능한 거지만.
포탈을 통과하기 전까지 우리는 여름의 날씨 속에 있었는데.
지금은 한겨울, 그것도 지독한 눈보라가 가득한 환경으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나도, 오빠도 놀라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미 들은 적 있기 때문이다.
“하스티아에는 사계절이 없단다. 1년에 두 달가량 되는 해빙기 외에는 모두 겨울이지. 그나마도 하스티아 북쪽에는 해빙기조차 오지 않는단다.”
황궁에서 함께 지낸 5년간.
엄마는 나와 오빠에게 고향인 하스티아의 이야기를 종종 해 주셨다.
더없이 그리운 목소리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오라버니인 에즈몬드와는 제법 친한 사이였단다. 물론 너희처럼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서 부음을 들었을 땐 많이 놀라고 슬펐었지.”
“부왕, 그러니까 너희 외할아버지는……, 으음. 실제로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솔직히 그다지 성격이 좋지는 않으시단다. 하지만 너희를 아주 많이 보고 싶어 하시는 건 분명해.”
엄마는 상냥하게 말해 주셨지만 나는 들어 버렸다.
엄마가 외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 이를 갈며, ‘영감…’ 어쩌고저쩌고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오빠와 난 무언의 시선으로 못 들은 것으로 하자고 합의를 마쳤다.
여하튼, 처음 보는 하스티아는 엄마의 설명 그대로였다.
눈이 멀 정도로 희고, 살을 엘 정도로 날카로운 눈바람이 부는 땅.
그때 엄마가 환하게 웃으면서 우리 앞에서 손을 벌려 인사를 했다.
“다들 어서 오세요. 내가 태어난 나라, 하스티아에.”
엄마가 태어난 나라에 언젠가는 한번 와 보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가족 모두와 함께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마음 편하게 외가 방문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외가의 상황을 파악해서, 감히 엄마를 반역자라고 칭한 놈들을 잡아서 족쳐야지!’
어지러운 눈보라 사이로, 저 멀리 하스티아의 왕성 빙해성이 보였다.
우리는 사전에 세워 둔 계획대로 눈보라 속에 숨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현재 하스티아 왕성은 어수선했다.
옥좌의 홀로 이어지는 외성의 복도에 하스티아의 대표적인 대귀족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불안감과 당혹스러움이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열세 일족이 모두 칙명을 받은 게 틀림없습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비체가 말고는 다 모이지 않았습니까.”
비체가를 비롯한 열세 가문은, 하스티아를 이루는 열세 일족의 수장들이다.
그들 모두가 소집되는 경우는 딱 두 경우뿐이다.
‘후계자 선포. 혹은…… 새로운 국왕의 즉위.’
그리고 이들을 불러모은 칙서의 내용은 후자였다.
“하지만 에즈몬드 전하의 대관식을 이유로 열세 일족을 모두 불러들이다니요.”
“에즈몬드 전하께서 지난 반란 때 돌아가신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닙니까.”
“소리를 줄이시오. 자칫 잘못하다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어.”
“……그 에즈몬드 전하께서 살아 계신다는 말이 있소.”
“뭐라고요?”
“그것도 직접 이젤리아 전하가 자신을 해하려 한 흉수라 고발했다는 소문까지 있단 말이오.”
중소 일족의 수장들은, 보란 듯 외궁을 감시하는 비체 일족의 사병들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젤리아 님이 어떤 분인지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펜의 반란에 가장 큰 이득을 보신 게 이젤리아 전하임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요. 결과적으론 그 때문에 후계자 자리가 공석이 되었고,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달려와 왕세녀 지위를 이으셨으니.”
“아니, 그때 그분이 아니면 하펜의 반란을 진압할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까!”
의견이 이리저리 엇갈렸다.
비체 일족의 주장에 힘을 싣는 자들.
그리고 이젤리아의 편을 드는 이들.
차이가 있다면, 비체 일족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이들은 배를 내밀고 소리를 높였고.
이젤리아를 믿는 이들은 주변을 지나는 비체 일족의 사병들을 보고 목소리를 낮추어야 했다.
사실상 분위기는 이미 일방으로 흐르고 있었다.
대표적인 친이젤리아파인 맥밀런 일족의 수장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니, 하펜의 반란 때는 꼬리를 말고 숨어 있기 바쁘던 자들이……, 이제 와서 이젤리아 전하를 반역자로 몰아?’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여기서는 소수에 속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젤리아 님이 너무 오래 나라를 비우셨어.’
벌써 5년이다.
맥밀런의 수장은 국왕의 인장이 찍힌 에즈몬드의 대관식 칙서를 받자마자, 바로 이젤리아에게 연통을 넣었다.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다.
하지만 아직 제국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스티아 내에서 이젤리아는 제국의 황후이기에 앞서 여전히 자신들의 왕세녀였다.
애초에 하스티아는 왕족을, 특히 눈과 얼음의 마력을 가진 왕족을 타국으로 보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실상 이젤리아가 최초였던 셈이다.
하스티아에서는 얼음의 마력에 왕국의 존망이 달려있으나 모든 왕족이 똑같이 타고나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카스톨트와 이젤리아의 결혼은, 당시 다른 후계인 왕세자가 건재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사자의 강력한 의사 표현으로 인해 이례적으로 진행된 혼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얼마 뒤 제국 황제의 잘못으로 이젤리아가 이혼하고 돌아와 왕세녀 지위를 이으며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5년 전, 자식들을 데려오겠다며 간 이젤리아가 황제와 재결합하여 다시 황후가 되기 전까지는.
왕족을 잃은 하스티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 떨어진 꼴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런 의견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체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신지.’
‘이젤리아 님은 하스티아를 버리신 것인가!’
물론 이젤리아는 지난 5년 동안 부친이나 측근들을 통해 긴밀하게 소식을 주고받았고.
왕족으로서 하스티아 내정에 어느 정도 관여를 해 왔다.
하지만 워낙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한계가 컸던 것이다.
때문에 비체가의 세력 강화를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제국은 너무 머니, 내가 보낸 소식을 듣자마자 오신다 해도 이미 몇 달 뒤이실 터.’
그때면 이미 일이 다 끝난 뒤일 게 분명했다.
그사이 비체 일족에게 이미 넘어간 이들이, 수장들 사이에서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들 보지 않았습니까! 국왕 폐하의 인장이 찍힌 칙서를요!”
“맞아요! 칙서에는 에즈몬드 전하의 대관식 발표와 함께 이젤리아 님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젠 ‘이젤리아 님’도 아니지요! 반역자를 어찌 높여 부르겠소!”
저희들끼리 기세를 탄 막말에, 맥밀런의 수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비체가의 가신 중 하나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가왔다.
신분대로라면 감히 수장들의 대화에 낄 수 없는 위치의 사람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임시로 본성의 집사장을 맡게 된 뮤텐입니다. 수장님들을 옥좌의 홀로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오오. 집사장이 되시었소. 축하하오!”
“비체의 수장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자네야말로 그 자리에 어울리지! 축하하네.”
집사장의 주변에 몰려든 이들은 하나같이 비체가를 찬양하기 바빴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로 노골적인 아첨.
맥밀런을 비롯한 1/3 정도 되는 숫자의 수장들은 불편한 속내를 애써 숨겼다.
지금 그들은 적의 아가리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일단…… 국왕 폐하를 직접 뵈어야 한다.’
하스티아에서 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는 왕권의 문제나 충성의 문제를 떠나, 국민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국왕의 마력으로 빙벽이 유지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멸망하게 되므로.
맥밀런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대체 언제 오시는 겁니까, 이젤리아 전하…….’
그 순간.
누군가가 하스티아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태피스트리가 걸린 벽을 가리켰다.
“어? 저건?”
쩌적-.
돌벽이 순식간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저런 것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힘은 한 종류뿐이었다.
그러나 이걸 깨닫기도 전에.
엄청난 충격과 소음이 그들이 모여 있던 복도를 후려쳤다.
쿵! 콰광!
얼어붙었던 벽이 단번에 박살 났다.
비명이 울리고, 부서진 벽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충격과 경악 속에서, 맥밀런은 보았다.
비체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를 돌멩이처럼 내던지는 은발의 여성을.
맥밀런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설마?!”
그렇다. 왕성의 단단한 격벽을 이렇게 완전히 얼어붙게 할 수 있는 마력도.
이를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괴력도.
단 한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이젤리아 전하!!!”
“말도 안 돼!”
사방에서 절망 어린 경악과 환희의 비명이 뒤엉켰다.
그리고, 맥밀런을 비롯한 친이젤리아파도, 비체를 대표로 하는 반이젤리아파도 예상 못 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젤리아는 이 자리에 모인 열세 부족의 수장들도, 비체의 수하들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빠르게 벽면을 얼리고 다시 부쉈을 뿐.
콰광!
다시 한 번 건물 전체가 진동하는 충격과 소음이 울리고.
이젤리아는 그대로 자신이 낸 구멍으로 달려들었다.
그 뒤를 그녀를 닮은 은발의 미소년이 빠르게 뒤따랐다.
쿵! 두두두두--!!!
다시 성벽이 박살 나는 소리와 두 모자의 발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난데없이 무시당한 수장들은 망연한 얼굴로 박살 난 왕성과, 순식간에 멀어진 이젤리아 일행을 보았다.
“어, 어떻게 이젤리아 님이 벌써 여기에?”
“그런데 대체 어디로 저렇게 급하게 달려가시는 거지?”
조금 전까지 반역자가 어쩌고 하던 자들이, 저도 모르게 이젤리아를 높여 불렀다.
꼿꼿하던 비체가의 가신들조차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마 베아트릭스나 모드리안도 이젤리아가 이렇게 빨리 오는 사태는 예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맥밀런은 그들의 행태를 비꼬아 줄 여력도 없었다.
왜냐하면 거친 눈보라 폭풍처럼 그들의 옆을 휩쓸고 지나간 이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잘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옥좌의 홀로 향하고 계신 거다!”
그렇다. 하스티아 왕성의 가장 심부, 옥좌의 홀.
당연히 대관식이 열릴 예정인 바로 그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