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2)
열세 일족의 수장들 사이에 경악이 내달렸다.
그 여파가 끝나기도 전에.
맥밀런이 가장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눈앞을 막아서는 모든 걸 박살 내며 옥좌의 홀로 향하고 있는 이젤리아의 뒤를 따라서.
***
하스티아의 왕궁은 빙해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투박한 양식으로 지어진 백색의 왕성 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얼음벽이 서 있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다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듯한 모습의 벽.
이 벽은 빙해의 바닷물이 얼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안쪽엔 여전히 차가운 북쪽의 바다가 존재한다.
때문에 빙벽 자체가 빙해의 범람으로부터 하스티아, 더 나아가서는 대륙 북쪽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얼음벽이 유지되는 것은 하스티아 국왕의 마력 덕분이었다.
때문에 루스템 제국처럼 관례나 업무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유지를 위해 하스티아 왕성에는 늘 국왕 혹은 그 후계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빙벽이 하스티아 왕실의 상징이자, 왕권 그 자체인 만큼.
국왕의 옥좌 역시 빙벽과 같은 재질로 되어 있었다.
빙해의 바닷물을 하스티아 역대 국왕의 마력으로 결정화시킨 얼음의 옥좌.
지금 그 옥좌는 비어 있었다.
강철빛 머리카락을 가진 갑옷 차림의 여자가 그 빈 옥좌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레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저 옥좌 앞에 설 때면, 특히 저기 앉은 할아버지나 고모를 볼 때면, 늘 어머니는 기분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 홀의 문이 열리며 잘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소년의 외삼촌이자, 현 비체 일족의 수장 모드리안이다.
“베아트릭스.”
“제국으로부터 소식은 있나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엔 이르지.”
“국경은 단단히 지키고 있겠죠?”
“당연하지. 이미 왕명으로 상인들의 움직임까지 막고 있어.”
이는 1년에 두 달만 제외하고 늘 눈이 오고 얼음이 어는 하스티아에선 치명적인 일이다.
가죽이나 순록의 뿔, 마력석 결정 등의 특산물을 식량과 교환하는 게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제국군이라도 하스티아 국경 안까지 쳐들어오진 못해. 지금이 해빙기도 아니고. 당장 거리만 생각해도 사절단으로 보낸 자툴렌 백작부터가 제국 수도까지 한 달 반은 걸렸을 테니까.”
“그 여자는, 이젤리아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글쎄. 그냥 제국에 눌러앉지 않을까? 애초에 우리가 사절단을 보낸 것도, 정말로 체포해 오려는 게 아니라, 협박하기 위한 거였으니까.”
너는 이제 모국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혔으니, 하스티아로 돌아오지 말라-는.
모드리안은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나라면 따뜻하고 풍요로운 제국에서 즐기며 살 것 같은데 말이야.”
그는 꽤 진심이었다.
이 춥고 척박한 땅을, 모드리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모드리안은 자조적으로 웃고는 말을 돌렸다.
“에즈몬드… 우리 새로운 국왕께서는?”
“쉬러 가셨어요.”
침착한 누이의 대답에, 모드리안의 얼굴에 조소가 스쳤다
‘저 차분한 꼴이라니. 설마 ‘그걸’ 진짜 제 남편이라 믿을 정도로 미친 건 아닐 테지.’
아니, 정말로 미친 것이라도 상관없을 터였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저 얼음 왕좌의 주인을 비체가로 바꾸는 것이니까.
모드리안은 과장되게 활달한 목소리로 웃으며 조카를 안아 올렸다.
“우리 어린 왕자님. 하루빨리 얼음 옥좌에 앉으셔야지요. 어머니와 또 이 삼촌을 위해 말입니다.”
“……네.”
소년은 심약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소년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아이가 옥좌에 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하스티아 현 국왕의 손자이자, 죽은 왕세자 에즈몬드의 유일한 아들, 시벨.
소년에겐 하스티아의 국왕에게 반드시 필요한 얼음의 마력이 없었으므로.
지금 소년을 저 옥좌에 앉힌다면, 옥좌의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얼음 조각이 되어 버릴 거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외삼촌은 아이를 어떻게든 저 자리에 앉히려 하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시벨은 남몰래 작은 몸을 떨었다.
그 떨림을 눈치챈 모드리안은 작게 조소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삼촌의 부하들이, 우리 왕자님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까요. 반역자만 처리하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때였다.
부산스러운 발소리와 비명이 들려온 것은.
“뭐지?”
“감히 어전에서 이 무슨……!”
놀랄 정도로 빠르게 달려오는 이 소음의 원인이 누구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왜냐면 강철로 만들어진 옥좌의 홀 문이 박살 나며, 그 파편을 밟고 들어선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5년 만인가. 베아트릭스. 그리고, 모드리안.”
얼음 옥좌처럼 시리게 빛나는 은발.
신비로운 청보랏빛 눈동자.
모드리안이 비명을 내질렀다.
“이젤리아! 어, 어떻게 지금 여기에?”
지금 하스티아와 제국이 국경은 비체 일족의 사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제국군이나 이젤리아가 국경을 돌파해 왔다면, 당연히 봉화 등을 통해 소식이 먼저 와야 했다.
하지만 국경에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아니, 그 전에 물리적으로 지금 도착하는 건 불가능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반은 걸릴 텐데!’
비체가의 병사 하나가 이젤리아의 옆에 선 소년의 손에 내던져졌다.
병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베아트릭스의 앞에 떨어져 기절했다.
소년의 은발, 그리고 한눈에도 이젤리아를 닮은 이목구비를 보고 베아트릭스는 이를 갈았다.
“저 아이가 루퍼스리안…인가.”
하스티아 내에도 이젤리아의 장남 루퍼스리안이 얼음의 마력을 가졌다는 건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반란 진압이 끝난 뒤, 이젤리아가 제국으로 향했을 때도 큰 반발이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루퍼스리안이 이젤리아의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으므로.
물론 아닌 이들도 있었다.
“이 반역자! 무슨 사특한 수를 쓴 거지?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시벨을 후계로 내세우는 베아트릭스와 모드리안으로 대표되는 비체 일족이 그들이었다.
모드리안의 경악에 이젤리아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내가 딸을 잘 둬서 말이야.”
“……?”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모드리안은 욕설을 내뱉으며 외쳤다.
“잘도 헛소리를! 어서 반역자들을 막아라!”
하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이 홀까지 저들이 들어왔다는 건, 이 앞을 막아서는 비체 일족의 병력을 전부 때려 부쉈다는 의미니까.
그것도 안쪽으로 소식을 전할 사이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모드리안의 명에 따른 몇 안 되는 병력들은, 이젤리아는커녕 루퍼스리안의 손에 나가떨어졌다.
쿵!
마지막 기사가 꼴사납게 기절했고.
이젤리아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아갔다.
홀의 가장 안쪽, 얼음의 옥좌를 향해.
모드리안도 베아트릭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젤리아는 저 옥좌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들이나, 비체의 피를 이은 시벨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베아트릭스의 눈에 차가운 불꽃이 어렸다.
그녀가 소리를 높여 외쳤다.
“폐하! 여기 반역자가 감히 당신의 옥좌를 흙발로 더럽히려 합니다!”
그와 함께, 무언가가 질질 끌리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홀의 2층 테라스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고 이젤리아의 청보라색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에즈…몬드?”
***
쿵! 쿠릉-.
한참 위쪽에서 들리는 소음에, 긴 은빛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겐지.”
노인이 있는 이곳은, 하스티아 왕성의 지하 감옥 중 가장 크고 호화로운 곳이다.
하지만 아무리 꾸며 놨다 해도 그에게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장소이기도 했다.
노인은 다름 아닌 현 하스티아 얼음 옥좌의 주인, 크눔펜 3세였으므로.
노인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젤리아…….”
하나 남은 딸의 이름을.
5년 전, 만류하는 부친의 엄명마저 거부하고 떠났던 딸의 등이 떠올랐다.
“정말 지금 떠나야겠느냐?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면?”
“허락하시든 하시지 않든 저는 갑니다. 아이들을 만나야 해요.”
“내가 너에게서 왕세녀 지위를 거둔다 해도?”
“애초에 원한 적 없어요.”
딸은 그렇게 말하며, 표표히 떠나 버렸다.
그리고 5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크눔펜 국왕은 수갑으로 구속된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리고 낮게 이를 갈았다.
“이 망할 딸내미 같으니라고! 늙은 애비는 그냥 내팽개쳐 놓고! 아주 살 만한가 보지?”
그때였다.
“흐응-. 진짜 엄마 말대로 한성격 하시네요.”
너무나도 귀여운 목소리였다. 어린 소녀의 올망졸망한 목소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들려왔다.
크눔펜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 노망이 났나?”
그러자, 키득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그리고 마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던 지하 감옥의 벽에서 한 소녀가 나타났다.
지하 감옥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더더욱 짙어 보이는 붉은 금발.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던 딸의 눈동자를 그대로 닮은 청보랏빛 커다란 눈.
이것은, 꽤 오래전 세상을 떠난 그의 하나뿐인 아내를 닮은 것이기도 했다.
설마…….
“아가?”
그러자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딸아이가 저 나이였을 때를 꼭 닮은 눈매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