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7/218)

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3)

***

놀랍게도 처음 만나는 외할아버지는 내 이름을 바로 입에 담았다.

“아나트리샤?”

“정답!”

나는 부러 활달하게 말했다.

할아버지지만, 처음 만나는 거다 보니 어색하기도 했고.

또한 이렇게 연로하신 분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마음과 몸이 많이 상했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럴수록 더더욱 즐겁게 해드려야지!

“잘 맞추셨으니까 상을 드릴게요!”

“무슨 상 말이냐?”

나는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당연히 여기서 탈출하는 거죠!”

할아버지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어떤 표정이라고 꼭 집어 설명하기 힘든 얼굴.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궁예> 스킬은 쓰지 않아도 말이다.

저 표정은 감동 혹은 감격을 억누르려는 사람의 얼굴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두 번째 생에서야 겨우 만나게 된 외할아버지도 그런 사람인 게 아닐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또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네 엄마를 꼭 닮아서 굼벵이같구나.”

“네?!”

이 말에는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 굼벵이 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으니까.

‘1인 전차 부대라든가, 인간 공성추 소리는 많이 들어봤지만!’

신선해!

내가 눈을 빛내는 사이, 할아버지의 투덜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이렇게 작으니 아기 굼벵이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아, 머리도 꼭 굼벵이처럼 돌돌 말고 있는 게 딱 어울리는구나.”

지금 난 움직이기 편하게 똥머리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침에 아빠가 직접 묶어 주신 거였다.

그걸 굼벵이 머리라고 하다니!

정말 신선한 반응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처음 만난 손녀 앞에서 민망해하는 노인’의 표정을 버렸다.

그리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위가 소란스럽던데. 네 엄마가 온 게냐?”

이건 하스티아의 국왕으로서 할아버지의 모습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도 왔어요! 그리고 아빠도…….”

이 말에 냉철한 국왕의 가면을 썼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다시 무너졌다.

“그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와?”

“…….”

우와, 이거 그거 아닌가?

전생에 아침 드라마에서 꼬박꼬박 나오던!

사위를 못마땅해하는 장인어른의 말투!

내가 여러 신선함에 몸을 떠는 사이.

할아버지는 조금 전에 무너진 적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냉정한 국왕으로 돌아오셨다.

“황제는 무슨 생각인 건지 모르겠구나. 제국을 한 달이 넘게 비우다니.”

“아, 걱정 마세요. 저희 오늘 아침에 황궁에서 출발했어요!”

할아버지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뭐라고?”

“오늘 아침이요!”

“농담하지 말거라.”

“진짠데요!”

하긴, 이쪽 기술로 대륙에서 대륙을 넘어갈 수 있는 워프 포탈은 존재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만했다.

그런 의미에서 출발 전에 며칠간 워프 포탈을 아멘다에게 맡겨서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 줬는데.

이번 생에도 포탈 개량형을 개발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엄마가 하스티아 걱정 더 안 하셔도 되잖아!’

이번처럼 말이다.

할아버지는 찡그렸던 표정을 다시 폈다. 분명 내 말을 어린애의 황당한 소리로 치부하고 계셨다.

“어쨌든 빨리 이 빌어먹을 곰팡내 나는 데에서 탈출해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셨다.

아직 내가 작다 보니, 살짝 끄덕이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 감옥엔 너 혼자 온 게냐?”

“네!”

“이것이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건가. 제일 위험한 데에 핏덩이를 던져 놔?”

“저 핏덩이 아닌데요?”

“어제 태어난 주제에 가만히 있거라!”

나 어제 태어난 거 아닌데!

게다가, 알맹이는 30년 넘게 살았다구요!

하지만 이런 말을 해 봤자, 할아버지는 꼬맹이의 허무맹랑한 망상으로만 생각할 뿐일 거다.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가서 네 엄마나 아빠, 하다못해 오빠를 데려오거라. 갈 때 조심하는 것 잊지 말고 말이다.”

그리고 소리를 낮추었지만, “으잉, 이런 어린 것을. 쯧쯧.” 하는 중얼거림이 분명히 들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네가 아무리 마력을 각성했어도, 혼자서는 무리다.”

“아니요! 제가 우리 가족 중에서 제일 강하다고요!”

나는 가슴을 쑥 내밀었다.

셀리나가 최선을 다해 털가죽으로 돌돌 말아놔서, 별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그러자 할아버지는 “풋!”하고 웃더니, 사슬에 매인 손으로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가 제일 강할 테지. 하지만 가서 엄마 아빠를…….”

나는 씩 웃으며 마력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뭔 수를 썼는지 여기서는 마력이 전혀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지하실, 정확히는 하스티아 왕성 곳곳에 부정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결계가 있었으니까.

‘사교도 놈들의 농간이 있으리라는 건 이미 예상한 바야!’

분명히 검은 수정을 이용한 결계 안에서는 태양의 마력조차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우웅!

팔찌 모양으로 변형되어 있던, 내 ‘아스트라’가 검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할아버지의 손목과 발목을 묶고 있는 사슬을 단번에 끊어 버렸다.

“마력이… 통하지 않아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순식간에 자유로워진 두 손을 보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

“에즈… 몬드?”

이젤리아의 목소리는 경악과 의심으로 떨렸다.

2층에서 비틀거리던 ‘그것’이 제 팔다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이성이 없는 존재라 그저 부름에 응해 앞으로 향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1층과 2층의 높이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기다시피 하더니 2층의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쿵!

옥좌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린 것은, 분명 인간의 형체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는 절대 볼 수 없는 형상.

회색으로 물든 피부. 움푹 꺼져 검게 물든 눈.

그야말로 움직이는 시체였다.

이마에 박힌 정체불명의 붉은 색 돌이 불길한 빛을 내뿜는다.

기괴한 신음 섞인 말이 시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으으어으. 나를 죽인 건…… 이젤리…….”

그것은 이 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악을 썼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선명한 희열이었다.

“보라고! 우리의 폐하께서 증언하고 계시잖아! 자신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이젤리아는 경악에 이어 분노하며 외쳤다.

“에즈몬드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베아트릭스!”

“무슨 짓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왕위를 손에 넣겠다고 제 오라비까지 해한 네가 말이야!”

한눈에도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베아트릭스의 저런 상태는 이젤리아에게 낯익었다.

약 12년 전, 반역자 하펜에게 오빠 에즈몬드가 암살당한 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마저 떼어 두고 돌아온 이젤리아를, 저런 독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으니까.

“꼭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오셨군요? 해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다더니.”

강보에 싸인 시벨을 안고서, 베아트릭스는 이젤리아가 왕세녀의 자리에 오르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당시 시벨은 너무 어렸고, 마력을 각성할지도 불확실했으니까.

하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내 남편을 죽인 것은 이젤리아다! 제 오라비를 죽인 여자가 하스티아의 왕위를 이어서는 안 돼!”

“진정한 후계자는 시벨뿐이야!”

이 말을 진지하게 듣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하펜의 반란이 워낙 대규모였고.

이젤리아는 지금까지 먼 제국에 쭉 머무르다 갓 낳은 딸까지 두고 본국으로 돌아와, 반역을 진압한 것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그러나, 베아트릭스의 친정인 비체가만은 달랐다.

그들은 베아트릭스의 원망 어린 망상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앞장서서 소문을 부추겼다.

그리고 이젤리아는 그런 베아트릭스와 비체가를 묵인했다.

이 사실은 여러 의심을 낳았다.

“왜 베아트릭스 님의 말을 부정하지 않겠어요. 찔리는 게 있어서겠죠.”

“생각해 보면 하펜의 반역으로 가장 많은 걸 얻은 분이…… 이젤리아 전하시네요.”

베아트릭스와 비체가는 온 힘을 다해 나라 전체에 이 의심의 독을 뿌려 왔다.

그것이 지난 5년간 이젤리아가 나라를 비운 동안 독버섯처럼 자라나, 마침내 지금 만개한 것이다.

베아트릭스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자아! 폐하! 어서 저 반역자를 죽여, 당신의 원한을 갚으세요!”

기괴하게 일그러진 모습의 에즈몬드가 네발로 기어 다가왔다.

그걸 이젤리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았다.

“설마 망자의 안식마저 방해할 줄은…….”

“네가 죽어야 저분이 안식에 드실 수 있어!!”

발악하는 베아트릭스와 야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중인 모드리안.

그 사이에 낀 어린 시벨은 파리하게 굳어 울음은커녕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조카의 상태를 본 이젤리아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베아트릭스, 그리고 비체의 수장. 내가 왜 너희들이 하는 짓을 알면서 그냥 뒀는지 아나?”

“그야 당연히 우리가 두려워서겠지! 네 죄를 알고 있는 우리가!”

“아니.”

이젤리아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말려 올라갔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였지. 언제든 뽑아낼 수 있는 마당의 잡초나 마찬가지니까.”

노골적인 조롱에, 베아트릭스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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