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4)
“잡, 초?”
단어 한 자 한 자를 내뱉은 목소리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젤리아는 더더욱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바쁘기도 했고, 또 아이를 위해 놔뒀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된 모양이야.”
애초에 이젤리아가 베아트릭스와 비체 일족의 방자함을 그냥 넘긴 데에는 그 이유가 컸다.
이젤리아가 이혼하고 하스티아로 돌아왔을 때.
시벨은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이였다.
모친의 돌봄이 절대적인 시기.
갓난아이였던 아나트리샤를 떼어 두고 왔던 이젤리아로서는, 비슷한 나이 대의 조카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쳐 내고 이젤리아가 시벨을 직접 돌볼 수 있었던 상황도 아니었다.
그녀는 하펜의 반란군을 진압해야 했으니까.
그녀의 사촌 하펜은 상당히 강력한 수준으로 얼음의 마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스티아에서 얼음의 마력을 가진 이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마력을 가진 왕족뿐이다.
국왕 크눔펜은 왕좌를 지켜야 하니, 이젤리아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란 진압이 끝난 뒤에는…….
‘곧 아이들을 보러 떠났으니 시벨을 챙길 여유가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 어미와 외삼촌의 사이에서, 시벨은 거의 짓눌려 보였다.
보란 듯 아이의 어깨를 쥔 모드리안의 손길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 역시 아는 것이다.
지금 비체가의 입장에서 시벨은 효과적인 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하지만 이젤리아도 루퍼스리안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 가족이 함께하는 한, 맞서야 할 그 어떤 적도, 다가올 어떤 일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이젤리아는 신랄하게 말했다.
“조금 번거롭고 늦긴 했지만, 잡초는 뿌리까지 완전히 제거해야지. 그래야 어린나무와 꽃을 지킬 수 있을 테니.”
으득!
베아트릭스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이젤리아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베아트릭스의 인내심과 이성이 빠르게 사라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넌 처음부터 그랬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나라의 왕비가 될 몸인데!”
“될 뻔했지. 오라버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젤리아는 냉정하게 오류를 정정해 주었다.
“그건 너 때문이잖아! 네가 그분을 해쳤다고!”
“……정말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지만. 베아트릭스. 너도 그때 봤잖아? 오라버니의 임종을 나와 함께 곁에서 지켰지.”
에즈몬드는 당시 습격과 동시에 바로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두 달 가까이 병상에 누워 있다가, 이젤리아가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지키고 있었던 임종의 자리에서.
에즈몬드는 쌍둥이 누이에게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하스티아를, 그리고 부왕을 부탁한다. 이즈.”
“알았어, 에즈.”
“그리고 시벨을…….”
“걱정하지 마.”
강보에 싸인 시벨을 안은 채, 베아트릭스는 남편이 시누이에게 왕위 계승자 자리를 넘겨 주는 걸 보고 있어야 했다.
심지어 남편이 제 누이에게 부탁한 이름에는 그녀나 그녀의 가문은 없었다.
그의 탓을 하고 싶어도, 죽은 사람은 원망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당연히 자신의 것이 되었어야 할 왕비의 자리가 남편의 죽음과 함께 날아간 것도 억울하고 원망스러운데.
그 자리가 시누이에게 넘어갔다고 하니 불을 삼키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유일한 대안이었던 아들마저 마력을 제대로 각성하지 못하자, 베아트릭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 사라졌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건 부정적인 감정들뿐.
풀 곳 없는 베아트릭스의 모든 원한과 증오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오롯이 이젤리아에게 쏟아졌던 것이다.
이젤리아는 더없이 침착했다.
“내가 정말 오라버니를 공격한 범인이라면, 오라버니가 내게 나라와 아들을 부탁하진 않았겠지.”
동시에 냉정하게 덧붙였다.
“애초에 오라버니가 너를 믿지 못했던 건, 이 사태를 예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닥쳐!!!”
악에 받친 듯 처절한 베아트릭스의 비명이 홀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맥밀런을 선두로 한 열세 가문의 수장들은 조금 늦게 옥좌의 홀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젤리아와 베아트릭스의 언쟁을 반절쯤은 들을 수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일관되게 이젤리아를 에즈몬드를 공격한 흉수라 몰아갔고.
이젤리아는 침착하게 그게 사실이 아님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수장들을 당황하게 만든 건 다른 것이었다.
“에즈몬드…… 전하라고? 저게?”
“세상에…….”
사방에서 혐오감과 공포를 채 감추지 못하는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젤리아와 베아트릭스 사이에 네발로 기듯이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절대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아아--.
그것의 쭉 찢어진 입에서 냉기가 흘러나와 바닥을 얼렸다.
분명한 하스티아 왕족의 증거인, 얼음의 마력.
비록 저 움직이는 시체가 얼음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저것을, 하스티아의 왕족으로, 그들의 주인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저런 ‘것’을 데리고 대관식을 치르겠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비체가에 넘어갔던 이들조차도 저런 것을 왕으로 섬기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분위기를 읽고, 맥밀런이 소리 높여 외쳤다.
“이젤리아 왕세녀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에즈몬드 전하께서 지금 저 모습을 원하셨을 리 없소!”
“맞습니다!”
“옳소!”
“국왕 폐하께선 어디 계신 겁니까?”
“우리에게 왔던 그 칙서가 정말 그분의 의지가 맞는 것입니까?”
조금 전보다 많은 숫자의 수장들이 맥밀런의 말에 동의했다.
더 나아가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이 나타난 걸 눈치챈 모드리안이 낮게 혀를 찼다.
“쳇! 병사들은……, 젠장.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군.”
비체의 병사들은 방금 전 전차처럼 달려온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의 손에 전부 쓰러진 상태.
게다가 수장들 역시 저 기괴한 에즈몬드의 상태에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
명백히 그들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는 시벨을 안아 들고, 베아트릭스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지금은 더 상대하지 말고 이 자리를 벗어나자는 말을 하려는 차였다.
“베아트……, 어?”
푹!
내내 이젤리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베아트릭스가, 난데없이 제 오라비의 가슴팍에 칼을 꽂았다.
거무튀튀한 칼날이 마치 처음부터 거기서 돋아나 있던 것처럼 박혀 들었다.
베아트릭스는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여기서 전부 죽여 버리면 돼. 이젤리아도. 내가 이 나라의 왕비임을 부정하는 놈들도, 모조리!”
너무 예상외의 행동이라,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조차 반응하지 못했다.
아니, 이 경우에는 굳이 막아야 하는지 갈등했다는 게 더 정확하다.
자기들끼리 내분이 일어난 거면 차라리 반겨야 하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우웅-!
모드리안의 가슴팍에 박힌 검은 수정 검날이 진동하며 기묘한 공명음을 토했다.
이젤리아와 루퍼스리안의 안색이 변했다.
“어머니!”
“이건……!”
그들이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모드리안의 몸을 집어삼킨 검은 수정이 발동했다.
그 육체와 마력을 연료 삼아, 제국에서 보았던 검은 수정의 몇 배가 넘는 위력의 결계가 펼쳐진 것이다.
검은 결계는 옥좌의 홀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러자 곧 수장들 중에서 이상을 눈치채는 이들이 나왔다.
“뭐지? 왜 마력이 전혀 발동되지 않는 거지?”
“뭐? 말도 안 되는…, 어?!”
일체의 마력을 쓸 수 없어진 상황.
베아트릭스는 소름 끼치는 웃음을 터뜨리며, 아들을 품에 안았다.
“아하하하! 얼음의 마력을 가지고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젠 쓰지 못하고 여기서 다 죽을 텐데!”
“으아아앙! 그만하세요, 어머니!”
내내 공포에 질려 있던 아이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베아트릭스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광기 어린 웃음소리만을 내뱉으며, 명령을 내렸다.
“자아, 나의 폐하! 저 반역자들을 죽이세요! 우리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용서하지 마세요!”
지금 검은 결계 안에서 유일하게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
에즈몬드의 육체를 이용해 만들어 낸 괴물을 향해.
그것은 그륵거리는 기괴한 소리를 울리며, 이젤리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방으로 강력한 마력을 흩뿌리면서.
베아트릭스는 기대감과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이젤리아를 보았다.
이제, 곧 저 저주스러운 여자가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걸 보게…….
파창!
영롱한 소리와 함께 이젤리아의 목에 걸려 있던 수정 목걸이가 거대한 대검으로 변했다.
명백한 마력을 띤 대검이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새카만 손톱을 막아 냈던 것이다.
베아트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분명히 이 결계 안에서는 마력을 쓰지 못해야 하는데? 국왕조차 저항하지 못했었는데!’
하지만 이젤리아만이 아니었다.
루퍼스리안 역시 팔찌를 기다란 창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더니, 날렵하게 달려들었다.
베아트릭스의 옆에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검은 수정을 향해.
그리고.
쨍강!
검은 수정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박살 나 버렸다.
결계 역시 순식간에 흩어졌다.
베아트릭스가 미처 다 놀라기도 전.
정신을 차린 순간.
눈앞에 분노로 타오르는 청보라색 눈동자가 다가와 있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이젤리아가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감히 내 가족을 건드린 죄는, 목숨 이상으로 갚게 해 주지.”
그녀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듯한 대검의 폼멜로 베아트릭스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퍽!
단박에 갑주가 우그러지며, 베아트릭스는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녀가 놓친 시벨을 가볍게 안아 들고서, 이젤리아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반역자들을 체포하라. 이는 왕세녀의 명령이다.”
***
지하 감옥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외할아버지는 경악했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냐? 분명히 내 마력을 전혀 쓸 수 없었는데?”
나는 헤헤 웃으며 아스트라를 빙빙 돌렸다.
“아, 저는, 아니, 저희는 괜찮아요. 이 무기에는 그 결계가 안 통하거든요!”
사교도의 결계가 마력의 사용을 막기는 하지만, 다른 마력 자체를 소멸시키는 건 아니다.
단지 몸 밖으로 발동시킬 수가 없을 뿐.
그러니 몇몇 꼼수로 그걸 회피할 수가 있는데, 아스트라가 그 대표격이었다.
‘아스트라는 반쯤은 주인의 육체니까 당연히 결계 안에서도 마력을 쓸 수 있지!’
그러니까 아스트라를 가진 사람은 사교도의 결계 안에서도 자유롭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지난 5년간 모두 아스트라를 손에 넣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