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9/218)

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5)

내가 5년 전부터 아멘다를 닦달해 가며 최대한 빨리 아스트라를 만들려 노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스트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무기지만.

사교도들의 부정의 마력이나, 그것으로 만든 결계에 대항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마도 위쪽에도 할아버지를 제압한 것과 비슷한 결계를 치고 엄마랑 오빠를 끌어들이려 할 테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엄마랑 오빠도 아스트라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이제 내 할 일을 다 하면 된다.

환하게 웃으며 할아버지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엄마랑 오빠랑 아빠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겉으로는 불퉁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못이기는 척 내 작은 손에 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

베아트릭스는 절규했다.

“커헉! 어째서?! 어째서야?! 왜 통하지 않는 거지? 분명히, 분명히……!”

이젤리아는 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원래 적의 절망 앞에서는 실제보다 더 기뻐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딸이 말한 것처럼 될 테니까.

“그래야 적들의 복장을 더 뒤집어 놓을 수 있잖아요!”

과연 옳은 말이 아닌가.

‘역시 내 딸이야.’

이젤리아는 어린 조카를 아들의 손에 맡겼다.

“루퍼스!”

“네! 어머니!”

루퍼스리안은 사촌 동생을 안아 든 채 빠르게 멀어졌다.

이젤리아의 공격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잘 알기 때문이다.

마력도 없는 아이를 데리고 그 범위 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루퍼스리안과 시벨이 빠져나가자마자.

이젤리아가 난폭하게 휘두른 대검이 베아트릭스의 등을 후려쳤다.

칼날이 아니라 칼등으로.

그 덕분에 베아트릭스의 몸이 반쪽나는 건 면했지만,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리며 갑옷이 우그러졌다.

콰득!

“크헉!”

베아트릭스는 검은 피를 토했다.

하지만 이젤리아는 냉철한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일어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

순식간에 초죽음이 된 베아트릭스의 얼굴에 경악에 이어 공포가 떠올랐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 줘요, 에즈몬드!”

그러자.

그르릉-.

기괴한 짐승의 울음과 함께, 에즈몬드의 시체로 만들어진 괴물이 움직였다.

쩡!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젤리아의 대검을 쳐낸 다음.

베아트릭스를 낚아채고는,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젤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아트릭스!!!”

베아트릭스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도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괴물의 모습이 된 남편의 품에 안긴 채, 조금 전 전투로 인해 부서진 벽을 통해 빠져나갔다.

***

에즈몬드의 모습을 한 괴물이 베아트릭스와 함께 사라진 뒤.

옥좌의 홀 안은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루퍼스리안은 바로 베아트릭스의 뒤를 쫓았고.

아들에게서 조카를 받아 든 이젤리아는 홀 안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는 조카를 맥밀런에게 맡긴 뒤.

천천히 옥좌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누구도 그녀의 발걸음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현재 하스티아에서 얼음 옥좌에 앉을 수 있는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녀였으니까.

이젤리아는 고압적인 시선으로 열세 일족의 수장들을 내려 보며, 옥좌에 앉았다.

얼어붙은 옥좌의 팔걸이를 매만지는 손끝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이게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노라 주장하는 듯.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맥밀런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옥좌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외쳤다.

“왕세녀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맥밀런의 뒤를 따라 수장들의 무릎이 줄줄이 바닥과 닿았다.

그들 중에는 조금 전까지 베아트릭스와 모드리안에게 붙었던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비체가의 가신 출신인 임시 본성의 시종장조차 넙죽 엎드렸다.

“수장들이 보았다시피, 반역자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나는 이제 하스티아의 왕세녀로서, 반역자들을 처단코자 한다. 이의가 있는 자는 지금 말하라!”

당연히 감히 입을 열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아니, 딱 한 명이 있긴 했다.

“이의? 아주 많지! 내리는 눈보다 많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아는 목소리였다.

수장들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오오, 폐하!”

“국왕 폐하!”

“안 보이시기에 걱정했습니다만, 역시 무사하셨군요!”

눈처럼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입고 있는 흰 로브가 어째서인지 먼지에 절어 있었지만, 노인의 위엄까지 해치진 못했다.

그리고 수장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들의 국왕 크눔펜만이 아니었다.

국왕의 손을 잡고 졸졸 따라오고 있는 자그마한 소녀.

동글동글하게 말린 붉은 빛 도는 금발이, 아이가 기분 좋게 통통 걸을 때마다 귀엽게 뾰잉뾰잉 움직였다.

아이의 커다랗고 맑은 청보라색 눈동자는 방금 압도적인 아우라로 빠르게 홀을 제압한 이젤리아를 닮았다.

이 소녀의 얼굴을 처음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소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아나트리샤 님?”

“이젤리아 전하의 따님?”

특히 맥밀런은 바로 소녀를 알아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연! 셀리나가 보내 준 초상화와 꼭 닮으셨군! 물론 초상화보다 실물이 몇 배로 귀여우시지만!’

맥밀런의 표정이 흐뭇하게 흐무러졌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맥밀런은 이젤리아의 측근이었으므로. 

왕세녀궁에 만들어진 ‘우리 아들딸 초상화 전시관’을 이미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아나트리샤가 알면 기겁하겠지만, 지금은 먼 이야기였다.

어쨌든, 아나트리샤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걸어오다가.

방긋 웃으며 다다다 달려왔다.

“엄마!”

“그래, 우리 딸!”

이젤리아는 조금 전의 위엄 넘치고 냉혹한 하스티아의 왕세녀는 어디로 치워 버리고, 팔불출 엄마로 변신했다.

한달음에 옥좌에서 내려와 딸을 안아 드는 손길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때 대충 베아트릭스를 쫓는 척하던 루퍼스리안이 돌아왔다.

“놓치고 왔어요, 어머니. 아, 리샤. 왔구나!”

소년은 어머니와 동생을 보고 반가워하다가.

처음 보는 외할아버지를 보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크눔펜은 작게 호통쳤다.

“인사할 줄 모르냐? 네 아비가 그리 가르쳤느냐?”

“처음 뵙습니다, 할아버지.”

루퍼스리안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처음 만나는 외할아버지다.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딸의 품에 폭 안긴 손녀를 잠시 미련 넘치는 눈으로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제 엄마라고 쪼르르……, 쯧.”

노인은 꼬장꼬장하게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그리고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빽 내고 말았다.

“그놈도 왔다며? 어디 있기에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야?!”

수장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고 어리둥절했지만.

이젤리아와 두 아이들은 알아들었다.

아나트리샤가 히죽 웃으면서 대꾸했다.

“아빠는 중요한 일 하고 계세요. 걱정 마세요. 금방 오실 테니까요!”

***

지붕에 쌓인 눈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흩뿌려졌다.

괴물은 다 죽어 가는 여자를 안고 엄청난 속도로 내달렸다.

“허억, 컥!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순 없어……!”

그렇게 베아트릭스는 한참을 달려, 빙벽의 가장자리.

소시엘 산맥 귀퉁이의 크레바스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를 살려 줄 수 있는 이가 있었다.

이미 죽은 자마저 다시 일으킨 사람이다.

그녀 정도의 치명상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아스틱스가 원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간악한 이젤리아를 물리칠 힘을, 더 큰 힘을 받을 생각이었다.

베아트릭스는 피를 토하며 외쳤다.

“성녀님!”

그 부름에 답해 얼음 동굴 깊은 곳의 어둠에서, 한 여인의 인영이 나타났다.

“꼴사납구나, 베아트릭스. 벌써 이 꼴이 되어 쫓겨 오다니. 역시 그분의 말씀대로야.”

“닥쳐! 그분은, 그분은 어디 계신 거지?! 어서 뵙게 해 줘!”

검은 옷의 여자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검은 낫을 휘둘렀다.

길에 놓인 쓰레기를 치우려는 듯한 태도였다.

“어?”

그 순간.

쩡!

거무튀튀한 낫이 베아트릭스의 목 앞에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기척을 감추고 있던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찬연한 금빛과 함께.

그를 보고, 검은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제국 황제가 어떻게 여기에!”

카스톨트는 빙긋이 웃었다.

“그야 나는 우리 딸이 시킨 일은 척척 잘하는 착한 아빠니까!”

이해 못 할 말을 지껄이면서, 카스톨트는 눈부신 마력을 내뿜어 사교도의 잔당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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