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6)
***
카스톨트는 가족들이 빙해성으로 진입한 이후, 성이 잘 보이는 곳에서 감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도망치는 잔당들을 뒤쫓아 그들의 아지트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왕성 안에 있는 놈들이 전부일 리 없으니까, 꼭 본거지를 알아내야 해요!”
실제로 제국 내 사교도들을 처리했을 때도 처음 드러난 자들만을 쳤다면, 박멸하지 못했으리라.
본거지까지 들어가 추적 향을 피운 덕분에, 최대한 많은 수의 사교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카스톨트도 아나트리샤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베아트릭스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혹시 마지막으로 남은 힘으로 도망치면, 한 번은 놔줘요.”
“그래서 도망가는 걸 뒤쫓아 아지트를 알아내자는 거지?”
“당연하죠! 역시 우리 아빠!”
“전부 우리 딸이 똑똑해서 그런 거지!”
덕분에 카스톨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괴물에게 안겨 도망치는 베아트릭스를 쫓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저 기괴한 검은 낫을 쓰는 여자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쩡!
다시 한 번 태양의 마력과 부정의 마력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검은 여자의 마력은 카스톨트에게 명백하게 밀렸다.
그녀는 낮게 혀를 차며, 입속에 물고 있던 검은 수정을 세게 깨물어 부쉈다.
빠직!
다시 한 번 동굴 안에 검은 결계가 펼쳐지며, 태양의 마력이 사그라드는 듯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카스톨트의 오른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스릉-.
동시에 반지는 치명적이고 화려한 십여 개의 원으로 갈라졌고.
금색 칼날 고리들은 낮은 공명음을 울리며, 검은 여자에게로 날아들었다.
“헉!”
검은 수정을 발동시킨 것만으로 조금 안심하고 있던 여자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낫으로 겨우 서너 개의 고리를 튕겨 낸 것이 전부.
나머지의 공격은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했다.
서걱!
“아아악!!!”
얼음 동굴 안으로 피가 튀었다.
***
크눔펜은 얼음 옥좌에 앉아, 냉엄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 보았다.
왕성 안에 남아 있던 비체가의 잔당들이 모조리 끌려와 있었고.
아닌 척했지만, 이미 비체가에 넘어가 있던 수장들 역시 그들 뒤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장서서 이젤리아에 대한 모함을 하던 수장 하나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페하! 저는 그저 비체가에게 속은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왕가에 반역할 수 있겠습니까!”
크눔펜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누가 봐도 수장들의 말을 믿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당황한 사이.
국왕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얼음 옥좌 주변에는 크눔펜 국왕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몇몇 이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로, 이젤리아, 루퍼스리안, 그리고 아나트리샤.
국왕은 여기 선 이들 중 유일하게 얼음의 마력이 없는, 그리고 제일 어린 소녀에게 물었다.
“안 추우냐?”
“응? 괜찮…….”
태양의 마력 덕분에 멀쩡하다고 대답하려던 아나트리샤는, 그 말에 할아버지의 눈썹 끝이 약 3도 정도 처지는 걸 보고 말았다. 실망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재빠르게 태세를 바꿨다.
“추워요오! 손이랑 발이랑 얼어 버릴 거 같아요!”
“쯧쯧. 콩알만 한 것을 이런 먼 데까지 데려왔으니 당연하지. 이리 온.”
“넹!”
아나트리샤는 냉큼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았다.
셀리나가 모피 옷으로 동글동글하게 감싸놓은 덕분에, 하얀 털 덩어리가 국왕의 무릎을 차지한 걸로 보일 지경이었다.
루퍼스리안은 그걸 약간 불퉁한 표정으로 보았다.
외할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을 동생에게 빼앗겨서 삐진……게 아니라.
동생을 오늘 처음 본 할아버지에게 빼앗겨서였다.
‘내 동생인데!’
그때, 손자의 그런 심리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루퍼스리안에게 닿았다.
“네 이름이 루퍼스리안이었지?”
“네. 할아버님.”
루퍼스리안은 짐짓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자신은 이제 열일곱이다.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니, 마땅히…….
쭈욱.
“……?”
“에잉. 쯧쯧쯧.”
“…아흐어지?”(할아버지?)
크눔펜은 옆에 선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애 뺨에 살이 없지 않느냐! 이맘때면 볼살이 아주 통통하게 올라야 하는데!”
“어으 어이고사이에여.”
(저는 열일곱 살인데요.)
-라는, 루퍼스리안의 항변은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큰 애는 이렇게 삐쩍 곯았고, 작은 애는 콩알만 해서는! 대체 내 손자 손녀를 어떻게 키운 거냐!”
크눔펜 국왕의 비난은 사실 딸을 향한 게 아니었다.
타이밍 좋게 막 홀 안으로 들어서는 중인 ‘누군가’를 향해서였다.
사교도와 빈사 상태의 베아트릭스, 그리고 괴물화한 에즈몬드의 시신까지 모두 함께 들고 온 카스톨트에게.
홀 안에 모인 하스티아의 귀족들 사이에 경악과 감탄이 흘렀다.
“설마 정말로 제국 황제가 여기까지 온 건가? 그것도 황궁을 비우고?”
“하지만 우리 왕녀님이랑 이혼한 거 아니었어?”
“재결합한 지가 벌써 5년이라네.”
“그래도 설마 황제가 직접 올 줄이야…….”
“듣던 대로 엄청난 미남이군.”
대륙 최강대국 루스템 제국의 현 황제.
근 5대 사이에 가장 강력한 마력의 보유자. (아나트리샤 제외)
지상에 강림한 태양신의 현신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
하지만 그 대단한 카스톨트 황제도, 이곳, 크눔펜 국왕의 앞에서는 그저 고양이 앞의 쥐일 뿐.
카스톨트의 어깨가 드물게 움찔거렸다.
국왕은 도끼눈을 뜨고 불호령을 내렸다.
“아아니! 애들 애비는 뭘 어떻게 한 거냐! 애들을 제대로 돌봤으면 이 꼴일 리가 없지 않으냐!”
아나트리샤는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빠가 저렇게 작아진 모습은…… 처음 봐! 전생에도, 지금도!’
만일 여기가 공개된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전생의 한국에서였다면.
어쩐지 할아버지 앞에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쭈그러져 있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리고 이 가족 상봉의 자리에서 소외된 이들은 입을 다문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비체가에 협력한 죄로 끌려온 이들도.
이젤리아를 도와 그들을 제압한 자들조차도.
이 순간만은 한마음이었다.
‘저기, 저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걸…… 설마 잊어버리신 건?’
하지만 차마 입을 열어 의문을 제기할 용기가 있는 자는 없었다.
***
할아버지가 정신을 차리신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조금 늦게 수장들의 존재를 깨달은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셨다.
“흠. 크흠. 맥밀런의 수장, 유레아.”
“예, 폐하!”
“너에게 전권을 주겠다. 비체의 반란에 연루된 자들을 철저히 심문하도록.”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선이 흰 천에 덮인 외삼촌의 시신에 닿았다.
베아트릭스는 반 시체 상태였기에, 부상을 치료하고 심문을 하기 위해 끌려간 뒤였다.
엄마의 명령을 받은 궁인들이 깔끔한 관을 가져왔고.
할아버지는 옥좌에서 걸어 내려와 직접 마력으로 외삼촌의 시신을 관으로 옮겼다.
시신을 괴물화하여 움직이게 만들었던 이마의 붉은 수정은 박살 난 상태.
다행히 그 외에 시신이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관을 덮은 다음.
단단한 얼음 결정으로 봉인하여, 직접 옮기셨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빙해성의 지하 왕실 영묘로 향했다.
지하 영묘의, 원래 외삼촌이 누워 있던 장소에 다시 관이 놓였다.
우리는 말없이 숙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주름진 손으로 외삼촌의 관을 쓰다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런 꼴을 보는구나…….”
할아버지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글퍼 보였다.
***
영묘에서 올라온 뒤.
각 일족의 수장들은 자연스럽게 뒤처리를 위해 흩어졌고.
할아버지와 우리 가족만이 남았다.
당장에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연히 할아버지와 아빠 사이에 말이다.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말없이 아빠를 노려보던, 할아버지는.
곧 냉철한 국왕의 표정으로 돌아와, 나직이 말문을 열었다.
“하스티아의 국왕으로서, 에즈몬드의 아비로서, 감사를 표하오. 제국을 떠나 와 하스티아를 위해 움직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그리고 에즈몬드를 무사히 데려와 준 것 또한 감사하오.”
“아닙니다.”
내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아빠는 겨우 안도의 미소를 내비칠 수 있었다.
나와 오빠도 비슷했다.
‘다행이다. 그래도 걱정한 것보다는 험악하지 않아서…….’
그리고 우리 셋의 안도는 다음 순간에 박살 나 버렸다.
“하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하게 얼굴을 내밀어!!!”
응접실의 단단한 유리창이 깨질 듯 분노로 가득한 노호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