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7)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마주 화를 냈다.
“아빠!”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당장에 저놈을……!!!”
‘당장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려서 내쫓아 버리겠다!’라는 생략된 말이 들리는 듯한 건, 착각일까?
아빠는 입이 있지만 말이 없었다.
지금 본인이 나서면 상황이 악화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태도였다.
“사생아가 있었다는 둥 그따위 소문이 돌았던 놈이 감히 하스티아 땅을 밟아?! 하스티아였으면 가문에서 내쫓길 일인 것을!”
“다 오해였다는 얘기 이미 했잖아요! 그이가 그런 게 아니라, 음모에 빠진 거라고요!”
“그런 일에 휘말린 것 자체가 잘못이지! 어딜 조신하지 못하게 굴어서, 내 딸 눈에서……!”
에릴 관련된 일이 벨론드 대공과 사교도가 꾸민 함정이었다는 건 이미 대륙 전체에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제국에 남아 있는 상황을 할아버지가 받아들이셨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이, 할아버지의 아빠 구박을 없애주진 못했다.
“내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디서 얼굴만 미끈하고 허우대만 멀쩡한 도둑놈 따위를 데려와서는!”
처음 할아버지를 봤을 땐 눈과 얼음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답게, 감정 표현이 아주 적은 분…….
-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입에서 불을 뿜기 전까지는.
‘와아. 할아버지 사실은 불의 마력도 가지고 계신 거 아닐까.’
음, 할아버지도 이 와중에 그래도 우리 아빠 잘생긴 건 인정을 하시는 모양이다.
다행이야. 나이가 드셨어도 시력과 판단력엔 문제가 없으시다는 거니까.
할아버지가 화를 많이 내실수록, 엄마의 분노도 점점 커졌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는 아니라고 부정하실 거 같긴 한데.
‘와, 엄마 성격은 할아버지랑 똑같았구나.’
두 번째 생에서야 알게 된 가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었다.
내가 이 사소한 깨달음에 기뻐하는 사이.
할아버지의 분노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당장에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지!”
“저도 분에 넘치다고 생각하고 있습…….”
할아버지의 구박에 아빠가 처음으로 대답을 한 찰나였다.
할아버지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네 분에 넘치는 내 딸과 손주들인 걸 알긴 아는구나!”
“그야 당연히 알…….”
“알면 놔두고 빨리 꺼지지 않고 뭐 하느냐!”
하지만 내내 할아버지 앞에서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쭈그러져 있던 아빠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빠는 빙해성에 온 후의 모습 중에 가장 힘 있고 당당한 태도로 대답했다.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그 말씀만은 절대 따를 수 없습니다.”
“뭐라고?”
아빠의 눈빛은 절대 꺾이지 않을 듯 올곧았고.
태도와 몸짓은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했다.
“모든 게 제 잘못이 맞습니다. 그러니 어떤 비난을 하시든 처벌을 주시든, 달게 감내하겠습니다만.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지라는 말씀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그 말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옆에서 엄마가 아빠의 손을 잡고, 강하게 말을 더했다.
“내 마음도 같아요. 리샤가 태어나고 7년간 떨어져 지낸 것만으로도 그렇게 힘들었어요. 나에 대한 이 사람의 마음과 충실함이 그대로인데, 떨어져 지낼 생각은 없어요.”
엄마의 목소리는 칼처럼 단호했다.
그 마음을 우리 넷 중에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다 똑같은 마음이니까.
게다가 전생의 기억까지 되찾았기에, 우리 가족이 얼마나 어렵게 서로를 되찾았는지를 생각하면.
엄마와 아빠의 말은 절대 깨질 수 없는 맹세와 같았다.
내내 할아버지를 어색해하고 있던 오빠가 조용히 덧붙였다.
“저 역시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할아버님이라고 하셔도, 우리 가족을 헤어지게 하실 수는 없어요.”
할아버지는 엄마와 오빠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아가. 너도 똑같이 생각하느냐?”
“…….”
당연하죠! 라고 말할 생각이긴 한데.
왠지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 vs 우리 가족의 구도가 되는 게 좀 그렇다.
‘사실 할아버지도 우리 가족이잖아!’
그렇다.
나는 전생에 가져 본 적 없는 외할아버지를 이번에 처음 가져봐서.
꽤 기쁘고 들떠 있었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나?
그냥 둘 다 가지면 안 돼?
어차피 둘 다 내 거(?)인데?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았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조금 상기된다.
반면에 엄마, 아빠, 오빠의 표정엔 미약한 불안감이 어렸다.
특히 오빠는, ‘헉! 리샤 대답 보고 따라할걸!’ 이러면서 후회하는 티가 팍팍 났다.
나는 최대한 귀엽게 들리도록 노력하면서 말했다.
어린 척, 귀여운 척하는 건 여전히 좀 쪽팔리지만.
할아버지 앞이니까, 뭐!
그리고 부모님이랑 오빠에게도 이런 게 잘 통하는 걸 보면, 할아버지에게도 잘 통할 테니까!
“당연하죠!”
“……엥?”
나는 할아버지 눈에 최대한 귀여워 보일 각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 각도면 아직 젖살이 남은 내 볼따구가 유난히 통통해 보이고.
또 올려다볼 때, 눈이 더욱 커다래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갸웃!
“아빠도 할아버지도 우리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떨어지면 안 돼요! …아니에요?”
마지막 말과 함께, 철저하게 계산해서 넣은 ‘갸웃!’의 효과는 확실했다.
“커흑!”
“어흑!”
“아학!”
“끄윽!”
뭐지?
왜 신음이 네 개야?
내가 얼떨떨해하는데, 메인 목표였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엄마, 아빠, 오빠까지 가슴을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예상보다 효과가 너무 좋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더 밀어붙여야 했다.
더는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구박당하고 있는 걸, 딸로서 보고 넘길 수 없으니까!
나는 아빠가 아침에 묶어 주신 똥머리를 동글동글 매만지면서 말했다.
“보세요, 할아버지. 리샤 머리 아빠랑 똑같죠? 아빠 닮아서 그런 거예요!”
내가 아빠를 얼마나 닮았는데요!
그러니까 아빠한테 화내지 마세요!
-라는 내 주장은……. 할아버지의 억지에 가로막혔다.
“안 닮았어! 하나도 안 닮았어!”
“무슨 소리예요?! 얘 머리 색은 누가 봐도 지 아빠랑 똑같은데!”
엄마가 아빠 편을 들자 할아버지는 더욱 화를 냈다.
“아니라니까! 그건… 너희 엄마, 그러니까 제 외할머니를 닮은 거다! 그래! 죽은 너희들 외할머니가 금발이었단다!”
할아버지는 손을 뻗어, 오빠의 목까지 끌어당겨, 우리 남매를 한꺼번에 안았다.
마치, ‘둘 다 내 거야!’라고 외치는 욕심쟁이 같았다.
“보거라! 여기 큰 애도 너만 닮았지 않으냐!”
“루퍼스는 눈이 이 사람이랑 똑같잖아요! 아빠 진짜 노안이라도 오신 거 아니에요?”
“아니다! 큰애 눈은 나를 닮은 거다! 내 눈이 파랗지 않으냐!”
할아버지는 꿋꿋했다.
***
나는 엄마랑 많이 닮은 외할머니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할머니는 백금발이셨네요.”
그렇다. 할머니의 금발은 할아버지의 말과는 달리, 나와는 좀 달랐다.
나는 붉은 색이 감도는 진한 금발인데.
할머니는 창백한 빛이 도는 옅은 백금발이다.
“그리고, 사실 할아버지 눈동자도 남색에 가까운 색깔이신걸.”
오빠의 눈 색은 짙은 사파이어빛이다.
밤하늘을 닮은 할아버지의 남색 눈과는 좀 달랐다.
우리는 옆에서 아련한 눈빛을 하고 계신 할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도 우리가 아빠 닮은 거 아시잖아요.’
이런 눈빛.
할아버지도 당연히 알아들으셨는지.
민망한 듯한 “큼, 크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우리는 할머니의 초상화가 있는 할아버지의 방에 와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두 분만의 시간을 보내고 계셨는데.
아마도 축 처진 아빠를 엄마가 위로해 주고 계실 것이다.
아빠가 시들시들해진 원흉인 할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불쑥 물었다.
“할아버지, 아까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응? 뭘 말이냐?”
“아빠한테 말이에요.”
“그야 그놈이 싫으니까 그런 게지.”
“하지만 할아버지 아빠 안 싫어하시잖아요!”
내 말에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저 아련한 눈빛으로 다시 할머니 초상화를 올려다볼 뿐.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궁예> 스킬로 할아버지의 속내가 보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그래. 그게 이놈의 탓은 아니지. 그리고, 그래도 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할 줄은 아는구나.’]
가족들을 대상으로는 <궁예> 스킬은 잘 안 쓰려고 했는데.
하스티아의 귀족들 속마음을 확인하려다가 실수로(?) 봐 버렸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하시는 건…….
[할아버지 : ‘아니야. 그래도 짜증 나는 놈이야! 당장 내쫓아서 빙해에 빠뜨려도 시원찮아!’]
아, 속마음과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르신 건 아닌가.
어쨌든 진짜로 아빠를 증오하고 싫어하시는 건 아니었다.
‘좀 얄미워하시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이유까지, 나는 보고 말았다.
[할아버지 : ‘그래. 저리 서로 아끼는데 떨어지면 안 되지. 그래. 그렇지만…… 결국 또 나만 외롭게 남겠구나.’]
할아버지는 엄마와 우리가 떠나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아빠에게 화를 내셨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