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8)
그제야 할아버지의 얼굴에 패인 주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원래 할아버지의 나이에 비해서는 10년은 젊어 보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 70이 넘은 분이다.
그런데 할머니도 곁에 없고, 외삼촌은 이미 돌아가셨다.
겨우 돌아왔다고 생각했던 하나뿐인 딸, 즉, 엄마는 5년 전 다시 제국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사촌인 시벨이 있다지만, 베아트릭스와 비체가의 손에 자라고 있었을 테니.
아마도 할아버지와는 교류가 적었을 게 분명했다.
우리는 아예 얼굴도 못 봤고.
‘많이 외롭고 쓸쓸하셨겠다.’
전생의 할아버지가 어땠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할아버지는 아주 외롭고 쓸쓸한 노인이었다.
겨우 되찾은 가족을 빼앗기기 싫은.
그래서, 아빠에게 더더욱 심술궂을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는 조금 드러냈던 솔직한 감정을 다시 안으로 숨겼다.
그리고, 다시 그냥 심술궂은 장인어른이 되어 버렸다.
“내가 너희 아빠를 좋아할 이유가 없지! 그런 날강도 같은 놈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할아버지는 다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가족들이 떨어지는 건 안 될 말이지. 그래…….”
할아버지의 중얼거림은 더없이 작았고, 나를 쓰다듬는 손길에도 힘이 없었다.
조금 전 기운차게 엄마와 말다툼을 벌이던 괴팍한 노인은 어디로 가 버린 것처럼.
지금의 할아버지는 아주 작고, 마르고, 힘이 없어 보였다.
“나도 안단다. 그냥 늙은이의 미련이고 또 심술이라고 생각하거라.”
할아버지의 앞에서, 나와 오빠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빠르게 시선만으로 의견 교환을 마쳤다.
오빠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리샤 말이 맞죠. 할아버지도 우리 가족이신데요.”
“으응?”
우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할아버지의 눈에 빛이 들어왔다.
“그으래? 그래! 너희도 하스티아가 좋은 게지? 제국 같은 곳보다 여기서 평생 살고 싶지 않으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승천할 기세였다.
“그래. 그래. 너희가 그리 좋다 하니, 너희 애비가 가끔 들르면 되겠구나! 내가 그건 허락을 해 주마!”
할아버지는 은근슬쩍, 우리와 엄마의 하스티아 이주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황제가 되어서는, 제국을 아예 비워 놓으면 안 되니까. 1년에 서너 달 정도만 하스티아에 오면 딱 아니냐, 응?”
하스티아와 황도 르펜시아 사이의 거리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게 분명했다.
[할아버지 : ‘그래! 왕복에만 세 달이 걸릴 테니, 그놈은 얼굴만 보고 가라지!’]
할아버지가 아빠 안 싫어하시는 거……, 맞겠지?
여하튼.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보면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하는 걸로 보일 거다.
하지만 이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우리도 하스티아 자주 오고, 할아버지도 제국에 자주 오시면 되잖아요!”
내가 손을 파닥파닥하자, 할아버지는 조금 슬픈 얼굴을 했다.
“……할애비도 사실 너랑 네 오빠가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직접 가서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요?”
“하지만 나라를 떠날 수가 없었지. 이건 하스티아 역대 국왕들의 숙명이란다.”
엄마에게 듣긴 했다.
빙해의 범람을 막고 있는 빙벽을 유지하는 것이, 하스티아 국왕의 가장 큰 의무라고.
때문에 하스티아의 국왕은 수도를 떠날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땐 외삼촌이 계시지 않았어요?”
“사실, 에즈몬드 그 아이의 마력은 홀로 빙벽을 유지할 정도는 되지 못했단다. 때문에 내가 자리를 지키거나, 조카였던 하펜의 도움이 필요했지.”
“아.”
이제 알겠다.
엄마의 사촌이라는 하펜이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
후계자였던 에즈몬드 삼촌의 자리를 자신이 충분히 넘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네 엄마의 결혼에는 끝까지 반대할 수밖에 없었단다.”
그리고, 에즈몬드 삼촌의 죽음과 하펜의 반란 소식을 들었을 때.
엄마는 하스티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다.
자신이 사랑 때문에 나라를 떠나 벌어진 일이라고, 엄마는 그렇게 자책하셨을 거다.
그걸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엄마가 5년이나 하스티아를 떠나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이었는지 알겠다.
그만큼이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인 거다.
할아버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시벨 그 아이가 마력을 각성하길 기대했지만, 이젠 가능성이 없으니…….”
할아버지의 짙은 남빛 눈동자가 오빠를 향했다.
동시에 할아버지는 손을 뻗어, 오빠의 손을 쥐었다.
오빠는 어색한 반응을 버리고, 침착하게 할아버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걱정 말거라. 하지만, 그 뒤에는 네가 네 어미에게 의지가 되어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는 마치, 이제 더는 보기 힘들 사람에게 미리 당부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제 스킬 제한 시간이 끝났음에도, 나는 지금 할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를 보내 주고 계속 혼자서 나라를 지킬 생각이신 거야.’
사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아빠에게 더 화를 낸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요! 그건 너무 슬퍼!”
그러자 할아버지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아가. 하스티아에 얼음의 마력을 가진 왕족은 꼭 필요하단다. 내가 죽으면 네 엄마가 왕위를 이어야 하고, 그 뒤를 네 오빠가 이어야 해.”
나를 달래려는 듯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도 네 엄마도 오빠도 마력은 충분하니,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자리를 지키면…….”
나는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할아버지 못 보잖아요!”
“으응?”
할아버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엄마도 말은 저렇게 하셨어도 할아버지 엄청 보고 싶어 하고 걱정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우리도 할아버지 겨우 만났는데, 앞으로 못 보는 건 싫어요! 그건 너무 슬퍼!”
비로소 할아버지는 내가 말한 ‘너무 슬픈 일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했다.
우리 가족과 할아버지가 앞으로도 만나지 못하는 게 싫고 슬프다는 것을.
주름진 손이 내 이마를 가만히 쓸어내린다.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그 마음으로 충분하단다.”
그러자 옆에서 오빠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리샤는 마음만 주는 아이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응?”
“말로 하면 그 전에 먼저 행동을 하고 있는 아이죠.”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오늘 아침에 황궁에서 출발했다고요!”
할아버지의 얼굴에 ‘???’ 표시가 떠올랐다.
반면 나와 오빠는 얼굴을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원래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보면 둘 다 놓치기 마련이라지만.
나는 토끼 두 마리가 있으면 세 마리를 잡아 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가지게 된 할아버지가 혼자 외롭게 여기 계시게 둘 생각은 없었고.
당연히, 그렇다고 우리 가족이 헤어지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둘 다 잡아야지!’
***
할아버지와 우리의 대화가 끝나고 난 뒤.
이번에는 엄마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를 만나러 자리를 옮기셨다.
워프 포탈에 대한 내용도 엄마가 직접 설명하기로 했다.
할아버지 좋아하시겠지?
그리고 그사이, 나랑 오빠는 이 성에서 할아버지 말고 단 한 명.
우리와 피가 이어진 친척을 만났다.
“아, 안녕하세요. 시벨 하스티아라고 합니다.”
아주 옅은 백금발에 남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인다.
아이는 아주 긴장한 것 같았다.
나랑 같은 나이랬는데, 나보다 조금 키가 작았다.
“안녕, 시벨!”
사촌이라니.
하스티아에 와서는 처음 경험해 보는 가족 관계가 많았다.
전생에는 할아버지도 없었고, 사촌도 없었으니까.
‘아, 사실 세실리아가 있으니 사촌이 아예 처음은 아닌가……. 하지만 세실리아는 사촌 느낌이 전혀 없어서.’
그보다는…… 적의 부하였다가 이쪽에 항복한 부하 느낌?
할아버지나 엄마를 생각하면, 이 애랑은 잘 지내 보고 싶었다.
내 인사에 쪼그만 녀석이 찐빵처럼 하얀 볼을 살짝 붉혔다.
“어차피 우리 나이 같잖아. 사촌이기도 하고. 말 놓자! 시벨!”
“그, 그러면…… 나도 리샤, 라고 불러도 돼?”
“당연하지!”
우리의 대화를 팔짱 낀 채 듣고 있던 오빠는, 대놓고 미간을 콱 찌푸렸다.
그러자 안 그래도 충격받을 일이 많아 보였던 꼬맹이가 파들파들 떨었다.
나는 오빠에게 달려가서 옆구리를 찔렀다.
‘아, 애가 놀라잖아! 좀 더 친절하게 대해 줘! 사촌이잖아, 사촌!’
‘아오!’
우리의 소리 없는 대화가 빠르게 오고 간 뒤.
오빠는 시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웃는 얼굴로.
“나는 루퍼스리안이라고 한단다. 반가워.”
“네. 네. 루퍼스리안 님!”
시벨의 고사리 손을 마주 잡고서, 오빠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해서 말했다.
“리샤의 하.나.뿐.인. 오빠지.”
왜 열두 살짜리를 상대로 ‘내가 이겼다!’ 같은 표정을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