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9)
오빠 놈의 어이없게 유치한 말에, 놀랍게도 시벨은 진심으로 시무룩해 보였다.
작게 웅얼거리기까지 했다.
“내가 몇 달 먼저 태어났으니까 나도 오빤데…….”
꼬맹이다운 투덜거림이었지만.
오빠가 눈을 부라리고 있기도 했기도 하고.
‘몇 달 차이라도 오빠는 오빠지!’라고 태클을 걸려는 내 안의 유교걸을 잠시 잠재웠다.
“에이! 몇 달 차이 정도는 그냥 동갑인 거지, 뭐!”
내가 손을 잡고 붕붕 흔들자.
약간 시무룩해졌던 시벨도 곧 얼굴이 발그레해지며, 기운을 되찾았고.
어쨌든 유일한 오빠 자리를 지켜 낸 오빠 놈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야지!
엄마랑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어른들이 어른들만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벨은 우리에게 하스티아의 왕성을 소개해 주기로 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리를 수행하려던 궁인들을 물리고, 셋만 있을 수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사라지자, 시벨도 조금 덜 주눅 들어 보였다.
“여기는 역대 하스티아 국왕들의 초상화를 진열해 둔 홀이야. 여기, 이게 할아버님의 초상화고. 이 자리가 나중에 고모님의 초상화가 걸릴 자리랬어.”
시벨은 엄마의 초상화가 걸릴 예정이라는 자리와, 그 옆의 자리를 복잡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싶었다.
아무리 열두 살이 어린 나이라지만.
적어도 마력이 없는 자신이 이곳에 초상화를 걸 일 같은 건 없으리란 사실은 알 거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 보면 베아트릭스와 비체가가 그 문제로 더 어릴 적부터 애를 들들 볶은 모양이고.
애가 유달리 기가 약해 보이는 건 아마 그 탓인 듯싶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촌과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을지, 나도 오빠도 잘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건 진짜 열두 살짜리 꼬맹이에 불과한 시벨도 모르는 모양이다.
섬세하게 조각한 천사상 같은 얼굴의 사촌은 왠지 우물쭈물하는 기색이었다.
옅은 백금빛으로 빛나는 긴 속눈썹이 눈 아래에 거미줄 같은 그림자를 우울하게 그려냈다.
나는 일부러 활달하게 물었다.
“왜 그래? 우리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시벨은 몇 번을 망설이다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나중에 고모님께 여쭤보려고 했는데, 지금 대신 여쭤봐도 돼요?”
이건 오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오빠가 고개를 돌리자, 시벨은 잔뜩 긴장한 듯 어깨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다 포기한 듯한 초연한 태도가 엿보였다.
어느 쪽이든 열두 살짜리 꼬마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고모님이나 루퍼스리안 님은 이제 저를 바로 죽이실 예정인 건가요?”
“뭐?”
오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아마 비슷한 표정일 거다. 이게 무슨 소리야? 겨우 열두 살짜리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시벨은 천천히 설명을 덧붙여 나갔다.
“사실 어머니도 외삼촌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고모님이 돌아오시면, 그리고 루퍼스리안 님이 오시면, 전 죽을 거라고요.”
“…….”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 전에 마력을 각성해야 한다고요. 결국 불가능했지만.”
베아트릭스와 비체가의 놈에게 절로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열두 살짜리 꼬맹이에게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그런데 시벨의 입에서 연달아 나오는 말은 더더욱 충격적인 것들 퍼레이드였다.
“저는 마력이 없으니 쓸모없다고도 하셨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마력을 저에게 옮겨서 쓸모 있게 만들어 줄 거랬어요.”
“이 XXX들이!”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어 버렸다.
다행히 저 욕은 한국어라, 시벨은 그냥 고개를 갸웃거린 게 전부였다.
꼬맹이는 자기가 한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나와 오빠는 잘 알고 있었다.
‘저건 할아버지의 마력 코어를 시벨에게 이식할 계획이었다는 거잖아!’
제국 내 사교도들이 콩나물 대가리와 에릴로 이미 한번 벌였던 짓이다.
마력 코어를 적출당한 사람이 살아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를 이식 당한 에릴 역시 수명이 엄청나게 줄어든 상태였다.
실제로 그 일 이후 지방으로 쫓겨났던 에릴은 몇 달을 더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다.
이는 사교도의 잔당을 처리하면서, 그들이 쌓아 둔 연구 자료를 입수해서 알게 된 정보였다.
내가 바득바득 이를 갈자 시벨이 할아버지를 닮은 커다란 남빛 눈을 꼭 감더니.
겨우 한마디를 토해 냈다.
“저는 괜찮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어머니와 외삼촌이 한 짓을 알면서도 못 막았고……. 그러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이는 작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말의 내용은 어린애 같지 않았지만, 저 두려움만은 영락없는 꼬맹이 그 자체다.
이 간극이 유달리 내 눈에 거슬렸다.
시벨 모르게 나와 오빠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둘은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무언의 의견 교환이 잠시 오간 뒤.
나는 발칵 화를 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어? 왜 네가 그런 말을 해?!”
“그치만…… 전부 나 때문이라고…… 다들…….”
이번에는 오빠도 같이 화를 냈다.
“누가 그딴 소리를 했다는 거지?! 당장 말해!”
아니, 그렇게 윽박지르듯이 하지 말라고.
화가 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러면 얘가 자기한테 화낸다고 착각할지도 몰라.
아니나 다를까 시벨은 놀라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히끅!”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자기가 더 놀라서 입을 막았다.
안 봐도 뻔했다. 그간 얼마나 애를 다그쳐댔으면.
나는 오빠 앞을 막아서면서 말했다.
“오빠는 너한테 화내는 거 아냐.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지.”
그러나 꼬맹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가… 마력도 없어서…… 쓸모도 없고. 그래서 어머니와 외삼촌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그러니까 내가 없어지는 게 좋다고 했어요.”
정확히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알 법했다.
베아트릭스와 비체 일족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다.
누구든 지금은 비체 일족과의 거리를 두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러니 더더욱 관련자들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 태도가 자신들이 비체 일족의 반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양.
그리고 그런 자들의 말이, 이 어린애의 귀에까지 들어간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두 손을 뻗어서 덜덜 떨리는 시벨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시선을 똑바로 맞춘 채, 또박또박 잘 들리도록 말했다.
“이번 일에 네 탓은 없어.”
“하지만…….”
“네가 어머니나 비체가의 수장에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말했어?”
“아니.”
“그러면 된 거야!”
“하지만 막지도 못했는데…….”
“너는 어린애잖아! 애초에 열두 살짜리 어린애에게 반란을 막지 못했으니 죄인이라는 게 말이 돼?”
내 말에, 시벨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기 시작했다.
내내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었다가, 그게 한 번에 터져 나온 모양이다.
나는 꼬맹이를 잡고 강하게 말했다.
“아까 오빠가 말한 거 들었지? 너한테 그런 말 한 사람 나랑 오빠 앞에 끌고 와.”
“흑, 끄흑. 그러면?”
나는 주먹을 들어 올려 보였다.
“다 패 버릴 테니까!”
그 말에, 시벨은 줄줄 울면서도 겨우 웃었다.
눈이 퉁퉁 붓긴 했지만, 워낙에 예쁜 아이라, 살짝 미소 지은 것만으로도 주변이 빛나는 느낌이다.
나는 마주 웃어 주며 말했다.
“거봐! 이렇게 웃으니까 예쁜 얼굴이 확 살잖아!”
놀랍게도 오빠가 옆에서 몇 마디를 더 거들었다.
“마력이 없다고 쓸모없다는 거 전부 헛소리야. 세상에 마력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전부 쓸모없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
정말이지 드물게 꽤나 친절한 내용과 말투였다.
‘아, 오빠. 자기 어릴 때가 생각나서 이러는구나.’
오빠는 두 종류의 마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보니, 각성이 늦어졌었다.
루스템에서 태양의 마력이 없는 황족이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오빠는 이미 겪어 봤으니까.
그러니 지금 시벨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 말에, 시벨은 조금 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오빠는 고개를 팩 돌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도둑놈 될지도 모르는 놈한테 왜 괜히 좋은 말을 해 준 건지…….”
“무슨 소리야? 도둑놈이라니! 시벨은 우리 사촌이잖아!”
오빠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길게 길게 한숨을 쉬었다.
“네 주변에 도둑놈 지망생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무슨 헛소리야?”
“……그래. 그냥 평생 모르고 살면 좋을 텐데…….”
오빠는 다시 한 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이상한 소리를…….
그러다가 뒤늦게 기억났다.
오빠가 도둑놈 어쩌고저쩌고한 사람 중에 ‘그’도 있었으니까.
‘미하일.’
미하일이 떠오르자, 하스티아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까, 시스템이 미하일이 하스티아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하스티아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던 베아트릭스와 비체 일족을 막아 낸 지금까지도.
미하일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
“아아.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끝나 버렸네요.”
소녀의 높은 목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들었다.
자그마한 검은 구두가 소복이 쌓인 눈을 파헤쳤다.
그러자 눈 아래 숨겨져 있던 엄청난 두께의 얼음이 드러난다.
기이할 정도로 투명한 빙해.
검은색의 성이 그 얼음 속에 파묻혀 있었다.
나스카의 부유성.
성을 둘러싼 얼음 사이에, 기묘한 붉은 문양이 섞여 있었고.
두근-, 두근-!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문양이 요동칠 때마다, 나스카의 성에서는 밤의 마력이 뽑혀 나오고 있었다.
붉은 문양이 나스카의 마력을 뽑아 공급하는 아래쪽에,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꿈틀거리려는 듯.
소녀, 소피아는 눈매를 반달처럼 접으며 웃었다.
“뭐, 상관없겠죠.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시 눈보라가 몰려들어, 모든 것을 하얗게 묻혀 숨겨져 버렸다.
소녀의 작은 몸과, 얼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비밀스러운 음모까지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