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5. 메인 퀘스트 : 이번엔 사로잡힌 왕자님? (03)
그때 엄마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자, 하펜을 닮았어요. 아버지.”
“그러고 보니……!”
은발은 하스티아 왕족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였다.
이자가 외삼촌을 죽이고 반역을 일으켰던 하펜의 숨겨진 아들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자, 시스템이 지직거리며 움직였다.
그의 시스템 정보창을 이루던 글씨가 바뀐 것이다.
[이름 : 시벨 하스티아 → 파헬 하스티아]
[지위 : 하스티아의 왕손 → 반역자의 아들]
부정의 마력 때문에 시스템으로 놈의 변장을 바로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내가 눈치챈다면 그 사실을 확인하는 건 가능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자가 정말 하펜의 아들이라니.
‘어쩌면 하펜의 반란 자체부터,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는데.’
하펜의 반란은, 어머니가 우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소피아의 개입을 가정하기엔 시기가 맞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 소피아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그리고 칼키나를 만나 나를 향한 메시지와 함정을 남기고 사라진 건, 약 8년 전.
하펜의 반란은 우리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이미 일어났다.
소피아가 직접 개입한 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벨론드 대공의 음모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일어났잖아?’
우리 가족을 갈라놓으려는 모든 음모가 소피아가 만들어 낸 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뒤늦게 나타난 소피아가 이용해서 악화시키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꽤 높았다.
일단 칼키나에게 그런 메시지를 남겨 두고 제국에서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대륙 어딘가에서 세상을 멸망시킬 음모를 꾸며 왔을 게 분명한데.’
제국과 유달리 멀고 폐쇄적인 데다, 나의 외가이기도 한 하스티아다.
소피아가 음모를 꾸밀 무대로는 꽤 괜찮은 조건이다.
게다가 파헬에겐 소피아가 직접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랑디오르 공작을 뛰어넘는 강력한 부정의 마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을 언급할 때의 말투와 감정.
‘소피아를 향한 사교도들의 경외와 애정은 무시무시하니까.’
하펜의 아들은, 지금 눈에 띄게 시간을 끌려 하고 있었다.
특히 시벨을 빌미로 할아버지를 자극하려 드는 게 그랬다.
마치.
“우리가 너에게 분노하게 만들어서 고문하든 화풀이를 하든,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려는 거 아냐?”
“……황녀님은 똑똑한 척은 하지만 별로 그렇진 않은 것 같군.”
짐짓 여유 있는 미소를 띠고는 있었지만.
살짝이지만 당황한 티가 났다.
‘좋아. 대충 알겠어.’
나는 그의 앞에서 빙글 뒤돌았다.
“어?”
가족들도 놀라서 물었다.
“왜 그러느냐, 아가?”
“어디 가려고, 리샤?”
나는 당당하게 웃으며, 그가 가장 원하지 않을 대답을 내놓았다.
“나가 보려구요.”
“어디로?”
아빠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시선을 놈에게 고정한 채였다.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빙해로요.”
“……!!”
“뭐라고?”, “그 위험한 곳을 어린 것이 왜?” 등등, 가족들의 걱정스런 말들 속에서.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나에게 정체를 들켰을 때보다, 더욱 경악한 파헬의 얼굴을.
나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물었다.
“소피아가 거기 있는 거 맞구나?”
“아, 아냐!!! 그분이 거기 계실 이유가 없지 않나! 절대 아니야!”
“강한 부정은 곧 긍정이라던데.”
“아니라면 아닌 거다!”
그는 거의 발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고마워. 사실 확신한 건 아닌데, 네 반응으로 확실해졌어.”
“뭐……?!”
파헬은 나를 거의 씹어먹고 싶다는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물론, 그걸 가족들이 그냥 보아 넘길 리 없다.
“감히 리샤를 그딴 눈으로 봐?!”
뻑!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파헬의 얼굴이 돌아갔다.
나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빙해를 향해.
***
내가 빙해로 향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스카의 부유성이 분명히 빙해 방향으로 사라졌다고 했으니까.’
왕성의 여러 사람들에게서 확인한 정보다.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아마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겠지.
시스템의 말까지 종합해 보면, 미하일이 지금 빙해에 있다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다.
‘소피아 역시 그 옆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둘이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건 전생에 소피아는 마왕을 불러들여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 사도였고.
미하일은 그 몸에 마왕을 강림시킨 매개체였으니까.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너무나 선명했다.
잊고 싶어도 불가능할 정도로.
***
소피아의 정체가 밝혀진 지 얼마 후.
그녀가 점거한 옛 헌터 협회 건물로, 나와 동료들이 진입했다.
우리에게 마치 집처럼 익숙하던 건물이 온갖 마물의 둥지가 된 광경은 꽤나 심란했다.
특히나, 그 둥지를 짓고 마왕 소환을 준비 중인 이가, 우리의 동료라 믿었던 사람이라 더.
토벌대에 참여한 십여 명의 헌터들은 당시 인류가 짜낼 수 있는 최고의 전력들이었다.
그 주축이 바로, 나와 오빠, 그리고…… 미하일이었다.
우리는 소피아가 다 완성하지 못한 소환진을 파괴했고.
소피아를 구석까지 몰고 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나는, 최악의 배신을 경험했다.
희생이 너무 컸다.
그때 소피아의 앞에 살아 있는 헌터는 단 셋뿐이었던 것이다.
나와 오빠, 미하일뿐.
나는 악에 받쳐서 외쳤다.
“이제 끝이다, 이 배신자!”
소피아는 피에 젖은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보이기엔 맞지 않는 미소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안서나 씨?”
“내가 널 못 죽일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개소리는 아니지?”
“그럴 리가요.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요.”
옆에서 오빠가 가쁜 숨을 내쉬며 나와 비슷하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끝내 버려, 서나야. 어차피 마법진도 파괴했고, 저 여자만 죽이면 끝이야.”
“내가 지금 죽는다고 해서, 정말로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소피아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마치, 하늘을, 아니, 자신이 간절히 부르고 싶은 멸망을 경배하는 것처럼.
“이미 이 세계의 수명은 다했어요. 소환진을 파괴해도, 나를 죽여도, 멸망은 막을 수 없어요. 그저 아주 조금 유예를 얻을 수 있을 뿐.”
“네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나를, 우리의 동료들을, 인류 전체를 배반한 여자다.
그 말은 단 한마디도 믿을 수 없었다.
그대로 소피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신은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며, 내가 휘두른 아스트라의 예리한 칼날이 소피아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살이 잘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피가 튀었다.
촤악!
“……누군가는 다르겠죠.”
소피아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불길하고 끔찍한 미소.
“서나야!!!”
오빠의 비명을 듣고,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허리께가 뜨거웠다.
내 칼날이 소피아의 목을 찌르기 바로 직전에, ‘누군가’가 휘두른 칼날이 내 등에 박힌 것이다.
소피아의 존재마저 잠시 잊은 채.
나는 망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내 등 뒤에, 그가 있었다.
미하일.
당연히 나를 찌를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까마득한 배신감이 나를 삼켰다.
분명히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누가 나를 배신하고 내 등에 칼을 꽂았다는 이유로, 멍하니 서 있다니.
말도 안 된다.
깨달은 즉시, 찔린 칼을 뽑아 들고 배신자를 죽이는 게 나에게 더 어울렸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그의 배반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왜, 울고 있는 거지?’
제 손으로 나를 찌른 주제에, 눈물을 흘리고 있던 미하일의 얼굴 때문이었다.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
그 눈빛은, 표정은 배신자의 것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 어깨에 닿았던 그 눈물의 감촉이 기억난다. 온도 역시.
기이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리고, 그리고…….
그 뒤는 바보 같은 내 실패의 연속일 뿐이었다.
소피아가 미하일을 매개체로 마왕 소환에 성공했고.
오빠는 갓 소환된 마왕으로부터 나를 구하다 죽었다.
그리고, 나는 갖은 고생 끝에 마왕을 죽였다.
그랬다. 내가 죽인 건, 마왕이었다.
미하일이 아니었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고.
목을 베었다.
그리고 나의 죽음 역시 멀지 않은 것을 깨달은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떠올린 생각은 이거였다.
‘저 얼굴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
끝도 없이 펼쳐진 얼음의 바다.
그 위에 유달리 도드라지는 흰 소녀가 서 있었다.
긴 검은 머리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소녀는 왈츠라도 추듯 몸을 돌렸다. 손목에 매달린 검은 리본이 빙글, 원을 그린다.
한 쌍의 주홍색 눈동자가, 마침내 두 번째 생을 넘어 자신의 앞에 선 적을 향해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안서나 씨. 아니, 지금은 아나트리샤라고 불러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