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7/218)

Level 25. 메인 퀘스트 : 이번엔 사로잡힌 왕자님? (04)

나는 차갑게 대꾸했다.

“어느 쪽으로 부르든 짜증 나니까 그냥 입 닫지 그래?”

“정말 여전하네요. 당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만.”

“입 닥치라고 했어.”

나와 소피아 사이로 바람이 거칠게 불어 닥쳤다.

눈보라가 마치 칼날처럼 들이쳤다.

하지만 추위도, 어떤 감각도 지금의 내겐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 귀로 듣기에도 기이할 정도로 침착하고 무덤덤한 말이 나왔다.

“그놈, 어디 있어?”

“누굴 말하는 걸까요? 저에게 맡겨 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억지로 입을 열었고.

“……미하일.”

그의 이름이 빙해의 차가운 눈보라 속으로 허무하게 흩어졌다.

“살아 있는 건 알고 있어.”

그를 죽이라는 퀘스트가 아직 완료되지 않고 남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해. 어디에 처박아 둔 거지?”

“왜 내가 알 거라고 생각하죠?”

“네가 여기 있으니까. 나스카의 부유성이 향했다고 알려진 곳인 이 빙해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한번 마왕 소환의 매개체가 된 인물이다.

마왕을 소환해 인류를 멸망시키는 게 목적인 소피아라면, 절대 그를 포기할 수 없을 터다.

소피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하긴. 그는 전생에 당신의 등을 찔렀었죠? 나를 도와서.”

“그러니까 어디 있냐고!”

“배신자를 왜 찾으시는 거죠? 이번에는 확실하게 죽이려고?”

“입 닥치라고 했어!”

소피아는 대답 대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워낙에 작고 가벼워, 발걸음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두려움이나 경계심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와,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니, 당신에게 몇 번은 더 기회가 있었을 거예요.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그런데…….”

나는 손을 뻗어, 소피아의 목을 쥐었다.

칼키나의 환영을 통해 한번 연결되었던 때처럼.

순식간에 감각이 멀어졌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선명하게 체온과 피부의 감촉이 손안에 달라붙었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서는 참지 못할 즐거움이 묻어났다.

“혹시 죽이기 싫었어요?”

“……!”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소피아의 목을 꺾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하지만.

스륵.

손안에서 소피아의 육체가 검은 연기로 녹아내렸다.

그러고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다시 재수 없는 모습이 나타났다.

“후후후. 무서워라. 진짜 죽이려고 했죠?”

“당연하지.”

뿌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스트라를 뽑아 든 다음, 활의 형태로 변환시켰다.

빛과 불꽃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활에 재어졌고.

핏!

바람을 가르며 네 발의 화살이 소피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스륵-.

다시 소피아의 몸이 검은 연기로 힘없이 녹아내렸고.

다시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이를 기다렸단 듯, 내가 이미 쏘아 보낸 화살 세 발이 바로 소피아를 쫓았다.

연달아 두 번의 화살이 더 소피아의 환영을 찢었고.

그리고 마지막 화살은.

탕!

드디어 환영이 아니라 본체가 화살을 직접 쳐내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군!’

나는 그대로 바람처럼 몸을 날렸다.

‘죽여 버리겠어!’

순식간에 아스트라가 검의 모습으로 손안에서 변환되었다.

내가 막, 소피아에게로 달려들려던 그때.

“아. 이제야 준비가 됐네. 진짜 오래 기다렸는데.”

소피아가 불길한 말을 하더니, 발을 굴렀다.

쿵!

빙해의 두꺼운 얼음 바닥이 지진 난 것처럼 울렸다.

얼음 위로 거미줄 같은 금이 갔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발아래가 불안정해지는 것 따윈 내게 위협적인 징조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콰아아아아---!!!!

연이어 벌어진 상황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1카르(m)도 넘게 얼어붙어 있는 얼음을 깨고 빙해 위로 솟아오른 것은, 기괴한 생명체였다.

“가오리?”

거대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가오리를 닮았다.

단, 그 크기가 1그라-카르(km)는 될 법하다는 것이 경악스러웠다.

그리고…… 저건 분명히 내 기억에 있는 마물의 모습이었다.

크기와 몇몇 다른 점은 있었지만.

소피아는 마물의 머리 위에, 나를 약 올리듯이 올라타 있었다.

거대한 가오리는 빙해를 부수고 하늘로 날아올라, 마치, 과시하듯 허공을 빙글 돌았다.

그때.

눈보라를 뚫고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리샤!!!”

“아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내가 파헬의 심문을 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해로 달려오자 당황해서 쫓아온 모양이다.

파헬의 뒤처리를 하고 오느라, 그리고 내가 워낙 빠르게 달려와서 조금 늦어진 것이다.

‘아, 엄청 걱정하셨겠네.’

미안했다.

하지만, 도저히 가족들에게 이 모든 걸 다 설명하고 올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가족들은 우르르 달려와 나를 둘러쌌다.

“대체 왜 이렇게 말도 없이 달려가나 했더니…….”

“설마, 저 여자가 정말 여기 있었을 줄이야.”

가족들은 내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내 돌발행동에 대해 당장은 지적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경악한 눈으로 빙해의 상공에 떠오른 가오리 모양의 괴수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진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설마 파도의 짐승이 정말로 존재하는 거였나?”

“잠깐, 파도의 짐승이요? 그거 전설 아니었어요?”

엄마가 마찬가지로 경악한 눈으로 가오리를 올려다본다.

“저게 뭔지 아세요?”

오빠의 질문에는 뒤에 ‘어떻게’가 생략되어 있었다.

사실 나와 오빠는 저 괴수를 알고 있었으니까.

엄마와 아빠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이전 생에서 두 분이 전사한 이후에 등장한 괴물이었으니까.

“레비아탄.”

내 말에 오빠를 제외한 가족들이 놀랐다.

“저 마물의 이름이에요.”

마왕 소환 직전에 등장한 대마물이다.

그게 이 세계에 똑같이 있다고?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나나 우리 가족처럼 이 세계에서 새로운 생을 얻은 이들은 많았으니까.

소피아 같은 사교도들도.

그렇다면 마물이 그렇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저것의 이름이 레비아탄이라는 게냐? 하스티아의 건국 전설에 빙해를 범람시켜 나라를 멸망시킬 뻔했던 파도의 짐승에 대한 이야기가 있단다.”

“다들 그걸 빙해의 범람을 은유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요.”

파도의 짐승.

레비아탄.

어떻게 불리든 본질은 내가 아는 그대로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마물 중 하나.

마왕의 권능에는 감히 비할 수 없지만, 그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존재들 중 하나다.

바다 속에서 일어나, 세상을 물로 뒤덮어 모든 생명을 죽이려 드는 마물.

하지만 지금의 레비아탄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새하얗고 거대한 몸체의 가운데.

유달리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마치 새카만 성과 같은.

‘나스카의 부유성!’

그 성을 중심으로 뻗어 나온 검은 마력이 마치 혈관처럼 레비아탄의 몸체 전체로 퍼져 있었다.

검은 마력의 흐름에는 미하일의 밤의 마력과, 부정의 마력이 뒤엉켜 있었다.

명백하게, 레비아탄을 움직이는 에너지를 나스카의 성이 공급하고 있는 듯한 모습.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레비아탄이 나스카의 마력을 빨아내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까마득하게 멀리 있음에도, 소피아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명확하게 들렸다.

“이 아이도 당신을 만나서 반가워하고 있어요.”

“애완동물을 제대로 길러야지. 너무 살이 쪘잖아.”

전생에는 지금 크기의 절반 정도였다.

아마도, 나스카의 마력을 흡수한 것이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하긴, 너무 귀여워하다 보니 좋은 ‘먹이’를 줬거든요. 좀 많이 먹었나 봐요.”

저 ‘먹이’가 뭘 말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신이 좀 놀아 주지 않을래요? 우리 레비, 다이어트 시킬 겸?”

소피아는 아주 재수 없게 싱긋, 웃었다.

그리고, 수백 개에 이르는 레비아탄의 눈 중 하나를 쓰다듬으며 명령했다.

“전부 부수고 물 아래 잠기게 해 버리렴.”

그때였다.

내 눈앞에 시뻘건 경고 메시지가 우르르 떠올랐다.

[경고! 경고! 경고……!]

[즉시 완료해야 할 퀘스트가 있습니다!]

[퀘스트 명 : ‘절대적인 맹세’]

[당신이 직접 한 맹세를 지키십시오.]

동시에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미하일이 준 스킬이 활성화됐다.

왼쪽 검지에 떠오른 붉은 리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 모든 게 말하는 건 분명했다.

‘지금 당장 미하일을 죽여라.’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외쳤다.

“시끄러우니까 닥쳐, 미하일!!!”

자신을 죽이라는 강요만 해대고 있는 이 소란스러운 스토커 자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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