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5. 메인 퀘스트 : 이번엔 사로잡힌 왕자님? (05)
사실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정보와 사실이 그걸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전생에 시스템은 모든 헌터들을 똑같이 보조하고 있었다.
AI와 유사한 존재로, 의지나 의사를 표현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명백하게 누군가의 의사가 창에 반영되고 있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다 퍼 주는 것도 그렇다.
환생 이후 시스템이 나에게 준 것 중에는, 그가 쓰던 스킬과 아이템이 포함되어 있기까지 했다.
게다가 시스템이 주던 퀘스트의 내용도 문제였다.
처음엔 단순히 시스템이 나를 육성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미래를 예지하여 나에게 조언하듯 주어지던 퀘스트들을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 또한 전생의 시스템에는 없던 것이니까.
저런 예지와 조언은 미하일이 가끔 보이던 예지 능력과 차라리 비슷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내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이 붉은 리본.
그 의미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언제든 말 한마디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을 내게 준 거다.
이건 시스템이 늘 나에게 강요해 오던 것과 같았다.
‘미하일을 죽여라.’
게다가 작지만 이상한 점도 하나 있었다.
내가 어디 있는지 미하일이 지나치게 잘 알았다는 점.
‘마력을 나눠 준 것만으로도 어디 있는지까지 알 수 있다니 말도 안 되지!’
게다가 그가 내 주변에 없던 동안에도 이상하게 나에게 벌어진 일을 잘 아는 듯한 뉘앙스를 비추기까지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생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내가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을 내리면, 발동했다.
마치, 시스템이 현재 내 일부라도 된 것처럼.
그런 게 시스템이라니. 말도 안 된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환생하기 전. 전생에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내가 마왕을 죽인 그 순간.
시스템은 갑자기 오류를 일으켰다.
그때 시스템이 내게 했던 질문.
[$#% 그래서 *7& 싫어& #@나야?]
‘그래서 두 번째 기회는 싫어, 서나야?’
그 질문이 누구의 것인지, 이제는 안다.
‘미하일.’
이미 그때부터였던 거다. 그때부터, 그는 시스템에 간섭하여 나를 돕고 있었던 거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으리라.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눈치를 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애써 부정하고 싶어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시스템을 조종한 거라면, 그는 그때도 지금도 내 조력자고 배신자가 아니었다면…… 전생의 나는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내가 어떻게 그를 죽였는지.
그런데.
그랬는데.
눈앞이 흐렸다.
새삼 눈물이 차올랐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나는 그 정도로 약하지도 않고.
또 지금은 감정에 빠져 집중을 잃을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
레비아탄이 빙해를 부수고 치솟자, 정면으로 들이치는 눈보라와 함께 레비아탄이 뿜어낸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콰아아아---!!!
레비아탄이 기괴한 울음을 내지르자.
쿠드득! 콰드득!
얼어붙은 바닥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물기둥 수십 개가 우리 주변으로 치솟았다.
그러자, 엄마가 나섰다.
크리스탈 결정으로 만들어진 아스트라를 꺼내어, 부서지는 얼음 바닥에 박았다.
그리고 전력으로 마력을 방출하자, 물기둥이 순식간에 얼어 버렸다.
얼음 기둥이 레비아탄 주변에 줄줄이 선 격이 된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음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더 가까이 접근하는 쪽이 방어에도 공격에도 훨씬 편하니까.
마력 방출로 날아다니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건 마력 소모가 너무 심했다.
지금처럼 거대하고 강한 마물을 상대할 때에는 마력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나는 소리를 높여 가족들에게 외쳤다.
내 아스트라를 들어, 레비아탄의 가슴 부분을 가리키면서.
“저기! 나스카의 성을 분리해 내야 해요! 저 마력을 빨아들여서 레비아탄이 커진 거예요!”
그리고 아마도 저 안에는 미하일이 잡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다른 나스카 일족도 함께 잡혀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러자 아빠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거대한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빠의 아스트라를 이루는 금빛 고리들이 손 앞에 일렬로 모였다.
그리고 아빠가 쏘아 낸 마력탄이 고리를 하나하나 통과할수록 크기며 마력의 밀도가 점점 더 강화된다.
마침내 고리를 완전히 벗어난 마력탄은 거의 빛의 기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빛 기둥은 레비아탄의 가슴에 박혀 있는 나스카의 성에 직격했다.
쾅!
“아!”
다행히(?) 나스카 성은 레비아탄의 두꺼운 피부 아래 박혀 있어서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내 반응에 오빠가 옆으로 휙 뛰어와서 물었다.
“왜 그래?”
“아, 그게…….”
“저 성이 부서질까 봐, 정확히는 그놈이 다칠까 봐 그래?”
오빠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새삼 말하기가 꺼려졌다.
오빠는 미하일의 몸을 매개체로 강림한 마왕에게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니까.
가족들 중 오빠가 미하일에게 가장 적대적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오빠는 자신의 죽음을 이유로 말하지 않았다.
“저놈은 널 배신했어. 기억하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오빠. 미하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내 입으로 내뱉고 나니, 더더욱 확신이 짙어졌다.
오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건 아니고?”
“오빠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나도 알아. 나도 몇 번이나 의심했었고.”
이 의심 때문에 환생 이후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경계를 거두지 않았던 거다.
수많은 증거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음에도.
내 눈앞에서 죽었던 오빠의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그리고, 미하일이 나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오빠의 죽음만은 절대로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내 말대로 해 줘. 부탁할게.”
오빠는 작게 앓는 듯한 소리를 냈다.
“젠장!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하다니! 역시 재수 없어, 저 자식!”
오빠는 아스트라를 발동시켜 허공에 떠오르며 말했다.
“전부 말해 줘야 해. 하나도 빠짐없이!”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오빠는 설핏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굳은 얼굴로 아스트라에 태양의 마력을 주입했다.
백금빛 장창이 마치 태양이 쏘아 낸 거대한 빛살처럼 빛났다.
투캉!
눈보라를 갈라 찢으며 날아간 창은 조금 전 아빠의 마력에 공격당한 곳을 다시 노렸다.
이번에는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어서.
창끝이 레비아탄의 피부에 박혔다.
“좋았어!”
아스트라는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주인의 마력을 전달받을 수 있다.
오빠는 레비아탄에 박힌 창에 태양의 마력을 최대한 때려 박았다.
직통으로 마물의 몸 안에 불꽃을 바로 쏴 넣은 셈.
과연 레비아탄은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뒤틀었다.
카아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얼음으로 뒤덮인 듯한 레비아탄의 피부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레비아탄의 외피가 갑자기 액체가 된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툭. 투둑.
“…비?”
갑자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추운 지방에 비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 떨어져 내린 비는 곧 얼음 조각으로 변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비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아빠가 아연하게 외쳤다.
“지금, 레비아탄의 몸체가 녹아내리는 건가?”
“그런 것 같아!”
동의한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이 판단이 맞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체내로 쏟아부은 불꽃에 레비아탄의 몸체가 녹아내려, 사방으로 흩뿌려진 것이다.
레비아탄이 확실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소리니까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빠!”
“알아!!”
나와 오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게 무엇의 전조인지.
터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오빠는 이번엔 태양의 마력이 아니라, 얼음의 마력을 내뿜었다.
자신의 아스트라를 향해.
그러자 백금의 창은 이번에는 얼음의 마력을 레비아탄의 몸 안에 직접 내쏘았다.
콰드드득---!!!
다시 레비아탄의 몸체가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태양의 마력을 썼을 때보다는 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레비아탄의 몸체가 얼어붙자 쏟아지던 비 또한 멈췄다.
“타격은 확실하게 준 것 같은데, 왜 멈춘 거니?”
“레비아탄이 비를 뿌리는 건 해일을 내뿜는 전조에요.”
“해일?!”
이 단어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건 할아버지였다.
“해일이라니, 설마 저 몸체가 다 물이 되어 쏟아진다는 게냐?”
“그것보다 몇십 배로요.”
할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해쓱해졌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빙벽이 견디지 못할 거다. 왕성은 물론이고, 백성들이 있는 곳에까지 해일이 밀려들면 큰일이다.”
그건 그야말로, 엄마가 말한 하스티아 건국 신화의 ‘빙해의 범람’이 재현되게 될 것이다.
레비아탄은 물로써 멸망을 부르는 마물.
괜히 저것이 마왕 소환 직전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세상의 멸망과 직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의미였다.
저것에 타격을 주려면 강력한 불과 열의 마력으로 공격해야 한다.
하지만 그랬다간, 놈이 토해 내는 물에 하스티아 전체가 잠겨 버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전생에 저놈을 처리할 때, 해수면이 10m는 상승했었으니까.
반면 얼음의 마력으로는 놈을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었다.
우리는 지금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스티아의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레비아탄을 죽일 것인가.
혹은, 다시 얼음의 마력으로 놈을 봉인해 둘 것인가.
‘하지만 소피아의 방해를 뚫고, 하스티아도 지키면서, 저걸 다시 봉인한다?’
가능할까?
그때였다.
내내 망설이는 듯하던 시스템이 다시 지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질긴 스토커 놈에게 그만두라고 외치려던 찰나.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