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4. 메인 퀘스트 : 눈보라 속으로 (05)
눈앞에 이젠 시스템 흉내를 버리기로 한 듯한 ‘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길 노려.]
명백하게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연달아 내 시야에 붉은색의 기호가 나타났다.
레비아탄 몸체 중앙의 한 곳을 가리키는 화살표였고.
화살표의 뾰족한 쪽에는 비슷한 붉은색으로 처리된 ‘무언가’가 있었다.
작지만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 나스카 성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기구나!’
[▩레㉿아탄을 강화하고 있는№ 코어를 없애야&*.]
코어라는 게 결국은 자기 자신을 뜻하는 건 분명했다.
[그러면 너희 가족의 마력으로도⁂ω 빙벽을 지키면서 레비아탄을 쓰러뜨릴 ΘΥ있을 ▦▧]
[한⁉ 번에℟℻ↆ 확실하게 날려버려₸₿.]
[ω▩※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
전생의 그때와 결국은 똑같은 상황이다.
적과 함께 자신도 죽이라고 말하고 있는 미하일.
그리고 지금 나는 전생 마왕 소환의 때에, 그가 한 짓이 비슷한 맥락의 일이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도 환생으로 얻은 두 번째 삶 역시도 그와 연관이 있겠지.
하지만 내가 예상하는 건 결국 나 혼자만의 어림짐작일 뿐이다.
나는, 듣고 싶었다.
직접, 그의 입으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이따위로 가타부타 설명 없이 저지르는 희생이 아니라!’
나는 가족들에게 <사일런트 메시지>로 동시에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은 전투 중이라 거리가 제각각 떨어져 있었기에 한 번에 의사 표현을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잠시만 레비아탄의 주의를 끌어 주세요.
-제가 단번에 레비아탄의 약점으로 찌르고 들어갈게요.
-위험해 보이겠지만,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가족들의 불안과 걱정 어린 시선이 나에게 닿았지만.
나는 올곧은 눈으로 레비아탄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족들이 나를 믿어 줄 거라는 사실을.
결국, 가족들은 나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서 보여 주었다.
엄마가 옆을 스쳐 가며 외쳤다.
“절대 다쳐 오면 안 된다!”
“네!”
나는 기세 좋게 대답했고.
가족들은 내 대답에 눈에 띄게 안심한 듯, 움직임이 훨씬 편해졌다.
쾅! 콰광!
아빠가 뽑아 낸 금빛의 원들이 레비아탄의 주변을 휘감아, 열을 내뿜었고.
엄마가 쏘아 올린 얼음 쐐기들이 소피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오빠는 레비아탄의 몸체에 꽂힌 창에 태양의 마력과 얼음의 마력을 번갈아 꽂아 넣었다.
레비아탄에게 타격을 주면서, 동시에 빙벽을 무너뜨릴 만한 범람을 막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는 후방에서 싸움의 여파가 빙벽 너머 하스티아로 번지는 걸 막고 있었다.
한 번도 함께 싸워 본 적 없는데, 미리 계획을 세우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어쩐지 벅찬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전생에는 우리 가족 전부가 이렇게 힘을 합쳐 싸워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가하게 감동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레비아탄에게서 미하일을 구해 내야, 하스티아에 악영향 없이 레비아탄을 없앨 수 있어.’
놈은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는 품속에서 워프 포탈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포탈을 발동시키는 버튼 역할을 하는 보석을 꾹 눌렀다.
조금 전, 시스템, 아니, 미하일이 나에게 알려 준 위치를 향해.
워프 포탈은 본인이 가 본 장소로만 이동이 가능했고.
대륙 너머까지 장거리 이동이 가능한 아이템이다.
그리고 단거리에서 이것을 사용할 때에는.
직접 가 본 적 없는 위치라도, 시야에 닿는 곳이라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레비아탄의 몸통 앞이라고 해도 말이지!’
파앗-!
포탈이 발동되었다.
***
소피아는 레비아탄의 중심부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또 부질없는 발버둥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에도, 그리고 지금도 저렇게까지 처절한 애정과 희생을 어떻게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당사자가 모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만.
끝까지 모를 수가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미하일은 그간 자신에게 대항하고, 아나트리샤를 도우며, 너무 많은 힘을 소모했다.
거의 자신의 존재를 녹여 아나트리샤의 일부가 되려는 것처럼.
그러니 이렇게 맥없이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레비아탄을 강화하는 도구로써 잘 사용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쓸모가 있었다.
미하일에게는.
“어쨌건 당신은 이미 멸망의 매개체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생의 마지막 기억은 정말이지 끔찍한 실패의 기록이나 같았다.
계획대로 되었다면 지금의 두 번째 삶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멸망이 완벽한 형태로 강림했을 테니까.
한번 실패했지만, 이번만은 다를 예정이다.
이를 위해 소피아는 눈을 뜬 직후부터 최선을 다해 왔으니까.
전생에 그녀의 계획을 방해한 가장 큰 걸림돌인 미하일이, 이번에는 가장 큰 열쇠가 될 예정이었다.
그때, 레비아탄을 향한 공격이 훨씬 거세어졌다.
이 거대한 레비아탄과 비교하면 점보다 작은 소피아를 직접 노린 공격까지 날아왔다.
소피아는 이 높이까지 날아오는 얼음 쐐기를 피하는 한편.
지속적으로 아나트리샤를 감시했다.
그리고.
보았다.
아나트리샤가 워프 포탈을 이용해, 레비아탄의 배 바로 앞부분으로 공간 이동하는 것을.
손안에 이미 부정의 마력이 맺혀 있으니 공격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거뒀다.
그리고 조금은 기대 어린 눈으로 아나트리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상황에서.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할까?’
***
엄청나게 멀리 있던 레비아탄의 울퉁불퉁한 복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아스트라를 내질렀다.
오빠가 이미 꽂아 둔 창이 강렬한 태양의 마력을 내뿜고 있는 바로, 그 위치로.
마력을 전부 열로 바꾸어 레비아탄의 배 안에 방출한다.
동시에 엄마와 오빠에게 <사일런트 메시지>를 날렸다.
-잠깐 전력으로 레비아탄의 몸체를 얼려 줘요!
엄마와 오빠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건 따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저 가족들을 믿고서.
눈앞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레비아탄의 뱃속으로.
***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의 몇백 배에 가까운 거대한 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있었다.
이 진동은 소년의 몸에서 뽑아낸 마력이 마물의 온몸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증거와도 같았다.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소년은 입술을 달싹였다.
“……야.”
너무나도 작은 소리라, 제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년은 부질없는 바람을 담아 다시 속삭였다.
“제발…….”
새로운 생을 얻은 이후.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부탁해 왔다.
제발 자신을 죽이라고.
그래서 전생의 비극을 다시 반복하지 말라고.
언제든 그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스킬까지 건네주었건만.
그녀는 몇 번의 기회를 앞에 두고도 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염치없고 뻔뻔하게도.
소녀의 선택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난 절대 너를 용서하지 못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 놓고도.
당연한 말이었다.
자신이 전생에 한 짓을 떠올리면.
그 이유가 어떠하든, 무엇을 위해서였든.
자신이 그녀를 배반한 것은 틀림이 없으므로.
이 손으로 그녀의 등을 찔렀고.
마왕의 매개체가 되길 자청하여, 그녀의 눈앞에서 마지막 남은 가족을 잃게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검을 내려치던 때의 그녀는…….
쿠궁, 구웅!
소년을 삼킨 마물이 용틀임을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심장이 뛰는 듯한 소음.
저 소리가 마치 소년 자신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부질없고 또 이기적인 바람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심장.
“하아…….”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이미 대부분의 힘을 잃은 소년의 몸에서는 계속해서 마력이 뽑혀 나갔다.
몸의 일부를 계속해서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이 반복되고 있었다.
참으로 끈질기고 이기적인 인간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지금 이 상황에 와서까지.
굳이 그녀의 손에 끝을 맞이하길 바라는 것부터가.
분에 넘치는 말도 안 되는 바람인 걸지도.
정말로 모든 게 잘못되기 전에, 결정을 내리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소년은 한 자락 남은 힘을 그러모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왼손 약지에 단단히 매어진 분홍색 리본.
어째서인지, 리본에 감싸인 손가락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두쿵! 쿠궁!
심장 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커다란 소음.
흐린 의식 속에서도 미하일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어?’
또한, 저건 괴물이나 그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단단한 것을, 어마어마한 힘으로 후려치고 부수는 소리였다.
쾅!
귓전에서 폭탄이 터진 듯한 소음이 울리고.
내내 소년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찢겨 나가며, 드디어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을 등진 채로, 소녀가 희게 웃었다.
미하일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기에?”
이 위험한 곳에, 어째서 직접 온 건가?
레비아탄의 코어로 기능 중인 나스카의 부유성과 소년을 부수는 건, 멀리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오히려 그게 몇 배는 더 안전했다.
그런데, 왜?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것처럼, 아나트리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너 한 대 패 주려고 왔지!”
눈이 멀어 버릴 듯한 빛이, 소녀의 뒤에서 오롯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