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5. 메인 퀘스트 : 이번엔 사로잡힌 왕자님? (08)
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정곡을 찔렀나 봐?”
하지만 소피아의 평정이 무너진 건 순간에 불과했다.
그녀는 바로 매끄러운 가면을 썼다.
조금의 흔들림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하는 듯한, 완벽한 가면을.
“그럴 리가요. 그가 당신을 배신한 건 사실이니, 그냥 의아할 뿐이에요. 내가 아는 당신은 절대 배반자를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너 같은 배반자?”
소피아는 화사하게 웃었다.
“맞아요. 그도 나 같은 배반자이죠. 당신이 날 용서할 리 없잖아요?”
“내가 죽었다가……, 아 한 열 번쯤 죽었다 살아나도 그럴 일은 없지.”
“그러면 이건 불공평한 거 아닌가요?”
소피아는 짐짓 새침하게 웃으며, 채찍을 휘둘렀다.
“나는 용서 못 한다면서, 미하일만 용서하는 건 말이죠!”
어마어마한 부정의 마력이 서린 채찍이 집요하게 미하일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 뱀 같은 움직임을 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스트라를 검의 형태로 바꾼 다음, 그대로 채찍을 향해 몸을 던지듯 뛰어들었다.
쾅!
휘리릭-!
내가 아스트라로 채찍을 베어 낸 것과, 채찍의 남은 부분이 휘어지며 검의 손잡이를 휘감은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
채찍을 통해 소피아가 불어넣는 부정의 마력이 직통으로 나를 공격해 왔다.
나 역시 지지 않았다.
아스트라를 통해 태양의 마력을 전력으로 뿜어내자, 금빛 스파크가 채찍을 타고 소피아에게 흘러들어 갔다.
소피아와 내 힘이 서로를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누구도 일방적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우리는 마력만이 아니라 입으로도 계속 싸웠다.
“너에게도 순정이 있는 줄은 몰랐네.”
“네?”
소피아의 주홍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늘 연극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하는 소피아에게는 드물게도 자연스러운 표정이다.
진심으로 내 말을 이해 못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상대를 마왕 소환의 매개체로 삼다니, 너도 참 대단해.”
“네?! 그게, 무슨?”
“아, 혹시 그게 네가 사람을 좋아하는 방식이야? 비뚤어진 애정, 뭐 그런 거?”
소피아는 어이가 없다는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설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예요? 아니면 내가 빈틈을 보이길 기대하고 한 말?”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
“하지만 너 지금 빈틈 하나도 안 보였잖아. 보였으면 내가 안 노렸을 리 없는데.”
조금이라도, 먼지만큼의 빈틈이라도 보였다면.
나는 그걸 물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헌터로서의 내 방식이었으니까.
사냥감을 대하는 사냥꾼의 방식.
하지만 지금 소피아는 놀라고 어이없어 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소피아는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를 흔들어 놓으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신 앞에서 틈을 보일 리가 없잖아.”
하긴 내가 그런 것처럼, 소피아도 그럴 터였다.
“일부러 흔들려고 물어본 거 아니라니까?”
“……진짜예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 아, 엄청 많구나. 하지만 이건 아니야.”
소피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진심인 것 같은데…….”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긴, 당신은 전생부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둔했죠.”
“무슨 부분? 내가 얼마나 감이 좋은데?!”
“당신의 감이 짐승처럼 예민한 건 잘 알죠. 하지만 딱 한 부분에서만큼은 그 이상으로 둔했으니까. 환생도 그것까지 구제해 주진 못했나 보네요.”
지금 나와 소피아의 대화는 아주 기묘했다.
이 대화의 분위기는 서로를 죽이려는 적으로서라기보다는, 그보다 한참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한때 동료로서 함께 싸웠던 전생의 그 언젠가.
그때의 우리가 할 법한 대화였다.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소피아는 아주 약간의 빈틈을 보였다.
괴물이 잠시 인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 한번 드러난 약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야!’
말로 한 것도 아니고, <사일런트 메시지> 스킬을 쓴 것도 아니었다.
레비아탄의 몸체 안에서는 그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이 안에서 외부의 가족과 의사 교환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말이나 스킬의 도움이 없이도, 나와 미하일 사이에서는 의사가 통했다.
어쩌면 시스템으로서 그가 내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신호에 그간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던 미하일이 반짝 눈을 떴다.
나와 소피아가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그는 마냥 기절해 있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레비아탄의 몸체 안에 흡수당한 밤의 마력은 본디 그의 것이다.
마력이라는 건 결국 신체의 일부와 마찬가지.
어떤 면에서는 팔다리보다 더욱 확실하게 주인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설사 타인에게 빼앗긴 상태라 해도, 시간이 너무 지나지 않은 상태의 일부는 조종이 가능했다.
지금처럼.
콰드득!
미하일의 의지를 따라 레비아탄의 몸체 안쪽에서 검은색의 마력 결정이 자라났다.
그것은 순식간에 검은 창처럼 솟아나, 소피아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푹!
피가 튀었다.
창의 끝이 소피아의 왼쪽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처음으로 소피아가 피를 본 것이다.
‘좋아!’
덕분에 나와 소피아 사이에 이루어졌던 균형이 깨어졌다.
집중력이 깨지면서 소피아의 마력이 내 마력에 밀린 것이다.
뿌득!
손잡이를 휘감은 소피아의 채찍을 끊어 버리며, 내 아스트라의 날이 휘둘러졌다.
서걱!
금빛 칼날이 소피아의 목덜미를 베었다.
“큭!”
하지만 얕았다.
꽤 심각한 상처긴 하지만, 치명상까진 아니다.
나는 여유를 두지 않고 반복해서 공격을 날렸다.
승기를 잡은 지금 끝을 내야 한다!
금빛 검기가 연달아 소피아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잠시 흐트러졌던 소피아는 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레비아탄!”
소피아의 비명 같은 부름이 있은 직후.
레비아탄의 몸체 내부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소피아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부정의 마력이 폭사되기 시작했다.
레비아탄은 이를 고스란히 받아먹으며 몸체를 불렸다.
쿠드득! 콰드득!
기괴한 소음을 울리며 물과 얼음, 그리고 정체불명의 살점으로 이루어진 촉수들이 자라나 소피아를 집어삼켰다.
그건 주인을 보호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처럼도 보였고.
달리 보면, 힘을 잃은 먹이를 잡아먹는 괴물처럼도 보였다.
작은 소녀의 몸은 곧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소피아가 레비아탄의 몸체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촉수의 성장세는 몇 배로 강해져, 나와 미하일을 둘러쌌다.
칼을 휘둘러 촉수를 잘라 내며, 다시 미하일을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며 사람의 발을 잡아채는 수초 같았다.
수초보다 수천 배는 징그럽고 끔찍하고 또 위험한 것들이지만.
파창!
검은 창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나는 촉수에 밀려 박살 났다.
미하일은 다시 피를 토했다.
“컥!”
레비아탄의 몸에 아직 덜 흡수된 본인의 마력을 조종했는데.
소피아가 레비이탄과 일체화하면서, 그 마력을 공격하여 타격을 준 것이다.
이미 너무 약화된 상태의 미하일로서는 그걸 버텨내기 힘든 듯했다.
나는 미하일을 둘러업은 채, 워프 포탈을 보았다.
남은 사용 횟수는 두 번.
아직 레비아탄의 몸체에 뚫린 구멍은 다 막히지 않았다.
그래서 시야에 바깥쪽 하늘이 보였다.
그곳으로 워프를 시도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마력 간섭으로 아이템 사용이 불가능한 지역입니다.]
그야말로 시스템다운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역시 안 되나.’
레비아탄의 몸체 내부가 워낙 다양하고 강력한 마력으로 가득 차 있어서 불가능한 모양이다.
하긴, 나도 이걸 예상하고 비아탄의 몸 안이 아니라 바로 앞으로 워프했던 거니까.
전생에 던전 내에서 워프 포탈을 쓸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이유겠지.
어쩔 수 없었다.
짐이 하나 있긴 하지만, 전력으로 뚫고 나갈 수밖에.
나는 아스트라에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순식간에 금빛 칼날이 10m 넘게 자라났다.
칼을 휘두르자 레비아탄의 촉수들이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그러나.
그것들은 잘린 순간, 바로 서로 몸을 이어 붙였다.
엄청난 재생력이다.
‘전생의 레비아탄보다 몇 배로 강한 재생력이야. 역시 미하일의 마력을 흡수한 게 컸나.’
그때였다.
미하일이 다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두고…….”
울컥했다.
또!
나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넌 학습능력이 없냐! 지금 널 놔두고 가면 지금까지 쏟아부은 내 노력은 뭔데!”
“하지만…….”
“또 입 열면 레비아탄이나 소피아보다 널 먼저 팬다!”
미하일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맞는 게 두려운…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더 말을 얹는 건 소피아와 레비아탄을 상대하는 데 방해된다고 파악한 모양이다.
레비아탄의 안쪽 공동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아직도 그를 포기하지 않는군요.”
소피아의 목소리다.
역시 레비아탄에게 아예 잡아먹힌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애완동물에게 주인이 잡아먹힐 리 없지.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네가 너무 갖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말이야.”
“……원래는 좀 더 멋지고 재밌는 구도를 기대했는데, 실패했네요.”
낮은 중얼거림이 들린 듯도 했다. 한숨처럼.
“역시 인간의 감정은 방해밖에 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촉수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겉면이 점점 더 단단해지며, 날이 세워졌다.
칼 혹은 낫을 닮은 모습들.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듯한 형태였다.
수백, 수천의 칼날이 일시에 나와 미하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과광---!!!
폭음과 함께 레비아탄의 두꺼운 외피를 뚫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부신 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