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5. 메인 퀘스트 : 이번엔 사로잡힌 왕자님? (09)
레비아탄의 배 속에서 그 몸체는 곧 어둠으로 만들어진 장막 같았다.
이 장막에 구멍이 뚫리자 빛이 눈을 찌르는 듯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파고드는 빛의 뒤를 이어, 여러 개의 금빛 원이 레비아탄의 몸속으로 들어와 빙글빙글 돌았다.
금빛 거대한 원이 그려질 때마다, 우리를 갈가리 찢기 위해 돋아난 칼날의 숲이 잘려 나갔다.
연이어 백금빛 장창이 날아들어 사방을 찔러 불태우고 또 얼려 버렸다.
나는 화색을 띠며 외쳤다.
“아빠! 오빠!”
“리샤! 거기 있는 거지?”
“아가! 괜찮으냐?!”
아빠와 오빠의 대답이 들려왔다.
곧 구멍 틈으로 아빠와 오빠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전력으로 우리에게 달려왔다.
아빠의 손과 오빠의 손이 나에게 뻗어왔다.
나는 두 손을 모두 맞잡았다.
가족들이 당기는 힘은 강했고, 덕분에 나 혼자서는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던 몇 걸음이 훨씬 쉬워졌다.
내가 들쳐 메고 있었기 때문에, 미하일은 덤으로 딸려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레비아탄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순간.
미하일을 구하러 달려오기 전에 이미 가족들과 합의해 둔 계획이 진행되었다.
콰르르응---!!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굉음이 레비아탄의 몸체에서 울렸다.
나와 아빠, 오빠 세 명분의 태양의 마력이 레비아탄의 배 속에서 폭발한 것이다.
우리의 마력은 거대한 괴물을 이룬 얼음이 전부 녹아내리게 하고.
다른 잡다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끓어오르고, 타들어 가고, 일부는 증발하게 하기 충분했다.
사실상 1km에 달하는 너비의 거대한 물 가오리를 통째로 끓여 버린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저 거대한 몸체를 강화해 주던 미하일은 이미 빼낸 상태.
코어 역할을 하던 미하일이 사라지자, 놈은 급속도로 약화되어 크기와 마력 역시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 상태로 황족 셋의 태양의 마력이 전력으로 폭발하는 걸 견뎌 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재앙.
파도의 짐승이 불러온 범람.
더는 가오리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레비아탄은 그대로 물풍선처럼 터져 버렸고.
어마어마한 양의 바닷물이 빙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
수십 미터에 달하는 해일이 일어났다.
전생에 나와 오빠는 이미 본 적 있는 광경이다.
하늘을 찌를 듯하던 마천루를 삼켜서 부숴 버렸던 파괴적인 해일.
하지만 지금의 규모는 그때에 비해 훨씬 작았다.
레비아탄이 터지기 전에 충분히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해일은 역대 하스티아 국왕들이 유지해 온 빙벽을 흔들고 있었다.
얼음벽에 금이 가고, 불안한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당장에라도 빙벽이 무너져 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던 해일은, 첫 기세를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했다.
레비아탄으로 직접 진입해 나를 구해 낸 아빠와 오빠.
그들 외에 다른 두 가족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할아버지!’
두 분이 해일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콰드드드득---!!!
엄마와 할아버지가 발동시킨 얼음의 마력이 밀려드는 해일을 막아 냈다.
당장에라도 하스티아 땅을 삼킬 듯 넘실거리던 파도가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파괴되기 시작한 빙벽 위에 다시 새롭고 거대한 빙벽이 지어졌다.
하지만 해일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거센 여파가 다시 새로 만들어진 빙벽에 부딪쳤다.
쿵! 우릉!
다시금 빙벽이 부서지고, 또 세워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건 파도와 얼음벽의 싸움이었다.
잠시 그걸 지켜보던 오빠는 간단한 말을 남기고 엄마와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돕고 올게!”
“응!”
어차피 레비아탄은 터져 버렸고, 내 옆엔 아빠도 같이 있으니까.
얼음의 마력을 가진 사람이 늘어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아. 아슬아슬했다.”
아빠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완벽한 타이밍이었지?”
“네!”
레비아탄의 안에서는 <사일런트 메시지> 사용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타이밍을 맞추는 걸 제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아니, 가족들이 맞춰 줬다고 해야 하려나.
아빠랑 오빠가 레비아탄 안으로 들어와 주지 않았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아빠 최고!”
그러자 저 멀리 해일을 얼리고 있던 오빠가 어떻게 들었는지 바락 외치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렸다.
“나는?!”
“오빠도 최고!”
정말이지 이럴 땐 열일곱이 아니라 일곱 살 같다니까.
그런데 연달아 들리는 외침이 있었다.
“엄마느은?”
“할아버지는?”
“…….”
두 분한테까지 나잇값 못한다고 하기는 좀 그런데.
난 방금 전 든 허튼 생각을 지우고 양손 엄지를 추켜올리며 외쳤다.
“엄마 최고! 할아버지도 최고!”
그리고 나는 해일이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세 사람 최고를 번갈아 가며 외쳐야 했다.
……어쨌든 다들 만족했으니 된 거겠지.
***
“아가!”
“어이구! 이 콩만 한 것이 그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구나!”
빙벽이 이전 크기에 비해 두 배쯤 크게 새로 세워진 뒤.
우리 가족은 드디어 가까이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으셨고.
할아버지는 잠깐 못 본 새 내 볼살이 빠졌다고 야단이셨다.
왠지 앞으로 매끼 식사 때마다 내가 얼마나 먹는지 감시하실 기세다.
어쨌든 레비아탄을 소멸시키고, 하스티아를 지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가족들도 모두 안전!
그리고.
‘미하일도 구해 냈지.’
나는 엄마 품에 안겨서 우리 가족의 상봉 자리에서 좀 떨어진 장소를 바라보았다.
기절한 미하일이 오도카니 누운 곳 말이다.
미하일은 아빠의 망토를 덮고 누워 있었는데.
당연히 아빠가 망토를 주신…, 건 아니었고.
내가 외투를 한 겹 벗어서 덮어 주려고 하자, 아빠가 나섰다.
“우리 딸 추우면 안 돼! 차라리 이걸 덮어 주거라! 그냥 버리면 되니까!”
……얘 한번 덮었다고 버리겠다는 건가?
나는 찜찜해하면서도 아빠가 준 망토로 대충 미하일을 포장해서 놓아두었다.
딱 봐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고 옷도 얇아서, 그냥 놔뒀다간 어렵게 구해낸 게 소용없어질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기다린 끝에 오빠, 엄마와 할아버지까지 오시고, 드디어 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나는 두 팔을 반짝 들어올렸다.
“이겼다--! 우리 가족 만세!”
“만세!”
오빠도 환하게 웃으며 방방 뛰었고.
엄마, 아빠, 할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지금 우리가 있는 빙벽 아래쪽 하스티아인들도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레비아탄이 워낙에 컸고, 해일도 엄청나서, 못 알아챌 수 없었을 테니까.
이번에는 정말로 해냈다.
아무도 잃거나 희생시키지 않고, 이겨 낸 것이다.
정말로 기뻤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 소피아만……, 어?”
레비아탄의 잔해에서 소피아의 시체만 찾아내면 모든 일이 끝……인데?
왜 하늘이 노랗지?
그리고 왜…… 이렇게 사방이 빙글빙글 도는 거야?
가족들의 경악한 외침이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아가!”
“리샤아!”
“정신 차리거라!”
“빨리 왕성으로 가자! 어서 의사를……!”
거기서 내 의식은 뚝 하고 끊겼다.
***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레비아탄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리저리 제일 많이 뛰어다녔고.
마력 소모도 당연히 제일 컸으니까.
그리고 전생에 비하면 엄청 강해진 상태지만.
어쨌든 지금 내 몸은 아직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열두 살짜리 아이였다.
일이 끝나고 긴장이 풀리자 그대로 기절해 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내가 그런 상태라는 걸 깨달았는데…… 왜 몸이 움직여지지 않지?
‘으응?’
지지직, 찌이익---!
신경을 긁는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뇌리에 바로 파고드는 파동에 가깝다.
이게 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시스템 에러?’
그렇다. 전생에 내가 죽기 직전, 시스템이 처음 에러를 일으켰을 때.
그때 이런 에러의 파장이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시스템이 눈에 띄게 큰 오류를 일으킨 때면.
늘 이 파장이 뒤따르곤 했다.
[System Error!]
아니나 다를까.
시뻘건 에러 메시지가 의식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조금씩 걷히면서,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주변의 풍경이 이상했다.
아니,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들.
하늘이 검고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부서진 빌딩의 잔해. 무너진 대교의 철골들이 마치 공룡의 뼈처럼 늘어져 있다.
파괴된 지구 문명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시야를 채운다.
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전생의 지구 풍경이잖아?’
그리고 혼란에서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려 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미하일!”
익숙하지만, 너무나도 낯선 목소리.
그렇다.
내 목소리이기에 익숙할 수밖에 없지만, 타인이 듣는 내 목소리기에 낯설 수밖에 없는.
고개가 돌아가자, 거기에는 지금 내가 보기에도 더없이 재수 없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안서나’가 서 있었다.
“대체 몇 번이나 부르게 만드는 거야?”
그렇다. 전생의 ‘내’가 보였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이건, 미하일의 기억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