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6. 메인 퀘스트 : 혼선 (04)
[System Error!]
미하일은 소원을 말해 보라 말한 뒤, 이 용언을 내게 주었다.
결국 이것의 본질은 언령(言霊)이다.
말이 가진 힘.
입 밖으로 내어 소리의 형태를 띤 의지가, 결국 실현되게 되는 힘.
그 형태가 반드시 미하일의 죽음으로 고정될 필요는 없었다.
그가 그렇게 유도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힘 역시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이 의지의 힘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불어넣어서.
나는 소원을 빌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미하일을 살려 줘. 그가 살아서 다시 내 눈을 보고, 내 말을 듣고, 대답할 수 있게 해 줘.”
그래서 내 입으로 내놓은 잔인한 말을 다시 담을 수 있게 해줘.
내 소원에 답한 건, 신이 아니었고, 미하일도 아니었다.
고장 난 기계처럼 답하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권한을 벗≪어난 명령입니다.]
[시스템 오류∽▧…!]
나는 다시 한 번 조금 전에 한 말을 반복했다.
그를 살려 줘.
이건 내 영혼 자체를 담은 말이자 의지였다.
정신없는 시스템 오류 메시지가 뇌리를 찔렀지만, 나는 모든 걸 무시한 채.
이 안에 내 강렬한 바람을 담으려 노력했다.
내 의지를 따라 천천히 붉은 리본에서 내뿜어지는 빛이 짙어졌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 온몸에서, 아니, 영혼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내 영혼과 단단히 엉겨 붙어 있던 어떤 힘이 빠져나와 내가 빈 소원과 합쳐졌다.
내 행동에 저항하는 듯하던 시스템은, 결국 이기지 못한 듯 항복에 가까운 메시지를 내뱉었다.
[유저, 아나트리샤(안서나) 및 유저, 미하일의 ^%$*&에 따라 &* 특별 &*ω▦ 이식을℻ 승인…….]
[……Loading……]
[완료!]
그와 함께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시스템이 내게 제공하고 있던 글자와 기호들이 무너졌다.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더는 시스템이 나를 돕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걸.
이 메시지를 보는 건 지금이 끝이 될 거라는 것도.
하지만 상관없었다.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이런 것 없이도 나는 강하니까.
아니, 강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손안에는 붉은 리본이 아니라 붉은색과 금빛으로 부드럽게 빛나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작은 검의 본체는 불투명하면서도 따스한 검은 빛.
이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아스트라.”
전생에 미하일 역시 아스트라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그 무기로 제 영혼을 조각내어 내게 심어 두었다.
그 아스트라의 형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다시 내 손안에 있었다.
하필이면 이것이 검의 형태를 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제 영혼의 조각을 담은 아스트라로 나를 찔렀다.
그렇다면.
“…….”
나는 고요히 잠든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검의 형태는 결국 목적을 베고 찌르는 데에 있다.
그가 나를 상처 입히며 이것을 나에게 주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번에는 반대로 해야 하는 모양이다.
천천히 칼날을 똑바로 세워서, 그의 심장 위를 겨눴다.
칼끝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내게 준 증거이자, 내 소원의 결정이라면.
그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단번에 찔러 넣었다.
푹!
몸속으로 파고든 칼날은 바로 형태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단검은 순식간에 미하일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전 단검이 내뿜던 것보다 몇 배로 강한 빛이 미하일의 몸을 중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강한 빛이었으나, 조금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나는 그 빛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미하일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가족들의 미하일에 대한 적개심은 내 자세한 설명 후 많이 사라졌다.
물론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에겐 적당히 요약해서 설명해야 했다.
하지만 엄마, 아빠 오빠에겐 전부 말했다.
미하일이 치른 희생에 대한 설명과, 지금 우리가 얻은 두 번째 생이 그 결과물이라는 사실까지.
그런데 내가 생략하고 넘어갔던 부분을 귀신같이 알아챈 오빠가 버럭 외쳤다.
“하지만! 저놈은 전생에 네 등을 찔렀다고!”
“뭐라고?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당장 오체분시를 해도 모자라!”
부모님은 조금 전까지의 내 설명을 다 까먹은 것처럼, 오빠의 말에 화를 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가족들의 폭주를 저지해야 했다.
“그게 나랑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니까! 뭘 들은 거야!”
“아. 맞다. 알고 있는데 그때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살기가 불쑥불쑥 치솟아서…….”
뭐, 하긴. 나도 아직도 전생에 오빠가 죽던 장면 같은 건 떠올리기만 해도 악몽을 꿀 지경이니.
……음. 역시 전생에 오빠 죽음에 대해서는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는 것으로.
오빠와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의 무언 협정은 다시 갱신되었다.
어쨌든 이 설명이 끝난 뒤 가족들의 미하일에 대한 태도나 눈빛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었네. 이렇게 지극 정성이었을 줄은.”
엄마는 왠지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고.
“확실히 우리 아가를 위한 노력 자체는 가상하긴 하지만…….”
“그때는 정말 배신한 줄 알았는데, 사실 아니었던 거고. 우리 가족을 되찾은 데에 저놈이 한 게 많긴 하지만…….”
아빠와 오빠는 거의 동시에 입에서 불을 뿜었다.
“하지만 내 딸은 안 돼!”
“그래도 내 동생은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려니, 엄마는 말없이 웃으시며 조용히 덧붙이셨다.
“그렇지. 아무리 가상해도, 내 딸은 안 되지.”
***
미하일이 눈뜨지 못하는 동안.
우리 가족이 미하일의 옆만을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들 할 일이 많으니까.
반역자들의 잔당에 대한 처벌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처리.
또한 이번에 크게 흔들리고 변화한 빙벽의 상황 확인 및 처리도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실이 밝혀졌다.
우선, 우리의 사촌 시벨은 예상대로 세 살 때 병으로 죽은 게 맞다는 게 밝혀졌다.
비체가의 영지 깊숙한 곳 영묘에서 그 유골을 회수했고. 외삼촌의 옆에 안장되었다.
시벨을 제대로 안치하면서, 할아버지는 다시 한 번 그늘진 표정으로 하염없이 작은 관을 매만졌다.
이것은 공식적인 장례식이 아니었기에.
우리 가족만이 상복을 입고 참여한 자리에서 치러졌다.
이번에는 아빠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그 뒤로도 여러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쁘셨는데.
그중에는 기쁜 소식과 불길한 소식이 섞여 있었다.
“어? 나중에라도 엄마랑 오빠가 하스티아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고요? 정말요?”
우리 가족의 가장 큰 근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빙벽의 유지를 위해서는 국왕 혹은 후계자가 늘 왕성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 혼자 외롭게 하스티아에 떨어져 계시는 게 마음에 걸렸고.
나중에는 엄마와 오빠 중 한 명은 반드시 하스티아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슬펐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빙해의 수위가 점점 내려가고 있단다. 빙해가 땅보다 높게 유지되었던 것 자체가 레비아탄의 존재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빙해의 수위를 높이던 원흉이 사라졌으니, 바다도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빙벽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찾아온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어지는 말을 듣고 경악했다.
“소피아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요?”
그렇다.
레비아탄의 거대한 잔해를 이 잡듯이 뒤지며 소피아가 죽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긍정적인 예상으로 우리를 위로했다.
“워낙 큰 폭발이었잖니? 흔적도 남지 않았을 거야.”
“맞다. 거기서 살아남을 수는 없어.”
하지만 나와 오빠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말없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명백히 죽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 더 높아.’
그 집요하고 지독한 악의를 생각한다면.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는 허무한 바람의 비명만이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
우리 가족은 하스티아에서의 뒤처리까지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왔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2주.
원래 황궁에서 하스티아까지 왕복만 3개월이 걸리는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빠른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2주는 황제가 나라를 비우기에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덕분에 귀환 이후 아빠와 엄마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빠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도와 하스티아 내정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다.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느덧 하스티아 방문 이후 다섯 번째 겨울이 지나고 있었다.
유리 온실에서 직접 꺾어 온 흰 크로커스 꽃다발을, 침대 머리맡의 도자기 꽃병에 꽂았다.
꽃이 질 때마다 새로운 꽃을 가져다 놓는 것은 내가 잊지 않고 하는 일이었다.
몇 번 꽃을 바꿨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꽃다발이 그린 그림자가 이제 소년이라 부르기 어색한 얼굴 위로 아롱졌다.
나는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하지만 오늘도, 그의 속눈썹은 흔들림 없이 그림자만을 뺨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곧 겨울이 끝나고, 내 열일곱 살의 봄이 올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