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1)
루스템 제국에서는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황실에서 사냥 대회를 여는 풍습이 있었다.
겨울에 먹이가 부족한 맹수들이 민가로 내려오는 것을 막고.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과 가죽을 마련할 목적으로 벌어지는 행사였다.
그리고 때때로 늘어난 몬스터를 없애기 위함이기도 했다.
이 사냥으로 얻은 고기는 인근의 평민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황실의 자비를 널리 보여 주는 것이다.
그중 한 해의 가장 마지막, 봄 직전에 열리는 사냥 대회는 젊은 귀족 영식, 영애들이 주 참가자였다.
젊은 귀족들 사이의 사교를 활성화시키고.
귀족이 지켜야 할 자비와 무용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원칙적 목적이었으나.
사실, 마지막 사냥 대회는 가장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각 가문의 주인이나 원로들은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대회 결과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 대회는 각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들의 능력을 보여 주는 무대였기 때문이다.
사냥 대회에서 가장 많은 사냥물을 잡아 온 우승자가 누구냐.
그리고 그 우승자는 부상으로 받은 화관을 어떤 레이디에게 바칠 것인가.
이런저런 화젯거리가 많기 때문에, 마지막 사냥 대회는 사교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유가 더해져 이번 대회는 근 5년 만에 엄청난 인파와 주의가 몰렸다.
이 소식이 널리 돌았기 때문이다.
‘황녀님이 사냥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신다!’
열두 살 때, 처음 사교 모임을 연 이후.
황녀는 꽤 활발하게 사교 활동을 해 왔다.
여전히 제국의 빛으로 숭배받는 데다, 명실상부한 황실의 실세로 군림 중인 이가 바로 아나트리샤 황녀였다.
당연히 황녀의 곁에 접근하고 싶은 이들은 무수히 많았고.
실제로 황녀를 만나 볼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극히 제한되었다.
이는 첫 사교 모임을 주최했을 때, 워낙 아수라장이 벌어진 바람에 굳어진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그때 워낙 난리가 나서, 그 뒤로는 모임마다 인원을 제한해야 했으니까.
때문에 황녀가 참여하는 사교 모임 참석 초대장은 암암리에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모든 이의 주목을 받는 황녀가, 이번엔 따로 초대장이 필요하거나 인원 제한이 있지 않은 행사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당연히 떠들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사냥 대회 당일.
탕-!
화승총 소리가 울리고, 달려가던 토끼가 거꾸러졌다.
그러자 옆에서 총을 쏜 당사자에 대한 아부가 쏟아졌다.
“왕자 전하께서 또 맞추셨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마란치아에서는 무를 숭상한다더니, 과연!”
사냥 대회가 벌어지는 황도 외곽의 숲.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은 제국 동부에 위치한 소국, 아마란치아의 왕자가 중심이 된 무리였다.
아마란치아의 1왕자 비토가 이번에 제국과의 친교를 위해 제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올해 스무 살인 청년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를 숭상하는 나라라는 어떤 이의 첨언과는 어울리지 않게 꽤나 살집이 있는 몸매였다.
“하핫. 이 정도로 뭘!”
비토 왕자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주 많았다.
사냥 솜씨에 자신이 없는 이들은 일찌감치 총을 놓고 비토 왕자 주변에서 아첨하기에 바빴다.
이들이 이런 이유는 간단했다.
‘어떻게 해서든 왕자의 눈에 들어야 해!’
‘아마란치아산 마력석 결정을 직접 수입할 수 있는 길을 뚫을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최근 들어 아마란치아의 위상이 크게 오른 이유는 바로 마력석 결정 때문이다.
화산지대가 많은 아마란치아의 지리적 특성상, 그곳에서만 생성되는 특수한 마력석 결정.
이것이 바로 약 2년 전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워프 포탈’ 작동에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나트리샤가 시스템을 통해 실물을 확보한 워프 포탈을, 그동안 아카데미의 마학자들과 아멘다가 함께 연구했고.
그 결과 2년 전부터 워프 포탈이 대륙 전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륙의 물류 이동에 있어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워프 포탈은 황실에서 직접 생산과 유통을 감독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외부의 예상과는 달리 판매 대상에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황녀의 의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워프 포탈의 수혜는 대륙 전체에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니까.”
이 소문이 돌자, 대륙 전체에 황녀의 자비로움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물론 아나트리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중얼거렸지만.
“독점! 독점이 짱이야!”
그 성능에 비하면 워낙 염가에 풀다시피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 워프 포탈은 제국 내 사람과 물류 이동에 있어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덕분에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풀었음에도 제국 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엄청난 양의 돈이 황실로 몰려들고 있었다.
워프 포탈 가격을 더 올려도 좋지 않겠느냐는 말에, 아나트리샤는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개당 이익을 늘리는 것보다는 대륙 전체에 널리 퍼지는 게 중요해.”
‘그래야 괜히 넘보는 놈들 없이 완벽한 독점이 되니까!’
-라는 설명은 생략되었고.
그저 황녀의 자애로움만이 널리 알려졌을 뿐이다.
그 결과. 현재 인구의 이동과 상업은 2년 전 워프 포탈의 등장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 일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아마란치아였다.
워프 포탈의 작동에 필요한 마력석 결정이 아마란치아에서만 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아마란치아는 최근 2년 동안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고.
나라 자체의 위상이 아예 바뀌어 버렸다.
지금처럼, 제국 내의 쟁쟁한 귀족들이나 외국의 왕실에서 보낸 이들이 왕자에게 아첨할 정도로.
비토 왕자의 코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고 있었고.
양 어깨는 점점 위로 치솟았다.
그의 자신감은 이제 자만심의 수준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 주변에 다른 무리를 이루고 있던 제국 귀족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황녀님께서는 언제 오실까요?”
“황녀님을 멀리서라도 한번 뵐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비토 왕자는 입꼬리를 비죽이 끌어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주일 전에 직접 아나트리샤 황녀님을 뵈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황녀님께서 직접 만나 주셨나요?”
“역시 아마란치아의 왕자님이세요!”
비토 왕자의 자랑에 기계적으로 맞장구를 치던 이들의 표정이 이어진 말에 굳었다.
“사실 이번에 황녀님이 사냥 대회에 참여하신다는 것도, 나를 보려고 오시는 거라네.”
“……네?”
“예에?!”
비토 왕자는 제국 귀족들의 표정이 굳은 것을, 자기 좋게만 생각했다.
‘그래. 놀랍고 경이롭겠지! 그 유명한 제국의 빛, 아나트리샤 황녀가 나를 위해 참석한다는 게 말이야!’
그는 한껏 으쓱거리며 자랑을 이어갔다.
“일전에 뵈었을 때, 황녀님께서 나를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거든. 무려, 직접 차를 건네주신 걸 보면 틀림없어!”
“……아. 네.”
“으으음.”
점점 주변의 시선이 싸늘해지고, 아첨하던 이들의 반응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건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잔뜩 뻐기다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래서 말이야. 이번 사냥 대회 우승자의 화관을 황녀님께 직접 바치면서, 청혼을 해 볼까 해.”
“…….”
“…….”
주변의 공기가 싸늘함을 넘어 영하로 내려갔다.
근거 없는 자만심과 확신에 가득 차 있던 왕자는 그제야 주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야? 다들 왜 이래?’
그의 주변에 우르르 몰려와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어 보려던 이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빠지고 있었다.
빠른 손절을 하는 이들 중에는 제국 귀족만이 아니라, 제국 사정에 밝은 타국인들도 일부 섞여 있었다.
“어? 다들 어디 가는 거지?”
누군가가 중얼거린 소리가 들렸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허. 참. 어딜 넘보는 건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야.”
“쯧쯧.”
대부분은 분노와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일부는 그보다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한창 주가가 올라가는 중인 아마란치아의 왕족인 자신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비토 왕자는 분노하여 외쳤다.
“이게 무슨 무례지? 이게 제국인이 타국의 귀빈을 대하는 태도인 건가?!”
대놓고 화를 냈지만, 제국인들은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지금 그의 주변에 남아 있는 이들은 아마란치아에서 왕자를 시중들어 온 측근들.
혹은 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타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비토 왕자의 분노는 점점 더 커졌다.
“황녀조차 나를 이렇게 홀대하지 못했어! 감히!!!”
그때였다.
탕-!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렸고.
“아악!!!”
비토 왕자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울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와,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헉! 피가!”
“어서, 어서 의사를 불러와!”
총알이 왕자의 귀를 스쳐서 상처가 났고. 이에 놀라서 낙마까지 한 것이다.
왕자의 말은 거친 투레질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주변이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비토 왕자는 피가 흐르는 귀를 부여잡고 당당하게 말에 타고 있는 소년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너, 너 감히 나를 쏘다니! 네 이름과 신분이 무엇이냐?! 내 제국 황실에 항의할 것이다!!!”
그러자 소년은 활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화승총을 어깨에 메는 움직임이 더없이 경쾌했다.
“파비엘 파셀. 파셀 백작가의 막내아들입니다.”
소년의 산뜻한 미소가 아직 찬 공기 속에서 유달리 빛났다.
“당장 저놈을 체포해! 왕족 살해 미수죄다!”
비토 왕자는 꽤액거리는 듯한 비명을 내뱉고 있었고.
파비엘은 더없이 당당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그냥…… 돼지를 잡으려고 쏜 것뿐이에요.”
문장의 중간에 잠시 말을 쉬면서 비토 왕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주변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목소리는 똑같고, 외모도 좀 닮긴 했지요.”
비토 왕자의 얼굴이 분노로 더더욱 붉어졌다.
“방금 누구야!”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를 비토 왕자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착각했다.
그는 다시 자신감을 충전해서 파비엘을 추궁했다.
“애초에 사냥터에 돼지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파비엘은 피식 웃었다.
“저도 없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타났지 뭡니까. 그래서 놀라서 쐈는데, 도망가 버렸네요. 아쉬워라.”
어깨를 으쓱하는 태도가 아주 얄미웠다.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경비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가! 어서 이자를 체포하지 못해?!”
하지만 비토 왕자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이에 응하는 이가 없었다.
파비엘은 노골적으로 비토 왕자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소한 것보다 더 놀라운 말을 조금 전에 제가 들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사소한 일? 제국의 국빈인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사소해?!”
파비엘의 얼굴에 내내 떠올라 있던 장난스러운 미소가 싹 지워졌다.
“당연히 그렇죠. 어떤 돼지가 감히 주제를 모르고 고귀한 황녀님께 청혼이 어쩌고 운운했으니까요.”
그리고 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냥터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누구에게, 청혼?”
한마디 한마디 끊는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파비엘은 절도있게 말에서 내려, 목소리의 주인에게 예의를 표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