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8/218)

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2)

비토 왕자는 경악한 눈을 들었다.

과연 눈앞이 훤해질 정도의 미청년이 백마를 타고 있었다. 

은발이 늦겨울 태양빛 아래 얼음 조각처럼 빛났다. 시린 푸른 눈동자는 사파이어보다 짙은 색.

주변에서 귀족 영애들이 높은 비명을 울리는 게 들렸다.

“세상에!” 

“정말 황자님이셔!” 

“사냥 대회에 오시다니, 처음 아니야?” 

“역시 황녀님 때문에…….”

올해 스물두 살을 맞은 제국의 1황자 루퍼스리안.

바로 그였다.

비토 왕자는 황자의 얼굴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국빈 맞이를 한 것이 아나트리샤 황녀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자를 보고서야 말에서 내린 저 무례한 제국 귀족을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화, 황자! 저자가 나를 쏘았소! 여기 피! 피가 보이시오? 빨리 저자를 처벌해 주시오!”

꽥꽥대는 비토 왕자를 루퍼스리안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비토 왕자의 상처를 걱정하기는커녕,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파비엘에게 돌렸다.

“조금 전에 내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듯한데? 벌써 청력이 안 좋아지는 건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바로 들으셨습니다.”

이 말에 루퍼스리안의 눈이 분노로 새파랗게 타올랐다.

“누가, 감히 누구를 두고, 무슨 말을, 운운했다는 게, 사실이란 말인가?”

루퍼스리안은 잇새로 지독한 분노와 살기를 씹어 내뱉었다.

비토 왕자 또한 상당한 마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루퍼스리안의 살기에 순식간에 위축될 정도였다.

파비엘이 다시 고발하기 전에, 비토 왕자 주변에서 물러나던 어떤 제국 귀족 영애가 외쳤다.

“황자 전하! 조금 전에 비토 왕자께서 우리 황녀님께 청혼할 거라고 했어요!”

뾰족한 목소리.

가당찮은 잘못을 고발하는 듯한 어조였다.

비토 왕자는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이라니, 말도 안 된다. 할 수 있는 말을 한 것뿐인데…….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제 입으로 다시 한 번 읊었다. 변명한 것이다.

“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나이 차이도 적당하고, 신분도 맞으니까! 제국에도 우리 왕국에도 이득이 되고, 무엇보다…… 황녀도 싫지 않은 것 같았……!”

비토 왕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쩌적, 소리와 함께 그의 입이 얼어붙어 버렸던 것이다.

“으으읍!”

경악과 공포로 비토 왕자의 비명이 높게 울렸다.

루퍼스리안은 고개를 삐딱하게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청력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 방금 돼지가 이상하게 짖었는데? 뭐라고 했지? 잘 안 들리는걸?”

누가 봐도 너무 잘 알아들어서 문제인 상황이었으나.

이를 굳이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제국인들은 하나같이 황자와 똑같은 마음이었고.

‘어딜 감히 우리 황녀님을!’

‘저 돼지 왕자 따위를 어떻게 갖다 대려고!’

‘미친 게 틀림없어!’

타국인들은 뒤늦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했던 것이다.

그중에는 비토 왕자와 같은 아마란치아 국민들도 있었다.

소란에 뒤늦게 달려온 아마란치아의 대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 경악했다.

“왕자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힉! 피!”

타국의 대사들과 외교 문제로 논의를 하다 온 그는, 상황을 뒤늦게 전해 듣고 경악하여 달려온 참이었다.

자기 나라 왕자가 말에서 떨어져서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입은 또 얼어붙어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지만 대사는 왕자와는 달랐다. 바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우선 상황 파악부터 하려 했다.

“방금 비토 왕자가 재밌는 얘기를 했다네.”

“아, 황자님! 황자님을 뵙습니다. 우리 왕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대사는 불길함을 떨치지 못했다.

루퍼스리안 황자가 이상할 정도로 살기에 차 있었던 것이다.

꽤 오래 제국에서 지낸 그는 황족들이 누구와 관련된 일에 이렇게 화내는지 알았다.

‘설마 황녀와 연관된 일은…… 아니겠…… 아니어야 하는데?’

그러나 대사의 기대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내 동생에게 청혼, 하겠다던가?”

“히익!!!”

아마란치아의 대사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왕자를 보고 보였던 걱정 어린 눈빛은 순식간에 갖다 버렸다.

‘이 멍청한 왕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역린을 건드린 셈이고.

벌집에 꿀 바른 손을 쑤셔 넣은 격이다.

대사는 필사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화, 황자님! 저희 왕자님이 아직 어리고 상황을 모르셔서 실수를 하신 겁니다! 그리고 황녀님을 흠모하는 이들은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를 빙 두르고도 남지 않습니까! 왕자님께서는 그저……!”

그의 필사적인 변명은, 자국 왕자의 방해로 소용이 없어졌다. 

애써 얼어붙은 입술을 뗀 비토 왕자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분명히 황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다니까!”

“왕자님! 그냥 입 다무세요!”

“우악! 이게 무슨 짓인가! 그게 아니면 황녀가 그렇게 웃어 줄 리도 없고! 내가 참석한다니까 사냥 대회에 참석하겠다고 했다니까!”

아마란치아의 대사는 왕자의 입을 막으려다 실패하고, 진심 어린 살의를 느꼈다.

이대로 비토 왕자의 뒤통수를 갈겨 버릴까?

기절하면 더 주둥이를 더는 못 놀리게 될 텐데.

국왕이 알게 되어서 진노하더라도, 이게 나라를 위해서는 더 맞는 일이 아닐까?

대사는 진심으로 갈등했다.

하지만 대사가 고민을 현실로 옮기거나, 루퍼스리안이 살기를 현실로 옮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비토 왕자의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주장이 더 이어지지도 못했다.

“꺄아아악!!!”

크아아악--!

난데없는 날개 그림자가 사냥대회장의 숲 위로 드리워졌고. 

비명과 신음, 괴성이 연달아 울렸던 것이다.

“저게 뭐지? 이게 무슨?!”

“와이번이다!”

“으아악!! 살려 줘!!!”

사냥 대회에 갑자기 상급 몬스터 와이번이 난입한 것이다.

와이번은 괴성을 지르며 피 흘리는 사냥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냥감들이 흘린 피 냄새가 와이번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와이번이 달려든 곳이, 비토 왕자의 근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비토 왕자는 허리춤에 쏘아 잡은 토끼들을 매달고 있었고.

귀에도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는 상태였다.

와이번으로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극적인 먹잇감인 셈이었다.

카아아악----!!!

“우와악! 살려 줘!!!”

와이번이 달려들자, 대사는 공포로 얼어붙었고.

비토 왕자는 몇 걸음 도망 치지지도 못한 채 엎어져서 꽥꽥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비토 왕자보다 훨씬 어린 파비엘조차 두려움을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파비엘은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어 와이번의 앞을 막아섰다.

“피하십시오!”

캉! 소년은 용감하게 와이번의 발톱을 쳐냈다.

루퍼스리안은 맹랑하게 나서는 열네 살짜리를 보고 혀를 찼다.

‘꼬맹이 주제에.’

그가 막 마력을 일으키려는 찰나.

동시에 루퍼스리안은 예리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 순간.

파파팟---!!!

하늘에서부터 빛살처럼 금빛의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금빛 화살 비는 정확하게 와이번의 날개를 겨냥하고 있었다. 날개가 찢기며, 와이번은 비행 능력을 잃었다.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어, 자신을 공격한 이를 찾았으나.

한발 늦은 시도였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빛 검기가 거대한 반월형을 그려냈다.

그리고.

서걱!

비토 왕자의 얼굴 위로 뜨거운 피가 튀며, 와이번의 목이 단번에 잘려 바닥을 나뒹굴었다.

와이번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직후에야 가벼운 발소리가 땅으로 내려섰다.

흰색 광휘 기사단 복장을 차려입은 소녀의 늘씬한 팔다리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활기차게 고개를 들자, 금빛 고수머리가 햇살 아래 찬란하게 빛났다.

사파이어와 자수정의 아름다운 색만 모아 섞은 듯한 청보랏빛 눈동자가 더없이 생기 넘쳤다.

소녀, 아나트리샤는 장검의 형태를 띠고 있던 아스트라를 다시 팔찌로 바꾸면서 물었다.

“괜찮아? 다친 사람 없지?”

파비엘이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활짝 웃었다.

“예! 황녀 전하!”

루퍼스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내가 양보한 거다.”

“헹. 무슨 소리래. 내가 너무 빨리 잡아서 오빠가 못 잡은 거면서.”

“진짜 양보한 거거든? 동생을 위한 오빠의 마음을 이렇게 모르겠냐?”

아웅다웅하는 남매를 두고.

멍하니 올려다보던 비토 왕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거의 홀린 듯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태양빛 아래 선 아나트리샤의 모습은, 황궁에서 드레스를 입은 모습과는 또 다른 생기 넘치는 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역시 맞잖아. 역시 황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어. 그러니까 날 구해 준……!”

이번에도 비토 왕자의 헛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발음이 다 샌 비토 왕자의 헛소리를 들은 루퍼스리안이 도끼눈을 떴고.

파비엘 역시 순하던 눈빛과 표정을 내던지고, 조금 전 비토 왕자를 일부러 빗겨 쏜 화승총에 손을 댔지만.

그들이 비토 왕자의 입을 막은 건 아니었다.

깡!

맑고 고운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얻어맞은 왕자는 기절해서 앞으로 쓰러졌고.

그 뒤에는 씩씩대며 왕자의 사냥총 개머리판을 휘두른 아마란치아 대사가 서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돼지 왕자가!”

아마란치아의 대사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라를 위해. 

거기에 조금도 사심은…… 없었다. 그렇다, 전혀! 없었다!

아마란치아의 대사가 사방에 사과에 사과를 더하며, 기절한 왕자를 갓 잡은 돼지처럼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아나트리샤만이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사람?”

하지만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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