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3)
아나트리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까 저 돼지 왕자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던 거 아니었어?”
“절대 아니란다, 리샤.”
“그렇습니다. 그냥 돼지가 꽤액거린 것뿐입니다.”
루퍼스리안과 파비엘만이 아니라, 무려, 아마란치아의 대사까지도 동의했다.
“그렇사옵니다! 근처에 돼지가 지나갔나 봅니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내가 제대로 수습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망한다!’
그는 근 10년 가까이 제국에서 상주하며 아마란치아의 외교를 전담해 왔다.
때문에 제국 내 사정에 해박했다.
특히나, 황가 내에서 황녀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존재인지 너무 잘 아는 것이다.
그는 자국의 왕자를 돼지 취급하며 알아서 기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이었다.
그러나 왕자의 망언은 황녀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이대로 덮어지길 바라기엔, 슬프게도 이미 들은 이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아마란치아 대사의 고통은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 자신이 잡은 와이번에 집중했다.
와이번의 사체를 한동안 훑어보던 아나트리샤의 눈이 루퍼스리안과 마주쳤다.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주변에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결계를 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리 사냥 중이라 피가 많이 흘렀다 해도, 제도 근처에 와이번이라니…….”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몬스터가 늘고 있어.”
남매 사이에 의미심장한 시선이 오고 갔다.
그들은 이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에 몬스터의 등장은, 세상의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그때처럼 본격적으로 게이트가 열리고 던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몬스터들의 수뿐만 아니라 힘까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루퍼스리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에 베헤모스를 처리하면서, 멸망의 네 마수는 전부 처리했는데.”
전생에 마왕 소환 직전에 등장했던 네 마리의 대마수들은 이번 세계에도 곳곳에 봉인되어 있었다.
레비아탄의 존재를 통해 이를 짐작한 아나트리샤와 가족들은, 지난 5년간 대륙 전체를 감시했고.
다른 세 마리의 마수를 찾아내어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없애는 데에 성공했다.
놈들을 깨우는 것은 소피아 본인만 가능한 일이다.
혹은 마왕이 소환된 이후에 저절로 봉인 또한 풀리거나.
루퍼스리안은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역시 소피아는 그때 죽은 게 아닐까? 다른 세 마수는 깨어나지도 않았었잖아.”
하지만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오빠도 알잖아. 걔가 얼마나 끈질긴지. 그리고 정말로 소피아가 죽고, 마왕 소환의 가능성이 사라진 거라면 몬스터도 줄어야 해.”
하지만 현 상황은 반대였다.
전 대륙에 걸쳐서 몬스터의 등장 빈도가 잦아지고, 더욱 강한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 가지를 의미했다.
‘어디엔가 살아 있는 거야. 소피아가.’
하지만 세 마수를 모두 처리할 때까지, 소피아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분명해 보였다.
‘회복하기 전에 찾아내서 없애야 해.’
그래야 그녀와 가족들, 이 세계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었다.
그리고.
‘미하일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
아나트리샤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가, 다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 가족들은 더 슬퍼한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오빠는 왜 잡은 사냥감이 하나도 없어? 나는 와이번 말고도 엄청 많이 잡았는데.”
그러자 루퍼스리안은 꽃처럼 곱게 웃어 보였다.
“아, 나는 오늘은 사냥에서 빠지려고.”
“응? 그치만 어제는 분명히…….”
“생각보다 시시해서 말이야.”
사실 그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동물 사냥은 장난 수준이긴 했다. 몬스터라 해도 마찬가지.
아나트리샤는 입술을 삐죽였다.
“나한테 질까 봐 미리 발을 빼려는 거지?”
“하하. 그럴 리가.”
“그래도 어제 내기한 건 안 봐줄 거거든? 이제 한 달 동안 내 머리 묶어 주는 건 금지!”
“……오빠는 슬퍼.”
“오빠도 아빠도! 내가 열일곱 살이나 먹은 건 생각도 안 하지! 지금까지 내 머리 묶어 주겠다니, 말도 안 된다고!”
그렇다.
아나트리샤의 생활 독립 투쟁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었다.
일보 전진했다가 이보 후퇴했다가 삼보 전진하며,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
‘스무 살 되기 전에 완전 독립하고 만다!’
소녀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사냥 안 참여하면 오빠는 이제 뭐하게?”
“아, 할 일이 생겼어. 아마란치아 대사랑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아마란치아? 아, 그러고 보니까 아까 그 돼지 왕자랑 대사가 같이 있었지. 무슨 일 있어?”
루퍼스리안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거의 향기까지 느껴질 정도.
“아무 일 없었어. 하던 사냥 계속해.”
“……? 알았어.”
아나트리샤가 방음 결계를 해제하고 나자.
막혀 있던 주변의 소리들이 일시에 쏟아졌다.
“세상에! 정말 황녀님이셔!”
“이렇게 가까이서 뵙다니, 죽어도 여한이 없어!”
“황자님까지! 아아아. 황자님이 웃고 계셔!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워!”
“꺄악!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주변에 몰려든 이들은 남녀가 따로 없었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면 10대에서 20대까지의 귀족 영애들이 더 많았는데.
그들은 직접 사냥에 나서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눈에서 하트 빔을 내뿜으며, 기사단복을 입은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녀님께선 기사단복이 너무 잘 어울려! 입은 채로 태어나신 것 같아!”
“어흑. 계속 입어 주세요!”
“이걸, 이걸 초상화로 남겨야 하는데…….”
결계가 치워지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광휘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황녀의 첫 번째 기사인 라이언 그랑디오르가 있었다.
벌써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된 그는, 이제 황녀궁의 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하소연을 시작했다.
“황녀님! 제발 호위들을 놔두고 날아가시는 건 그만해 달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하지만 와이번이 나타난 걸 봐서 어쩔 수 없었어. 덕분에 피해가 생기기 전에 내가 제일 빨리 잡을 수 있잖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기사들의 실력으로는 아나트리샤를 호위한다는 건 명목뿐이다.
그녀의 안전은 본인이 가장 잘 지킨다는 걸, 라이언과 기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황녀의 기사였으니까!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를 손에 넣은 영광된 기사들이 아닌가!
아나트리샤는 밝게 웃고는 라이언을 비롯한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 와이번 내가 잡은 사냥감들에 더해놔! 잘 관리하고 있어야 해?”
“제발 기사들을 황녀님이 잡아 오신 사냥감 정리하는 종자로만 쓰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해도, 안 들으시는군요.”
아나트리샤는 “헛! 저기 곰이!” 하는 말과 함께 또 붕 날아올랐던 것이다.
사방에서 소녀들의 비명이 울렸다.
“꺄악! 황녀님이 날아오르셨어!”
“금색 날개라니! 멋져!!”
라이언은 어쩐지 지치고 낡은 표정으로 금빛 새처럼 순식간에 작아진 황녀를 보았다.
부하들에게 와이번 시체를 갈무리하라 이르고, 본인은 다시 황녀를 쫓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어이. 레오.”
“예?”
왠지 모르게 계속 조용하던 루퍼스리안이 그를 불렀다.
동생이 자리를 뜨자마자였다.
그리고 다가온 라이언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조금 전에 그가 본 천인공노할 상황에 대해.
“……!”
이를 듣고, 라이언 그랑디오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퍼스리안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뭐라고 말할지 알지?”
“굳이 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
굳이 구체적인 작당이나 모의는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을 통해 비토 왕자가 벌인 일은 조용히 알려졌다.
비토 왕자는 라이언에게 사소한 꼬투리를 잡혀 결투 요청을 받았고. 작신작신 얻어맞아야 했다.
왕자가 직접 황족들에게 항의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대한 항의는 황제 선에서 묵살되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국은 올해 아마란치아산 마력 결정에 엄청난 관세를 부여했고.
아카데미의 학자들은, 남부 몰론토 공국산 마력 결정이 아마란치아산 못지않은 성능을 가졌다는 걸 발표했다.
거기에 제국 에아루스령에서 저렴한 가격에 수출하던 곡물을 아마란치아에만 수출 제한을 두면서, 아마란치아는 어마어마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 누구인지 대사는 잘 알고 있었다.
대사는 자국의 국왕에게 직접 달려가 이 사태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 결과, 비토 왕자는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왕위 계승권을 잃고 말았다.
“어, 어째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아마란치아의 조치가 전해지자 왕국에 가해지던 제재와 압박은빠른 시일 안에 끝났지만.
비토 왕자의 실각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비토 왕자만 본인만이 끝까지 몰랐다.
***
“흥. 흐으흥.”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안에 든 화관을 흔들었다.
이건 어제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고 받은 부상이다.
온실에서 미리 키워 낸 봄꽃들을 엮어 만든 생기 넘치는 화관. 마력 처리가 되어 있어서, 진짜 봄이 올 때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꽃들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내가 우승하고 화관을 얻었을 때.
온 사방에서 기대 어린 눈빛이 날아들었다.
“황녀님, 그러면 화관을 어느 분께 드리시겠습니까?”
이 말에, 어째선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냥대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눈을 빛냈다.
무려. 예정과 달리 엄마와 아빠까지 오셨다.
다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와 내 손에 들린 화관을 보고 있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전쟁터 못지않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