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4)
내가 입을 달싹, 한 순간 사냥대회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다들 입을 다물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내 입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번 사냥 대회에 참여한 모든 인원이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최고로 격렬한 사람들은 단연, 우리 가족이었다.
“내 딸은 당연히 나에게 화관을 줄 거야!”
“저거랑 클로버 화관이랑 같이 장식해 두고 자랑해야지!”
“두 분은 참석 안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난 리샤한테 저거 받으려고 모든 사냥감을 다 양보하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이러다간 진짜 싸움 날 상황이어서.
나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환하게 웃으며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당연히 화관은 내 거지!”
이렇게 말하며 재빠르게 내 머리 위에 화관을 얹었다.
그러자 대회장 안을 진한 아쉬움이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실망감은 빠르게 사라졌다.
내가 가족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잘 어울리지 않아요? 엄마, 아빠, 오빠?”
그러면서 엄마와 아빠의 팔짱을 동시에 끼웠고. 오빠에겐 작게 소리 없이 덧붙였다.
‘나 머리 묶는 거 한 달정도는 다시 허락해 줄게!’
그러자, 가족들은 재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뭐, 확실히 우리 아가가 아니면 누가 화관의 주인이 되겠어.”
“맞아요. 리샤가 좀 강하고, 멋지고, 귀엽고, 예쁘고 혼자 다 한다니까요!”
“맞아. 맞아. 내 딸의 머리 위에 있는 게 화관의 행복이기도 할 테니까.”
가족들이 이렇게 말하자, 다들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화관의 주인으로 황녀님이 가장 잘 어울리시는 건 사실이죠.”
“하긴 다른 누가 우승했더라도 황녀님께 화관을 바쳤을 테니까요.”
“……그 꼴 보는 것보다는 역시 리샤가 가지는 게 낫긴 해.”
중간에 오빠가 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렇게, 사냥대회는 큰 소란 없이 평화롭게 끝났다.
***
그리고 지금.
나는 어제 스스로 내 머리 위에 썼던 화관을 손끝으로 건드려 보았다.
사실 이걸 받았을 때, 처음 떠오른 얼굴이 있긴 했던 것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가족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미하일.’
아직도 잠들어 있는 그 잠꾸러기 녀석 말이다.
지금 나는 황궁 외곽의 한 방 앞에 서 있었다.
하스티아에서 옮겨온 미하일이 묵고 있는 방.
5년째 방 주인이 잠만 쿨쿨 자고 있는 그 방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나스카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들은 5년 전 미하일이 나스카 성과 함께 통째로 사로잡힐 때, 따로 탈출시켰던 이들이다.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이 되자, 미하일은 얼마 남지도 않은 힘으로 일족부터 피신시켰던 것이다.
하스티아에서의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그들의 소재가 확인되었고.
이들은 내 배려로 황궁에서 미하일의 곁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애초에 나스카인들의 숫자 자체가 얼마 되지 않고, 황궁에는 빈방이 넘치니까. 뭐.
“잠깐 미하일의 얼굴을 좀 보러 왔어.”
“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자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는 나스카의 장로였다. 그는 거의 미하일을 대하듯 나에게 깍듯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자, 안에는 나 홀로 남았다.
아니, 단둘만 남았다.
나와, 잠든 미하일.
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 가며 침대로 다가갔다. 혹시 내 큰 발소리를 듣고 그가 깨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침대에는 5년 전과 조금도 변화 없이 잠든……, 아니, 좀 달라진 모습으로 잠든 미하일이 있었다.
언뜻 이 방은 5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서 빗겨 나가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걸, 매일같이 들른 나는 알 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만큼 길게 자란 미하일의 검은 머리카락이 베갯잇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다.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동안에도, 미하일은 꾸준히 성장했다.
이제는 18, 19세 정도로 보이는…… 완연한 청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생의 미하일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다.
나스카의 장로나 궁의들은 미하일의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래도 아예 눈을 뜨지 못하시던 때보다는 훨씬 상태가 나으십니다. 그땐…… 성장조차 거의 못하셨으니까요.”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계시다는 건, 그 정도 여력은 있으시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 예측이 사실이길 바랐다.
미하일=시스템이 살아 있다면 그의 시스템 정보를 확인해서,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그에게 돌려주었으니까.
5년 전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에러 난 시스템 메시지나 그로 인한 스킬(궁예스킬 등)을 다시 보거나 사용하지 못했다.
내가 미하일의 영혼 조각과 시스템, 마력을 다시 돌려준 것이 효과가 있어서이길.
지난 5년간 몇 번 했는지 감도 오지 않는 바람을 다시 속으로 되새기며.
나는 어쩐지 아련한 기분으로 미하일의 앞에 앉았다.
미하일의 머리맡에는 거의 내 전용이 된 의자가 놓여 있었다.
미하일의 신변을 돌보는 나스카인들도 이 의자를 치우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거기 앉아서 들고 온 화관을 미하일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운 자세라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의 머리를 살짝 들어올린 다음, 화관을 머리 위에 올렸다.
“…….”
잘 어울렸다.
전생에도 한 생각이지만, 잘 생겨서 그런지 꽃도 잘 어울렸다.
내가 왜 화관을 받고 미하일을 가장 먼저 떠올린 건지 알 것 같았다.
제일 어울릴 사람이니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여러 각도를 확인했다.
어느 각도로 봐도 예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병의 꽃을 바꿔 줄 게 아니라, 늘 화관을 만들어다 씌워 줄 걸 그랬나.
그러면 진작 일어났을까?
나는 미하일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언제 일어날 거야?”
툭,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말이 튀어나왔다.
“환생하고 처음 볼 때도 비슷했었지. 기억나? 아예 관 속에 누워서 나타나서는……,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렇다. 무슨 잠자는 관 속의 왕자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더니 또 깊게 잠들어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울렁거릴 정도로.
왜 이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 체하기라도 한 건가, 나?’
하지만 언제부터 이런 상태인 건지는 알고 있었다.
미하일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그때부터 미하일을 떠올리거나 볼 때면, 가슴께에 무거운 돌이 콱 틀어박힌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명치 근처를 눌러 보았다.
진짜 체한 건 아닐 텐데.
‘5년 내내, 그것도 미하일을 볼 때만 체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정말이지 답답했다.
원래도 고구마를 싫어하는 난데, 미하일과 관련되면 일이 시원시원하게 해결이 안 된다.
그걸 생각하면 아무리 전생을 기억해도, 짜증이 나거나 미하일이 미워질 법도 한데…….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하긴, 얘가 뭔 죄라고.’
오히려 고생만 죽도록 했지. 그동안 원망한 걸 떠올리면, 차라리 미안해야 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충분히 미안해할 기회도.
사과할 기회도.
눈을 떠야 내가 미안해하는 걸 보고, 사과도 들을 게 아닌가.
영원히 용서 못 하고 어쩌고 운운한 흑역사를 좀 수정할 기회를 달란 말이야.
하지만 미하일의 앞에서 화관 하나 씌워 주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동안.
미하일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지난 5년간 그랬던 것처럼.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푹, 앞으로 엎어졌다.
미하일의 가슴팍 위에 얼굴을 대고 한숨을 폭폭 쉰다.
귓불이 그의 가슴팍에 닿아 있어서일까.
귓전에 심장 소리가 울렸다. 미하일의 심장이 뛰는 소리.
두근두근두근.
미하일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전생에 그가 한 고백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내가 떠올린 기억에 놀라기라도 한 걸까. 혹은 미하일의 심장 박동이 여전히 귀를 두드리고 있어서일까.
내 심장 소리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려댔고.
얼굴에 피가 몰려 발갛게 달아올랐다.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면, 뭔가 불안한 건가? 내가 불안해할 일이 있나?
하지만, 이 두근거림은 불안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차라리?
내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미하일의 얼굴이 보였다.
날렵한 콧날과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
여전히 깊이 잠든 왕자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자는 공주님을 깨우는 건 왕자님의 키스였지. 그러면 잠자는 왕자님은?’
왜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잠깐 미쳤던 게 아닐까.
이상하게도, 믿기 힘들 정도로, 이때의 나는 그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5년이나 기다리다가 조금 지쳐서일지도.
‘사실 황녀도…… 공주 아닌가?’
큰 차이는 없는 거 같은데.
사실 다른 데 가서 공주를 끌고 올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공주를 데려다가 미하일에게 뽀뽀하라고 시킬 생각을 하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체한 건지 아닌지 헷갈리던 기분이나,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싫었다.
딴 공주가 미하일에게 뽀뽀하는 걸 보는 건.
진짜 싫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 갑작스러운 충동에 몸을 맡기고 만 것이다.
촉, 하고 가벼운 소리가 고요뿐인 방 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