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5)
첫 뽀뽀의 감상은 간단했다.
‘부드러워…….’
그리고 나는 곧 벼락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친 건가?
뒤늦게 정신이 들자,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제 서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 그래. 일단, 일단 저질렀으니까(?) 진짜 일어나나 확인은 해야…….’
어째선지 정말 모르겠지만, 조금 전 도둑 뽀뽀하기 전에는 잘만 들여다봤던 미하일의 얼굴에 시선을 두기 민망했다.
얼굴을 넘어 온몸이 홧홧하고, 부끄러워서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참고 안절부절못하면서 미하일의 상태를 지켜봤다.
공주님의 키스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리고.
“…….”
한참을 기다렸지만.
미하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깊이 잠든 모습 그대로.
나는 실망한 건지 안도한 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미하일이 일어나지 못한 건 아쉬운데.
한편으로는 지금 내가 한 어이없는 짓을 그에게 들킬 일 없다는 건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진짜 바보 같은 짓을…….
‘우아악!!! 꺄악! 아악!’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면서 소리 없는 비명이 내 안에서 아우성쳤다.
미하일이 깨어나지 않는 게 확인되고 나자, 뒤늦게 현실 감각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미쳤지, 미쳤어!’
이게 다 공주가 어쩌고 왕자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떠오른 탓이야.
아니, 전부 미하일이 전생에 한 고백 때문이다!
그래. 그래서야!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붕붕 흔들며, 그대로 도망치듯 미하일의 방을 빠져나왔다.
***
아나트리샤가 새빨개진 얼굴로 방에서 도망치듯이 사라진 직후.
이불 위에 늘어진 미하일의 손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
하지만 이것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으, 응?”
놀라서 고개를 들자, 앞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코넬이 있었다.
그렇다. 코넬 가르텐.
겉바속촉의 다루기 쉬운 꼬맹이 코넬 역시 나와 같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이젠 나보다 키도 꽤 커졌고, 원래도 길던 머리는 이제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얘가 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더라?
시기상으로는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한 뒤였던 것 같은데.
“코넬은 머릿결이 진짜 좋네.”
지나가듯이 한 말이었는데, 코넬은 막상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그때부터 머리를 한 번도 안 잘라서 저 길이까지 온 것이다.
찰랑찰랑, 남빛 머리카락이 비단실처럼 하늘거린다.
나는 내가 내내 멍해 있던 이유를 감출 겸, 떠오르는 대로 대답했다.
“아, 그냥, 네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이런 생각 하고 있었어.”
“크, 흠. 음흠. 지금 저희는 올해 워프 포탈 수출량에 대해 상의 중이었으니…… 그쪽에 좀 더 집중을 해 주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면서도 코넬은 어쩐지 조금 뿌듯한 태도로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옆에서 아멘다가 코넬의 그런 태도를 흰 눈으로 보고 있었다.
<궁예> 스킬은 이제 못 쓰지만 안 써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어디서 우리 황녀님 앞에서 수작질이야!’
대충 이런 생각 중인 게 분명했다.
이젠 <궁예> 스킬은 못 쓰지만, 몇 년 동안 스킬로 속내를 봤던 경력이 있어서인지.
내 예상이 99% 맞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겉바속촉 꼬맹…, 아니, 애송이가 된 코넬 역시.
‘쳇. 훼방을 놓다니. 저러려고 핑계 대고 남아 있었던 게 분명해.’
대충 이런 느낌일 거다.
거참. 여전히 귀여워라.
쟤는 언제쯤 나에 대한 마음이 착각인 걸 깨닫고 제 짝을 찾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방심하고 있던 찰나.
내내 고민하는 표정이던 코넬이, 마침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폭탄을 던졌다.
“황녀님. 곧 있을 봄의 축제에서 첫 춤을 출 파트너로, 저를 선택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어?”
***
봄의 축제는 얼음이 녹고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봄의 시작을 축하하며 열리는 무도회였다.
이 무도회를 시작으로 사교 시즌이 시작되기에, 그 해에 사교계에 데뷔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무도회에 참여해야 했다.
그야말로,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도회!
제국인들은 열일곱 살을 성인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때 첫 춤 상대로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엄청나게 중요했다.
이때의 파트너는 가족이 아닌 이성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진 이를 파트너로 정하거나, 파트너가 되면서 깊은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이런 소문이 돌 정도였다.
‘17세의 봄의 축제 때 첫 춤 상대와 결혼하면 행복해진다.’
그러므로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이들이 17세가 되었을 때, 봄의 축제 파트너로 누구를 택하느냐는 꽤 화제가 되곤 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가르텐 소공작 코넬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나트리샤 황녀가 17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교 모임이 있는 자리,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이 화제로 떠들어대곤 했다.
“대체 황녀님의 첫 춤 상대는 과연 누가 될까?”
“역시 함께 17세 봄의 축제를 맞이하는 가르텐 소공작 아닐까?”
“확실히 몇 년 전 황녀 전하의 첫 파티 때 소공작이 은종을 울리기도 했었지.”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야. 나는 그랑디오르 공작이라고 확신해! 공작은 17세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봄의 축제에서 춤을 춘 적이 없어!”
“그러고 보니까 맞네. 그때 꽤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어.”
“혹시…… 황녀님이 17세를 맞이하시길 기다린 건 아닐까?”
“꺄악!”
이 두 명에 비해서는 미는 이들이 조금 적긴 했지만, 또 다른 한 명도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파셀 백작가의 막내 공자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하긴 어릴 때부터 황녀님께서 그렇게 예뻐하셨다죠.”
“부모도 모두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측근이고요.”
“황녀님의 기사가 되겠다고 아주 열심이라고 하던데요.”
곳곳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사이.
이 불온한 소문들은 황족들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아나트리샤가 조금 늦게 참석하게 된 식사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올라왔던 것이다.
루퍼스리안의 손에 들린 유리잔에 금이 갔다. 쩌적! 잔 속의 물이 급격하게 얼어붙으면서였다.
“저는 어느 쪽이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딜 감히 우리 리샤에게!”
“맞는 말이야. 우리 아가의 봄 축제 파트너라니, 10년, 아니 100년은 일러!”
황제의 손 안에서는 반대로 물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고.
그 옆에서 남편과 아들의 팔불출 짓에 황후는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나라면 몰라도 말이지.”
파지직!
평소에는 더없이 사이가 좋지만, 아나트리샤를 두고 경쟁할 때만은 치열한 세 가족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평소라면 이 셋만이 쟁탈전에 참여할 텐데, 오늘은 여기에 한 명이 더 끼어 있었다.
“아니, 어제 태어난 애가 벌써 첫 춤 파트너를 정해서 사교계에 나간다고?! 말도 안 된다! 이 할애비는 용납 못 해! 하스티아에는 그런 풍습이 없단 말이다!”
그렇다.
레비아탄이 소멸한 뒤, 하스티아의 사정이 꽤 안정되었고.
워프 포탈 덕분에 빠르게 오갈 수 있게 되어, 이번에는 크눔펜 국왕까지 여기 끼어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분노에 불을 더 붙이는 소식이 도착했다.
황제의 시종장이 낮게 아뢰었기 때문이다.
“가르텐 소공작이 조금 전에 황녀 전하께 봄의 축제 첫 춤 파트너가 되어 주시길 청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뭣이라?”
“뭐!”
만찬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1도 내려갔다.
***
“으으음.”
나는 한숨을 쉬며 종종걸음으로 본궁으로 향했다.
오늘은 가족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회의가 늦어져서 가족들을 기다리게 해 버렸다.
‘할아버지도 오셨다고 했는데!’
살짝 기분이 묘했다.
나는 중얼거리면서 빠르게 걸었다.
혼잣말은 아니었다. 수행원들이 뒤로 줄줄이 따라오고 있어서, 그들과 가볍게 대화를 할 겸이었다.
“코넬 걔는 또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민망하게.”
그러자 등 뒤에서 시녀들의 의견이 갈렸다.
“가르텐 소공작이면 나쁘지 않죠.”
“전 반대에요, 우리 황녀님껜 부족하다고요!”
그 와중에 전혀 예상 못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는 조금 분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라이언?”
살짝 고개를 돌리자, 라이언이 의뭉스럽게 웃으며 오늘 벌써 두 번째 폭탄을 나한테 던졌다.
“가르텐 소공작에게 선수를 빼앗겼으니 말입니다.”
“엥?”
예상 못 한 말에 내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러자, 라이언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폭탄을 완성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제가 먼저 황녀님께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봄의 축제 첫 춤 상대, 저는 어떠십니까?”
“……엉?”
***
푸드득!
황궁 안에서는 종종 전서구가 바삐 날았다.
출발지는 황궁 곳곳 혹은 제도 안 여러 곳이지만, 그 목적지는 딱 세 곳뿐.
바로 황제와 황후, 황자.
이번의 전서구는 황후에게로 향하는 것이라, 시녀 중 한 명이 받자마자 시녀장에게 재빠르게 알렸다.
그리고 이 소식은 바로 황후의 귀에 들어갔다.
“뭐? 그랑디오르 공작도 우리 아가에게 봄의 축제 첫 춤 신청을 했다고?”
“……!”
“미친! 라이언 그랑디오르, 이 자식이 감히!”
루퍼스리안은 잠시 레오라는 애칭을 가져다 버렸고.
만찬장의 공기는 1도 더 차가워졌다.
하지만, 아직 기온이 내려갈 일은 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