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1화 (192/218)

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6)

***

본궁 만찬장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객관적으로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10분이면 가는 거리니까.

그런데 이 짧은 거리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길고 험난하게 느껴졌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저어, 황녀님. 이렇게 뵙게 되오니 영광인…….”

“드디어, 뵙다니……!”

하나같이 꽃을 손에 든 채, 10대 중반부터 후반 사이의 영식들이 차례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무슨 용사를 쓰러뜨리기 위해 가는 길을 막고 있는 몬스터들도 아니고!

이들의 목적은 전부 같았다.

‘부디 저를 봄의 축제 첫 춤 파트너로 선택해 주십시오!’

누가 짜기라도 한 건가?

나는 드물게 진심으로 당황했다.

***

이번에는 전서구를 확인한 카렐만이 루퍼스리안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황녀 전하의 봄 축제 파트너에 지원하는 자들이 정원에 줄을 늘어섰다고 합니다.”

“뭐라고?! 이것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루스템의 고귀한 황족 3명 + 하스티아의 고귀한 국왕의 맹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그 누구의 이견도 없이 고귀함, 부귀함, 권력으로 손에 꼽힐 가족들은 우르르 달려 나갔다.

바로, 그들의 소중한 보물을 노리는 도둑놈들을 박멸하기 위해서였다.

황궁 정원에서 우당탕탕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아나트리샤는 가족들을 말리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

“으아아. 정말이지……. 아빠랑 오빠는 그렇다고 치고, 엄마랑 할아버지까지 그러실 줄은 몰랐어!”

“큰 난리가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피오나 이모 특제 레몬 셔벗을 바삐 입 안에 넣었다.

새콤하고 사각사각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아, 역시 이모 솜씨는 최고야. 여름이 아닌데도 셔벗이 이렇게 맛있다니. 역시 이모라니까.”

맞은편에 앉은 피비, 그러니까, 파비엘 파셀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모를 닮은 곱슬곱슬한 다갈색 머리카락이 꼭 곰돌이 인형 같았다. 맑은 갈색 눈동자도, 곰돌이 인형에 박힌 유리알을 닮았다.

나는 헤죽 웃고는 손을 뻗어 피비의 머리를 쓰담쓰담하며 흩트려 놓았다.

아, 보슬보슬해.

“오구오구, 우리 피비.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해?”

그러자 피비는 살짝 불퉁한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저도 벌써 열네 살이에요, 황녀님. 내년에는 기사 서임도 예정되어 있는데…….”

어쭈.

이젠 다 컸다고 반항하는 건가?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음. 하지만 피비가 귀여운 건 사실인걸? 내가 귀여워해 주는 거 싫어? 난 좋은데.”

“…….”

그러자 피비의 아직 동그란 뺨이 살짝 붉어졌다.

“싫진…… 않아요. 아니, 기뻐요.”

하긴. 귀여움받는 걸 싫어하는 애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어릴 때의 나는 예외다. 두 살 때도 이미 알맹이는 20대 중반이었다고!

지금 나는 봄 축제 파트너 문제로 난장판이 된 황궁을 잠시 탈출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나에게 파트너 신청을 해 보겠다고 줄을 서는 영식들도 귀찮고.

그에 일일이 분기탱천해서 소란을 만드는 가족들을 피해서 온 거기도 했다.

이모를 보러 왔더니,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다고 해서, 파비엘 혼자만 만나게 되었지만.

내 한숨에 피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그거 사실인가요?”

“응? 뭐가?”

“봄 축제 때 황녀님 파트너가 되고 싶어서 황궁에 줄을 선 사람들이 본궁에서 황후궁을 넘어 황녀궁 앞에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거요.”

“……그 정도로 소문났어?”

그 정도는 아닌데.

물론 그 절반 정도는 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도망 왔지.

“네. 그러고 보니까 그 파트너 신청하는 사람들 중에 영애들도 좀 있다고 하던데.”

“…….”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내가 사냥대회 때 처음으로 기사단복을 입고 나갔었는데, 그때 왠지 모르게 초음파 비명을 지르는 영애들이 많았었다.

그들 중 몇몇이 황궁 정원에 진을 친 무리 중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파비엘은 순진한 얼굴로 내 앞에 산딸기 마카롱을 놓아주며 말했다.

“많이 시달리셔서 그런가. 피곤해 보이세요. 자 여기 황녀님이 아주 좋아하시는 어머니 특제 산딸기 마카롱이에요.”

“아, 고마워. 냠. 크흐! 역시 이모 디저트는 힐링이야.”

피비는 사근사근하니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들 황녀님을 좋아하고 존경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응. 알아.”

“물론 그 중에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들이 없는 건 아닐 테니, 물론 최소한의 주의는 하셔야겠지만요.”

“응응.”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피비는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은근하게 말을 꺼냈다.

“지금처럼 난리가 나는 건, 사실 황녀님의 파트너가 정해지지 않아서긴 하죠.” 

“그렇긴 하지.”

“차라리…… 빨리 확정지어 버리시는 건 어때요? 지금처럼 소란스러울 일이 없게요.”

“으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피비는 수줍게 웃으면서 본론을 꺼냈다.

“저는…… 어떠세요?”

이것으로 나는, 오늘 가족 외에 만난 모든 소년 및 청년들에게 파트너 요청을 받는 위업을 이루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내가 대답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귀신같이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 안 됩니다!”

“……님! 어머니를 봐서라도……!”

“으악! 막아!”

쾅! 쿵쾅! 하는 소음에, 사람 몇이 어딘가로 날아가는 듯한 비명이 울렸고.

피비는 “쳇.” 하고 불만 어린 반응을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쾅!

콰득! 

아, 진짜 경첩이 부서져서 문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씩씩대며 문을 부수고 쳐들어온 건,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파비엘 파셀! 이 도둑고양이 같은 놈이!”

“하아. 형님들로는 황자님을 막는 건 역시 역부족이었나요.”

부서진 문 바깥쪽 복도에는 파비엘의 형 세 명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일하게 얻어맞거나 날아가지 않은 건,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는 피오나 이모뿐이었다.

피오나 이모는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아아. 막내를 응원하려던 우리 가족의 계획이…….”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아, 죄는 진짜 안 지었는데?

세상을 구하는 걸 한번 실패한 대가가 이런 건 너무하지 않아?

코넬.

라이언.

그 밖에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기타 등등에 이어.

동생처럼 생각하던 귀염둥이 피비까지…….

그 모두가 내 첫 춤 파트너를 하겠다고 이 난리라니.

게다가 그것 때문에 오빠를 비롯한 가족들도 전부 시끄러웠다.

오늘 하루가 너무 길었다.

너무 파란만장해서 피곤했다.

결국, 나는 버럭 외치고 말았다.

“안 해! 춤 안 춘다고! 절대 춤 안 출 거고, 아예 파트너 신청 안 받는다고 공표해 버릴 거야!!!”

***

그렇게 나는 겨우 평화를 얻을 수 있었……, 을 리 없다.

제국 내부의 지원자들만으로 끝이 아니었던 거다.

“아마란치아의 2왕자입니다. 얼마 전에는 저희 형님이 크나큰 결례를 저질러,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렐로아 왕국의 3왕자입니다. 흠모하던 황녀님을 뵙게 되니…….”

“몰론토 공국의 첫째 공자입니다. 이번에 공국이 큰 은혜를 입은 데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각국에서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왕자나 공자, 혹은 조카 등등등을 보내 왔던 것이다.

온갖 핑계를 대고는 있었지만, 목적은 같았다.

‘내 파트너 자리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내 한숨만 더더욱 늘 뿐이었다.

내 결론은 같았다.

“다들 봄의 축제 연회를 잘 즐기고 돌아가도록. 제국 내에서 좋은 인연을 이어갈 파트너를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대놓고 말했다.

‘난 안 해!’

그렇다. 

17세의 봄의 축제 무도회니 뭐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무도회는 매주 열리고, 내가 죽을 때까지 참여해야 할 무도회 숫자는 별처럼 많을 텐데.

나는 이번엔 그냥 벽의 꽃이 뭐냐, 그냥 벽과 합체해 버릴 예정이었다.

‘……그랬는데.’

분명히 그럴 예정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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