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7)
‘이번 봄의 축제 무도회에서 나, 아나트리샤 루스템은 댄스 파트너를 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공표하고 나자.
당연히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다.
특히나, 나에게 직접 파트너 신청을 한 소년들이라든가.
아직 그 자리에 미련을 못 버린 타국의 왕자들이라든가 하는 무리들로부터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단단히 굳힌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나는 한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 인간 소나무다 이거야!’
전생에도 현생에도 사철 푸르른 나는, 내가 한 말을 보란 듯 직접 몸으로 실천해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랬는데.
그럴 예정이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지금 나는 멍하니 무도회장 가운데에서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었는데도 몸은 배운 스텝을 알아서 따라가고 있었다.
빙글, 한 바퀴를 돌자.
나의 파트너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사과가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
아니, 그에게서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에 가깝다.
나는 울컥하는 걸 억누르며, 조금 목이 멘 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린 건 아니지만…….”
“정말? 조금도 안 기다렸어?”
이렇게 묻는 미하일의 눈빛이 마치 사슴 눈망울처럼 슬퍼 보여서, 나도 모르게 변명하듯 빠르게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 기다리긴 했어! 오죽했으면 매일 너 누운 방에 갔는…….”
아니, 이게 아니라!
말이 자꾸 헛나오고, 혀가 마비되고, 뇌가 꼬이는 것 같다.
얘가 일어나면 꼭 해야지 하던 것이 아주 많이 있었다.
그러나 같이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 중에, 지금 이건 없었다.
봄의 축제, 첫 춤의 파트너라니.
내 입으로 두말을 하게 된 셈인데.
그런데.
그런데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너무 기뻤다.
***
“세상에, 황녀님은 분명히 춤을 안 추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그래서 제국 내 소년들만이 아니라, 전 대륙의 소년들이 슬퍼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랑디오르 공작에 가르텐 소공작에, 파셀 백작가의 막내……. 이름난 청년이나 소년들은 전부 청했다가 거절당했다던데.”
“그러니까요. 그 소식을 듣고 저희 조카는 턱도 없겠구나 했죠.”
“오로지 황녀님 때문에 이번 연회를 노리고 온 왕자랑 공자들만 다섯은 된다고 하던데.”
“역대급이라더라고요.”
그랬다.
역사적으로 봐도 봄의 축제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의 파트너 요청을 받은 레이디는 이제까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특이한 건, 그렇게 많은 요청을 받았으면서, 전부 거절하겠다고 아예 공표까지 했다는 사실이다.
황녀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무릎을 꿇을 소년들만 모아도 성이 꽉 찰 텐데.
그런 선망의 눈길을 다 외면하고 스스로 벽의 꽃을 자처하다니.
더군다나 제국의 황녀가 그런 것은 예가 없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덕분에 안 그래도 쏠려 있던 사방의 관심이 황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말로 황녀가 봄의 축제에서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을 것인가!’
이것을 두고 암암리에 내기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춤을 춘다, 안 춘다.
춘다면, 과연 누구와 출 것인가.
정신없이 쏟아지는 관심과 말들 사이에서, 아나트리샤는 혼자 평온했다.
봄의 축제가 시작되고.
첫 춤을 위한 음악이 시작되려는 찰나.
모두가 황녀만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황녀를 말이다.
그런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아나트리샤가 연회장의 구석을 보더니 벌떡 일어난 것이다.
황녀가 드물게 보여 주는 진심 어린 감정이었다.
놀라움과, 기쁨.
황녀의 시선 끝에는, 낯선 청년이 서 있었다.
이국적인 긴 검은 옷자락과 망토가 눈에 띄는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공자인데.”
“하지만 엄청나게 눈에 띄는 사람인데요?”
그 말대로였다.
청년은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외모를 가졌으니까.
짙은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렸고.
흰 얼굴은 베일 듯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 선의 조합이 그려 낸 이목구비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징적이고 아름다운 건, 그의 눈이었다.
금색의 눈은 기이하게도 세로로 긴 동공을 가지고 있어, 극히 이질적이었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이 청년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고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나스카의 왕자예요! 왜 있잖아요, 전에 관에 담겨 왔던 그 소년!”
“아! 황녀 전하께서 저주를 정화해 주셨던!”
“그때 그 어린 소년이 벌써 저렇게 자란 건가요?”
“저렇게 아름답게…….”
보는 이의 눈을 절로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야말로 마력에 가까운 미모였다.
그에게 호감이 없는 이들조차 그저 미모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 들게 된다.
언뜻 봐도 보통 청년이 아니었는데,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그’ 나스카의 왕자라니. 그를 둘러싼 신비로운 분위기가 더 깊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미하일은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한쪽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당연히 그쪽에는 벌떡 일어선 아나트리샤 황녀가 있었다.
미하일 왕자는, 연회 전 조금이라도 용기가 있는 소년과 수많은 청년들이 했던 일을 답습했다.
“황공하오나, 황녀 전하. 첫 춤의 파트너가 되는 영광을 제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주변의 시선이 황녀와 왕자에게로 모였다.
과연 황녀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첫 춤을 추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정말로 지킬 것인가.
혹은 뜻을 꺾을까.
모두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얼마나 집중했는지, 이 거대한 규모의 연회장 안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황녀가 왕자가 내민 손을 맞잡았을 때.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이 그림같이 잘 어울린다는 감탄.
혹은, 황녀에게 이미 거절당한 영식들의 쓰린 한숨.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이 와중에 확실한 게 있었다.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그 말대로였다.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봄의 축제 연회장 안.
무수한 사람들 중 가장 불만스러운 표정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회장 가운데에서 미하일과 춤을 추고 있는 아나트리샤의 하나뿐인 오빠였다.
제국 유일의 황자이자, 하스티아의 왕손.
대륙 전체를 다 뒤져 봐도 첫 손에 꼽히는 최고의 신랑감.
루퍼스리안 루스템.
당연히 그의 주변에도 인파가 엄청나게 모여 있었다.
17세는 예전에 지났지만, 아직도 루퍼스리안의 첫 춤 상대를 노리는 영애들.
조금이라도 그와 친해지고 싶은 영식들.
한마디라도 걸어 보려고 애를 쓰는 인파의 가운데에서, 루퍼스리안은 심기가 엄청나게 불편했다.
그는 손에 든 샴페인을 단번에 마셔 버리고는 속에서 타는 불을 삭혔다.
‘이래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 ‘처음부터’는, 이번 생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전생에 미하일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쭉 유지되어 온 인상이다.
‘딱 한눈에 봐도 도둑놈이 될 상이었지.’
그래서 초지일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런데 내 손으로 저놈을 도와 주게 되다니…….’
그렇다.
미하일이 연회장으로 소란 없이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이가 바로, 루퍼스리안이었던 것이다.
어제.
루퍼스리안은 멀쩡한 얼굴로 일어난 미하일을 만났다.
“너! 언제 일어난 거야?!”
“조금 전이야. 공주님께서 깨워 주셔서 말이지.”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아주아주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하일이 일어났다면 동생이 먼저 알 텐데. 그런 소리는 못 들었다.
“아, 리샤는 몰라.”
“그 입으로 지금 감히 누구 애칭을 함부로!”
“아? 그러면…… 서나는 몰라.”
“그 이름은 더 안 돼!”
전생처럼 미하일은 단번에 루퍼스리안의 속을 여러 번 뒤집어 놓았다.
거기에 미하일은 한술 더 떠서 요구했다.
내내 잠들어 있던 놈이 어떻게 안 것인지, 봄의 축제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거기에 아나트리샤 몰래 들어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기까지 했다.
“나를 좀 도와줘.”
“내가 왜?”
미치지 않았는데 도와줄 리가, 라고 생각하는데.
이어진 말에 루퍼스리안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빚이 하나 있잖아? 아, 혹시 기억 못 하나?”
“…….”
루퍼스리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