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3화 (194/218)

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8)

전생에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루퍼스리안이 미하일에게 빚을 졌다기보단, 반대 아닌가?’

아나트리샤조차도 그렇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미하일은(정확히는 그에게 강림한 마왕이지만) 전생의 루퍼스리안, 즉, 안서운을 죽였으니까.

그러나 당사자인 루퍼스리안은 미하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눈매를 곱게 휘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군.”

루퍼스리안은 아니라고 잡아떼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미하일은 환하게 웃었다.

조금 전의 의뭉스러운 표정이나 무언가를 꾸며 낸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기쁨과 뿌듯함만이 드러났다.

“네 부탁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녀만은 지켜 냈으니까.”

저 말은 전생에 안서운이 미하일에게 했던 부탁과 같은 내용이었다.

[만일 서나가 위험해지면 나나 너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서나만은 지켜 줘.]

미하일은 그러겠노라 말했고.

당시 안서운은 미하일이 자신의 부탁 역시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죽었다.

하지만 아니라는 걸, 지금의 루퍼스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안서운과 미하일 모두를 희생시켰지만, 어쨌건 그의 여동생만은 지켜 냈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두 번째 생까지 만들어 냈다.

그걸 생각하면, 안서운도 루퍼스리안도 미하일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부정할 길이 없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동생이 저 도둑놈 같은 자식을 여기까지 데려와서 옆에 두는 걸 막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당사자가 뺀질뺀질한 얼굴로 일어나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배알이 단단히 뒤틀리지만, 저 요구를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순히 미하일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이나, 환생이 그 덕분이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퍼스리안은 이미 봐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애가 울었다고!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울었었어!’

그렇다. 미하일에 대한 진실을 알고 아나트리샤는 하루 종일 훌쩍거리기만 했다.

밥도 전혀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잠도 안 자면서!

그때 온 가족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가슴 졸였는지 모른다.

그 이유가 미하일 놈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 열이 받지만, 두려움이 더 컸다.

‘애가 또 그렇게 울면 어떡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면서!’

아마도 아나트리샤는 미하일이 깨어난 걸 보면 기뻐할 거다.

루퍼스리안은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이 우는 것보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루퍼스리안의 항복 선언을 받고 나서, 그는 깔끔하게 전생의 미하일 칼라닌에서 나스카의 왕자로 돌아갔다.

그 태도도 짜증 났지만, 이 분노는 아마도 저놈이 원하는 대로 도울 수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봤자, 리샤는 아예 첫 춤 안 춘다고 했어! 네놈도 닭 쫓던 개 꼴이 될 거다! 헹!’

그리고 루퍼스리안의 희망 섞인 예상은 처절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동생이 놈이 내민 손을 잡은 것이다!

‘리샤아!’

하지만 훼방을 놓거나, 막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동생이 웃고 있었다.

지난 5년 사이에 본 가장 크고 환한 미소.

이걸 보고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그들 가족 안에는 없었다.

***

무도회장 안은 새롭게 등장한 화제로 난리법석이었다.

특히나 화제의 중심인 황녀와 왕자가 함께 테라스로 나가자, 소란이 더더욱 커졌다.

“어머어머. 첫 춤이 끝나자마자 두 분만 테라스로 나가셨어요!”

“황녀님이 이러시는 건 처음 아닌가요?”

“당연하죠! 물론 황녀님을 흠모하거나 구애하거나 청혼한 이들은 많았지만…….”

“전부 무시당하거나 거절당했는데.”

“설마 이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걸까요?”

“황녀님의 나이도 벌써 열일곱이시니까 그럴 때도 됐죠.”

‘대박 사건’을 외치며 눈을 빛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도 많았다.

우중충한 표정, 혹은 열렬하게 질투심 어린 눈으로 황녀가 사라진 테라스 너머를 노려보는 이들.

각양각색의 반응이, 황녀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던 이들 사이에서 나왔다.

라이언은 한숨을 쉬며 루퍼스리안의 옆으로 다가가 한탄했다.

“아아. 이렇게 대놓고 차여 버리다니, 정말로 슬픕니다. 위로해 주세요. 황자님.”

“정말 미친 게 틀림없군. 지난번에 두들겨 준 걸로는 아직도 정신이 안 돌아왔나, 그랑디오르 공작?”

라이언은 아나트리샤 황녀에게 파트너 요청을 했다가, 다음날 루퍼스리안에게 끌려가 대련을 핑계로 작신작신 맞았던 것이다.

잠시 그 기억을 떠올리고 오싹해진 라이언은 핫핫 웃으면서 물었다.

“이젠 레오나 라이언도 박탈이고 그랑디오르 공작인 겁니까?”

“당연한 소릴!”

“……흠. 이걸 보면 전 이미 진 모양이군요. 저기 나스카의 왕자에게 말입니다.”

이 말에 루퍼스리안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허튼소리!”

“하지만 황자님께서 춤도 안 막으셨고, 테라스로 가는 것도 안 막으셨으니까…….”

루퍼스리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라이언은 교묘하게 자신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미하일을 방해하기를 바라고서.

동시에 비슷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몇 개 더 있는 것도 눈치챘다.

아닌 척 새침 떨고 있지만, 귀가 당나귀처럼 길어질 지경인 게 분명한 가르텐 소공작.

대놓고 이쪽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는 맹랑한 꼬맹이 파비엘.

루퍼스리안의 속이 다시 한번 뒤집어졌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놈이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

“헉!”

“왜 그래? 갑자기 경기하는 것처럼 놀라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무도회장 밖으로 나와 있었다.

단둘뿐인 테라스. 미하일은 시원한 주스를 두 잔 들고 내게 다가와 있었다.

“나는 어디, 여긴 누구?”

“너는 아나트리샤 루스템이고, 여긴 황궁 무도회장의 테라스야.”

내가 개떡처럼 말했는데도, 미하일은 찰떡처럼 알아듣고 대답해 준다.

이제나저제나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른 놈다웠다.

동시에 주스 잔이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주스를 원샷하고 얼음까지 까독까독 씹어먹고 있자니, 겨우 정신줄이 돌아왔다.

영혼이 잠시 가출했다가 돌아온 기분이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내가 한 일, 한 말들이.

‘춰 버렸지. 첫 춤. 미하일이랑.’

안 추겠다고 공표까지 해 버렸는데. 좀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미하일이 주스를 가지고 오느라 잠시 열린 테라스 문 사이로 들린 소란만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 앉은 미하일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꾸했다.

“눈총에 맞아서 살해당하는 줄 알았어. 나를 노려보는 남자들이 엄청나던데, 혹시 다들 네 파트너를 노리고 있던 거야?”

“어, 뭐, 대충?”

미하일은 턱을 괴더니, 피식 웃었다.

“바람둥이.”

“뭐, 뭐라고?! 내가 왜 바람둥이야!”

“황녀님께 춤 신청을 한 남자들을 모으면 제도를 한 바퀴 빙 돌릴 수 있을 거라던데? 대기 중인 남자가 그렇게 많으니, 당연히 바람둥이지.”

“다 거절했다니까! 아니, 그 정도 숫자도 아니었, 아니. 잠깐! 너 설마 진작 깨어 있었던 거야?”

이 자식. 벌써 깨어났으면서 날 놀린 건 아니겠지? 

그러면 가만 안 둔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려는 찰나.

미하일은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도회장을 걸어 들어오는 동안에 들은 말이야. 엄청나게 소문이 난 모양이던데.”

“아…….”

미하일의 얼굴이 코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절로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피를 마구 내뿜었다. 손끝까지 찌르르 한 느낌. 

“오늘 아침에 눈 떴어.”

오늘 아침?

미하일은 긴 속눈썹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가 간지러웠다.

“계속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그 앞에 빛이 비치는 거야. 그래서 눈을 뜰 수 있었지.”

“빛?”

“응. 누가 여기라고 말하면서 이끌어 주는 느낌.”

미하일의 목소리는 더없이 촉촉하고 다정했다.

“너를 닮은 빛이었어.”

나도 모르게 입가가 허물어졌다. 

그때, 미하일이 은근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났을 때, 뭔가 이상했어.”

“뭐가 이상했는데?”

“익숙하고 좋은 향기가 코끝에 남아 있는 느낌? 그리고…… 입술에…….”

“이, 입술?”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목소리가 다 뒤집어졌다.

조금 전까지 기대감과 설렘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미친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이건, 그러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 것과 비슷했다.

‘으악! 꺄악! 우악! 미쳤지, 어제의 나! 그런 짓을 왜 해서!!!’

내가 굳어 버린 사이, 미하일은 그 말의 끝을 내 버렸다.

“어쩐지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아쉬울 정도로.”

펑!

귓가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조금 전 미하일을 연회장에서 봤을 때처럼, 다시 영혼이 몸에서 탈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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