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09)
“헉!”
정신을 차리니까 무도회가 벌써 끝나 있었다.
사실 정말로 그랬다기보다는, 뭔가 홀린 것처럼 시간이 후르륵 지나간 듯한 감각.
분명히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행동도 했고, 그 기억도 선명한데.
왜 이렇게 멍한지 모르겠다.
설마, 미하일한테 정신 팔려서는 아닐……거고.
반쯤 정신을 놓고 있긴 했는데, 할 일은 다 했다.
테라스에서 나온 이후에 미하일과 세 곡을 연달아 추고, 당연히 오빠랑도 추고, 라이언이랑 코넬, 피비랑도 췄을 정도로.
덕분에 내가 공표한 걸 깨고 미하일과 첫 춤을 춘 충격은 좀 중화되었겠지.
침실에서 유모 엘제랑 시녀들이 나를 둘러싸고 재재거리는 잡담이 귀에 들어왔다.
“황녀님이 장성하셔서 봄의 축제에서 첫 춤을 추시다니! 정말로 이제 다 크셨군요……, 감동입니다. 크흡.”
“그런데 황녀님의 파트너, 분명히 나스카의 왕자였죠?”
이렇게 조심스레 물어본 건 세실리아였다.
“어릴 때도 엄청난 미모라고 생각은 했는데, 성인이 되니까 입이 안 닫히던데요.”
이 말에는 질투나 선망 같은 감정은 없었다. 그냥 순수한 감탄뿐.
나는 세실리아의 반응이 조금 신경쓰였다.
원래 그녀는 저주를 정화할 때, 미하일을 두고 나와 대립한 적이 있으니까.
게다가 미하일이 워낙 멋지게 컸으니, 혹시라도…….
하지만 내 걱정…은 아니고, 생각은 과민한 것이었다.
“조각상이나 예술품 같아서 사람처럼 안 느껴질 정도에요. 뭐, 저에겐…… 그이가 최고니까.”
-라고 말하며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참고로 세실리아는 얼마 전부터 열애 중이다.
옆에서 셀리나가 끼어들었다.
“그래도 우리 황녀님의 미모와 아우라에는 못 미친다고요! 누굴 갖다 대도 소용없겠지만!”
시녀들이 금세 꺄꺄거리고 맞장구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미하일 정도면 그렇게 말할 것까진…….”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모기처럼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말을 내놓고 나서야, 나도 내가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유모와 시녀들은 내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 왔다.
덕분에 내 모기보다 작은 목소리까지 캐치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황녀님?”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다들 눈을 번쩍거리면서 나에게 추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시녀들의 습격(?)에서 도망쳤다.
“꺄아악! 난 몰라! 아무 말도 안 했어! 너무 춤췄더니 피곤해! 잘래!!”
***
황족들의 티타임이 자주 벌어지는 황녀궁의 유리온실.
봄의 축제 다음 날 오전. 이 유리정원에서는 단란한 티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황실 일가족과, 하스티아 국왕 크눔펜 국왕이 그 구성원이었다.
그런데 이 가족 파티에 처음으로 외부인이 초대되어 있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나스카의 미하일입니다.”
바로, 미하일이었다.
진남색에 은사로 자수가 들어간 나스카의 전통 복식을 입은 청년은, 오늘도 수려하고 섬세한 미모를 자랑했다.
그를 앞에 두고 세 남자는 대놓고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 황자, 그리고 크눔펜 국왕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간다.
‘대체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어제 소식을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는데, 어떻게 감히!’
‘저는 안 불렀는데요?’
‘내가 불렀을 리 있나!’
‘저도 미쳤다고 부르겠습니까?’
그렇다. 이들 중 미하일을 이 자리에 초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미하일은 여기 와 있다.
황족 중 누군가의 초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
세 남자의 떨리는 시선이 아나트리샤에게 닿았다.
그러나 아나트리샤는 그 누구보다 가장 놀란 상태였다.
“미하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 경악을 보고 세 남자는 안도했다.
물론, 아나트리샤의 하얀 뺨이 살짝 붉게 물든 건 아주아주 거슬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세 남자도, 아나트리샤도 아니라면, 이 자리에 남는 건 한 명뿐이다.
“어서 와요, 왕자.”
부드럽게 웃으며 미하일을 맞이하는, 이젤리아 황후.
미하일의 이어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대답으로, 이 의혹은 진실로 확정되었다.
세 남자는 드물게 이젤리아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여보!’
‘엄마!’
‘얘야!’
미하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과 경계심을 보이는 세 남자에 비해, 겉으로 보기에 이젤리아는 호의적인 듯했다.
미하일을 가족 티 파티에 초대한 것도 그렇고.
유일하게 웃으면서 미하일을 맞이하는 것도 그랬다.
이건 전생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경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던가.’
그리고 이걸 떠올린 두 명은 곧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사위라니 가당치도 않지! 헛생각이야!’
‘이즈가 그럴 리가 없어!’
그사이, 이젤리아는 미하일을 손님으로서 맞이해서 자리까지 권한 차였다.
“이제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전부 황녀님 덕분이고, 보살핌을 허락해 주신 루스템 황가의 은혜 덕분입니다.”
“우리 딸이 좀 고생하긴 했죠.”
게다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잔뜩 경계 중인 세 남자는 대화에 낄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어떻게 끼어들어 파투를 내기 위해 틈을 보고 있던 세 남자 및 아나트리샤는 곧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그렇군요. 나스카의 왕족은 왕자 한 명뿐이고.”
“그렇습니다. 모왕께서는 제가 태어난 직후에 승하하셨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까 나스카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었죠?”
“제가 마력을 완전히 회복하면 다시 복구가 가능합니다.”
어쩐지 호구조사를 시작하는 듯해서 불길했다.
그런데, 중간부터 분위기가 조금 비틀리기 시작했다.
“혹시 왕자는 차를 잘 우리나요? 우리 아가는 차를 좋아한답니다.”
“부족하지만 교양으로 배웠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황후의 시녀장이 다구와 찻잎을 가져다 미하일의 앞에 놓았다.
“왕자가 차 우리는 솜씨를 보고 싶군요.”
“부끄러운 솜씨지만…….”
미하일은 전혀 빼지 않았다. 소매를 걷더니, 더없이 단정한 태도로 차를 우리기 시작한 것이다.
찻잎을 개량해서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손길이 능숙했다.
아나트리샤는 황당했다.
‘아니, 손님에게 차 우리라고 시키는 경우가 어디 있어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이젤리아의 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서, 쉽사리 끼어들어 반론을 하기 어려웠다.
미하일은 빠르고 능숙하게 차를 우려냈다.
총 5인분. 가족들과 미하일 본인이 마실 것까지 포함한 양이다.
아나트리샤는 미하일이 직접 내민 따스한 잔을 받으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홍차색으로 물들였다.
미하일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그야말로 꽃 같았던 것이다.
며칠 전의 자신이 저지른 도둑 뽀뽀의 감촉이 다시 떠올라서는……, 절대 아니었다! 절대!
다른 가족들도 찻잔을 받아 들어, 다같이 마셨다.
딱 좋은 온도와 아름다운 수색, 코끝을 간질이는 향이 그윽하다.
덕분에 무언으로 오고 가던 긴장감과 경계심도 조금 누그러들었다.
아나트리샤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맛있어!’
미하일이 이렇게 차를 잘 우렸던가?
새삼스러워하고 있는데.
달칵.
뭔가가 걸리는 듯,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젤리아는 차갑게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차가 쓰군요.”
“……죄송합니다. 다시 우려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차가 우려졌고. 그럼에도 이젤리아는 흔들림이 없었다.
탁!
“지금도 쓰군요.”
그렇다.
이젤리아는 세 남자의 추측과 달리 미하일에게 호의를 가지고 이 자리에 부른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고, 가족들 중 가장 강경파였다.
‘얘야, 국이 짜구나!’를 시전했던 것이다!
그날, 미하일의 차는 결국 이젤리아에게 합격 평가를 받지 못했다.
***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미안…….”
가족들의 미하일에 대한 태도가 내 예상보다 훨씬 안 좋았던 것이다.
엄마가 ‘차가 쓰구나’를 시전하신 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빠와 오빠, 할아버지는 훨씬 노골적이었다.
“우리 리샤 절대 지켜!”
“어제 태어난 애에게 무슨 춤 파트너야!”
“이제 나스카 성으로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나와 미하일 단둘이 만나는 것도 엄청나게 방해해대서, 이렇게 얼굴을 보고 대화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며칠이 걸렸다.
그가 해 준 일을 생각하면 너무한 일이었다.
“우리 가족이 너무하지. 미안.”
“아냐.”
그런데도 미하일은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처연하고 가여워서, 나는 더 미안해졌다.
“이렇게 강한 견제를 받는다는 건 그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소리일 테니…….”
“위협? 웬 위협? 네가 아직 마왕의 매개체라서?”
내 질문에 미하일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다정한 금빛 눈동자. 그의 눈빛에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고,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무언가 따스한 감각.
그렇게 멍하니 미하일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의 얼굴이 코끝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 돼?”
“으, 응?”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정신 팔려 있느라 제대로 못 들었다.
그러자 미하일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다시 물어봐도 돼?”
“뭘?”
“그때 못 들은 대답.”
“무슨 대답……, 아.”
반문하려다가 나는 곧 깨달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말이다.
전생에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그가 했던 고백.
그 대답을, 한 번의 생을 돌아 나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나의 사이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눈은 다 녹았고, 새순이 무수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겨울은 다 끝난 듯이 보였다.
이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