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7. 메인 퀘스트 : 봄이 오는 소리 (10)
다시 머리가 멍해졌다. 요즘 미하일 앞에서 자꾸 이러는 경우가 늘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바보가 되는 건지 모르겠다.
방금 전 미하일이 뭐라고 한 거지?
분명히…….
미하일은 내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걸 걱정하는 것처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네 대답을 듣고 싶어. 그때 내가 한 고백에 대해.”
머리가 다시 하얗게 비고, 입안이 바짝 마른다. 날이 춥지도 않은데, 손끝이 곱아들었다.
그렇다. 그때 그는 분명히 내게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그것에 대한 대답이라면…….
‘내가 좋다고 하면 이제 사귀는 게 되는 건가?’
화르륵! 순식간에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고.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
너무 떨리고 머리가 아려서 제대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미하일이 뭐라고 해석한 건지, 가련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긴 속눈썹이 광대뼈 위로 우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어쩐지 눈빛도, 눈썹도 촉촉해 보였다. 안타까울 정도로.
미하일은 더없이 불쌍하게, 그러나 순순히 말을 이었다.
“대답이 거절이어도 괜찮아. 네가 날 싫어해도, 사실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고……. 내가 한 짓들이…….”
듣는 사람 양심이 팍팍 찔리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두 손을 퍼덕퍼덕했다.
“아, 아냐! 그때 일은 어쩔 수 없었던 거잖아! 게다가 사실 미하일 네가 희생한 거면서…….”
그제서야 미하일이 살짝 미소 지었다.
하지만 입가에 희미하게 어린 슬픔과 안타까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는 나마저 가슴이 아릴 정도로 가련한 모습.
“내가,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 오히려…….”
이 말에 미하일은 살짝 눈을 빛냈다.
“오히려?”
“오히려, 난 네가 좋은걸.”
반쯤 충동적으로 내 입술과 혀를 통해 소리가 되어 나온 말은, 확연한 존재감을 가졌다.
분명히 내 마음임에도 알쏭달쏭하던 감정에 이름이 붙자, 도리어 그것이 뭔지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나는 살짝 웃으며 반복했다.
“그래. 난 너를 좋아해.”
미하일은 환하게 웃었다.
세상을 선물 받은 사람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
하지만 아나트리샤와 미하일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는데.
다름 아닌 가족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간신히 가족들을 따돌리고 둘만 있었건만, 그사이에 들켜 버린 것이다.
이번에 나선 이는 바로 아나트리샤의 외할아버지였다.
“아가!”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나트리샤를 보자 주름진 얼굴 가득 따스한 미소를 떠올린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는 한편으로 미하일에게는 하스티아의 빙벽처럼 차가웠다.
과연 눈과 얼음의 나라 하스티아의 국왕다운 표정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표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니.
미하일은 순수하게 놀랐다.
크눔펜 국왕은 순식간에 차가운 표정을 싹 지우더니, 아나트리샤를 보며 기침을 콜록콜록하기 시작했다.
나이답지 않게 꼿꼿하던 허리도 순식간에 구부정해지고, 걸음걸이도 점점 위태로워졌다.
“쿨럭쿨럭. 아이쿠. 이 할애비가 먼 하스티아에서 오느라 좀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 언제부터 몸이 안 좋으셨던 거예요! 빨리 들어가서 쉬셔야죠!”
“우리 아가가 할애비를 간호해 주면 바로 나을 것 같은데.”
“당연히 그래야죠!”
아나트리샤는 멀리서 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외할아버지의 바람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나트리샤는 미하일에게 미안하다는 고갯짓을 해 보이며,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미안, 이따가 마저 얘기해!”
“…응.”
미하일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부축을 받으며 멀어지는 크눔펜 국왕은, 형형한 눈빛으로 미하일을 몰래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고얀 도둑고양이 같은 놈이 어딜!’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황실 가족의 아나트리샤 가드가 더더욱 단단하고 철저해졌던 것이다.
미하일이 사흘 동안 아나트리샤의 머리카락 한 올 못 볼 정도로 말이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지금 황녀님께서는 황후궁에 급하게 가셨는지라.”
“……알겠네.”
빈 황녀궁 앞에서, 미하일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었다.
송구해하는 궁인들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인내심까지 표정과 같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대답…… 제대로 한 거 맞나?”
미하일과 서로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 나눈 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대화를 완전히 끝내지도 못했는데, 미하일을 못 본 지 벌써 사흘째다.
어째선지 그동안 가족들에게 급한 일이 마구마구 터져 버렸던 것이다.
밤에 침대에 누워 예쁜 달빛을 보고 있자니, 그날 내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가 떠올랐다.
“오히려, 난 네가 좋은걸.”
“그래. 난 너를 좋아해.”
애매한 대답…… 아닌가?
아니지. 미하일이 먼저 내가 좋다고 했고. 나도 미하일에게 좋다고 했다.
보통 이러면……, 그날부터 1일 아냐?
혹시 우리 벌써 3일째인 건가?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하지만 대놓고 ‘우리 사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먼저 해야 하는 거지?
혼란과 의혹, 그리고 부끄러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다고 이걸 시녀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조언을 들을 수도 없었다.
‘틀림없이 순식간에 가족들 귀에 들어갈 거야!’
처음에는 눈치 못 챘는데, 이젠 너무 확실했다.
가족들은 분명히 노골적으로 내가 미하일을 못 만나게 방해하고 있었다.
‘엄마가 차가 쓰다고 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계속 미하일을 떠올려서 그런지, 얼굴이 너무 뜨거웠다.
사실 가족들의 방해는 그렇게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내가 진지하게 화를 내면 가족들도 물러날 테니까.
결론은 지금 내가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전생에도 지금도 연애 경험이 없으니 감이 전혀 안 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애 좀 해 볼, 아, 이건 아닌가?
나는 이불을 푹 눌러쓰고 안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으아아! 어떡해야 좋은 거야!’
사실 이렇게 망설이면서 행동을 하나도 안 하는 건, 진짜 나답지 않은 일인데.
자꾸 미하일과 연관된 일에는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만다.
내가 이불 고치를 만들어서, 혼자 이불에 구멍이 나도록 걷어차고 있는 사이.
기이하리만큼 고요한 기척이 다가섰다.
“응?”
이불 사이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그러자, 어둠과 달빛을 타고, 테라스 바깥에 내려서는 인영이 보였다.
누구인지 못 알아볼 수 없었다.
나를 이 엄청난 번민에 빠트린 원인이었으니까.
‘미하일!’
그는 창밖에서 톡톡 문을 두드렸다.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나에게 묻는다.
‘들어가도 돼?’
순식간에 다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어색한데…… 그 이상으로 너무 반가웠다.
나는 이불을 날려 버리고 침대에서 뛰어나왔다. 테라스의 문을 열며 미하일에게 달려갔다.
“미하일!”
“열어 줘서 고마워.”
그는 달빛 아래에서 유달리 희게 웃었다.
“아니. 그 정도로 뭘.”
왜인지 모르게 그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전부 신경이 곤두서서 살피고 있게 된다.
흑발이 흩날리더니 눈꼬리가 처연하게 늘어뜨려진다. 미하일은 달빛 아래에서 가련한 미소로 말했다.
“네가 날 안 만나고 싶은 줄 알았거든.”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강하게 부정하자, 비로소 미하일은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야. 안심했어.”
미하일이 구김살 없이 웃고 있는 걸 보니, 나도 기뻤다.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했다.
“우리, 같이 나가지 않을래?”
“지금?”
이 밤에?
“응. 단둘이.”
마지막 말은 거의 속삭이는 것처럼 작고 은밀하게 들렸다.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가족들이 알면 난리가 날 거다.
하지만 달빛 아래에서 미하일이 너무나도 예쁘게 웃고 있었고.
얼굴이 너무 뜨거운 데다, 머리가 멍했다.
아니,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다 필요 없었다.
내가 미하일의 손을 잡고 싶었고, 그와 단둘이 나가고 싶었다.
나는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황도 르펜시아는 밤인데도 열린 가게도 많았고, 사람들도 우글거렸다.
황궁에서 내려보면 밤에도 밝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이래서였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환생 이후 사교도나 반역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같은 이유가 아니라, 그냥 길거리에 신분을 숨기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설렘이 가슴 한가득 부풀어 올랐다.
그때, 미하일의 따스한 손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아 왔다.
나는 놀라서 눈을 들었다. 여전히 홀릴 듯 예쁜 미하일의 미소가 눈앞 한가득.
그의 손을 뿌리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거, 혹시 첫 데이트인 건가!’
전생 25년에 현생 17년 동안 이어온 모쏠 인생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대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