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1)
미하일의 얼굴에 홀려서 아무 생각 없이 나왔었는데.
한번 ‘데이트’라는 생각이 들자, 계속해서 의식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주책없이 멋대로 날뛰려고 해서, 마력으로 잠깐 진정을 시켜야 하나 할 정도였다.
이젠 ‘두근두근’을 넘어서서, ‘쿵쿵쿵’ 하는 수준으로, 점점 커져 가고만 있었으니까.
마주 잡은 손끝에 온갖 신경이 집중된 상태였다.
미하일의 모세 혈관에 혈액이 흐르는 속도와 농도까지 일일이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지금 나는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첫 데이트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
이런 상태였는데.
미하일은 지금 내 상태를 어떻게 해석한 건지, 걱정 가득한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괜찮아? 얼굴이 빨개.”
“어? 응? 괜찮아! 그냥… 더워서 그래!”
첫 데이트에 흥분해서 그래!
-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거기에 미하일의 악의 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그는 제 반듯하고 하얀 이마를 내 이마에 살짝 댔던 것이다.
“음. 열이 좀 있긴 한 것 같은데…….”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속으로 난리를 칠 뿐.
그러나, 미하일은 평소의 그 날카로운 감은 어디에다 팔아 치운 건지, 헛소리를 해댔다.
“나 때문에 무리하게 만든 것 아냐? 지금 들어갈까?”
“아아니!!!”
나는 기겁해서 외쳤다.
어찌나 우렁찬지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우리를 볼 정도였다.
미하일은 주변의 이목이 쏠리려 하자, 내 로브를 더 깊이 눌러 씌워 주었다.
주변의 술렁거림이 지나갔다.
“으음? 방금 지나간 여자 우리 황녀님과 닮지 않았어?”
“에이, 황녀님하고 비슷한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그래! 지금쯤 황궁에 계실 황녀님 본인이 아니고서야.”
“하긴, 그건 그래!”
주변의 이목을 피해, 그와 나는 샛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효. 다행이다.”
“미안. 내가 나오자고 해서.”
“아니야. 내가 실수해서 그런 걸, 뭐.”
우리는 서로 내 탓이네를 해대다가, 곧 합의점을 찾았다.
그냥 밤 산책을 계속하자고 무언의 합의를 한 것이다.
밤은 짧았고, 르펜시아의 밤거리에는 보고 즐길 것들로 가득 찼으니까!
“손님! 갓 뚜껑을 딴 셰리주를 맛보세요!”
우리는 진홍색의 예쁜 셰리주한 잔을 같이 홀짝거리기도 하고.
신기해 보이는 길거리의 과자와 꼬치구이 등을 먹었다.
미하일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온 건지, 잔돈까지 가지고 있었다.
평소 나는 금화나 은화 같은 동전을 지니고 다닐 일이 없으므로, 온전히 미하일에게 다 얻어먹게 되어 버렸다.
“음. 내가 꼭 갚을게.”
미하일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냐. 그렇게 따지면 나는 벌써 몇 년째 너희 집에서 신세 지고 있는걸.”
“아, 그건 그런가?”
하스티아의 일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도 벌써 5년이다.
나스카 성도 파괴되었고, 그걸 회복시킬 수 있는 존재는 미하일뿐이라, 그동안 나스카 일족 전체가 황궁에서 더부살이 중이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얻어먹어도 되……지가 않는다!
나는 바락 외쳤다.
“그렇게 따지면 나와 우리 가족은, 아니, 지금 이 세계의 모든 사람은 너에게 빚진 채 살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왜 네가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에게 빚을 갚겠다고 말해?
꼭, 빚을 다 갚아 버리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사람처럼.
“넌 좀 더 당당하고 뻔뻔해야 할 필요가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미하일의 표정은 슬펐다.
그는 제 가슴을 가리켰다. 그곳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득한 구멍과 닮은 흔적.
처음 스킬로 미하일의 몸 상태를 살폈을 때엔, 저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지금은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릇’이었다.
안에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마왕이라 부르는 멸망의 화신.
저것은 미하일의 영혼에 남은 상처이자, 낙인이었다.
환생으로도 지워지지 않은, 지워질 수 없는 것.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멸망이 도래하면, 그것은 저 텅 빈 그릇 안으로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또 가득 채우겠지.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인간으로서 미하일의 의지와 인격을 박살 내버리고.
온전한 멸망 그 자체로서 거듭날지도 모른다.
미하일은 그것을 무엇보다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일까.
아직도 나의 영혼 안에 그의 혼의 조각이 남아 있어서? 혹은 내가 그에게 영혼을 돌려줄 때, 내 일부 역시 녹아들어 갔다거나.
명확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아직도 두려워? 네가 이 두 번째 세계마저 멸망시킬까 봐?”
“당연히 두려워. 네가 있는 곳이고, 네 행복이 존재하는 곳인데…….”
그는 서글프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온전히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또 잃게 만들까 봐.”
“미하일.”
미하일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웠다.
“너는 나 못 믿지.”
“뭐?”
미하일의 금빛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전생에도 나를 못 믿으니까, 혼자 모든 걸 희생했고. 지금도 날 못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불안해하는 거잖아.”
“아냐. 리샤. 나는…….”
나는 한 발 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지난 5년간과 달리, 더는 차갑지 않은 미하일의 손을 잡았다.
미하일은 나직이 대답했다. 고해하는 것처럼, 대답을 토해 낸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믿지 못하겠어. 그저, 나는… 나 자신을 못 믿는 것뿐이야. 그때도 지금도.”
“그럼 나를 믿어.”
“리샤…….”
나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우리가 서 있는 바닥과 담장,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이 세계를.
“넌 너를 좀 더 믿어도 돼. 지금 세계가 그 증거잖아. 네가 나에게 준 기회이자 선물.”
“…….”
그가 나에게 준 가장 커다랗고 아름다운 선물을.
“내가 얼마나 센지 알지? 그때 포기하고 있던 너를 결국 레비아탄에서 끄집어내 온 건 나야.”
“…그래. 알아.”
이제야 미하일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미소가 번졌다.
아주 조금이지만 분명한 변화.
나는 그를 거의 세뇌하듯 속삭였다.
“너를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 너를 믿는 나를 믿는 거야.”
“그래. 리샤. ……그리고, 서나야.”
미하일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을 슬쩍 내렸고, 우리의 입술은 두 번째로 서로 닿았다.
처음의 도둑 뽀뽀와 달리, 그도 나도 함께 기억하고 있는.
처음이면서 두 번째인 키스였다.
키스의 맛은…… 녹아내릴 만큼 달콤했다.
***
코넬 가르텐 소공작의 근래 상태는 유례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렇다. 그는 며칠 전 봄의 축제 무도회에서 거대한 좌절을 맛본 것이다.
물론 그날 좌절한 소년이나 청년은 코넬만이 아니었다.
제국 내는 물론이고, 대륙 전체를 탈탈 털면 그날 같은 사람에게 실연당한 소년들이 기백은 될 게 분명했다.
대표적으로 그랑디오르 공작이나 파비엘 백작가의 막내를 들 수 있겠다.
다들 황녀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무도회 당일 황녀가 정말로 공언한 것처럼, 아예 춤을 추지 않았다면 그들의 가슴이 쓰릴 일은 없었을 것이나.
그날, 경애해 마지않는 황녀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 어기고 만 것이다.
‘나스카의 왕자…였지.’
그자가 5년 동안 황궁에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황녀를 끔찍이 여기는 황제부부와 황자가 그 존재를 묵인하고 있단 사실이 좀 불길하긴 했다.
소중하디소중한 보물을 훔쳐 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도둑 입후보자를 절대 가만히 황궁 안에 놔둘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코넬은 기억하고 있었다. 첫 춤을 나스카의 왕자와 추던 때, 아나트리샤 황녀가 얼마나 수줍은 얼굴을 했는지.
지금껏 누구 앞에서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다.
코넬은 새삼 가슴이 더욱 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아직 아니야. 아직…… 다 끝난 건 아니야.’
황녀가 공식적인 연인으로 그를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날 아나트리샤가 나스카의 왕자와만 춤을 춘 것도 아니다.
그날 코넬 역시 황녀와 춤을 추는 영광을 경험했으니까.
코넬은 그날 황녀가 세 번을 연달아 미하일과 춤췄다는 사실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소년은 꽤 오래 키워 온 자신의 풋사랑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기회는 있어.’
물론 희망 회로를 돌리며 그 기회를 노리는 소년은, 코넬만이 아니었다.
코넬이 쓰린 속을 삭이려 애쓰고 있을 무렵.
집사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 왔다.
“소공작님.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어머님이? 미리 연락도 없지 않으셨나?”
코넬은 표정 없이 기뻐하며, 어머니의 마차를 맞이하러 중정으로 나갔다.
가르텐 공작부인은 10년여 전 첫 딸을 잃은 후, 우울증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근 1년 사이에는 더 심해져서, 아예 영지로 내려가 요양 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올라온 건, 무언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기 때문일까.
그런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어머니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 머니? 저 사람은?”
코넬이 놀랄 정도로 ‘누군가’를 닮은 여성이 가르텐 공작부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코넬. 네 누나가 돌아왔단다.”
“……네?”
가르텐 공작부인의 옆에 선 여인은, 공작부인을 매우 닮아 있었다. 남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건, 오래전 죽은 코넬의 누나를 많이 닮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