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2)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버님?”
심각한 표정의 코넬이 던진 질문에, 가르텐 공작은 미간을 짚으며 대답했다.
드물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네 어머니가 착란을 일으키고 있단다.”
“예?”
“최근에는 로웨나의 죽음을 아예 부정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저 애를 보고는 완전히 로웨나로 착각하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
코넬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로웨나는 코넬의 하나뿐인 누나이자, 가르텐의 공녀였다.
“그래서 아무래도 그냥 둘 수 없어 황궁의에게 보일 수 있도록 수도로 불러들인 건데…….”
“함께 데려와 버렸다는 거군요.”
“그래.”
공작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더없이 씁쓸했다.
부자의 시선은 그동안 잘 관리되지 않던 중정의 화원에서 웃고 떠드는 중인 여인과 소녀에게 닿았다.
“그래. 사실 그럴 만도 하지. 저 애를 봤을 때, 나도 경악했단다. 죽은 로웨나가 지금쯤이면 딱 저렇게 자랐겠다 싶은 얼굴이니.”
“…….”
코넬조차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병약하던 누나가 건강해져서 성인이 된다면, 아마도 저런 모습일 것 같았으니까.
공작은 정원에서 딸로 착각하는 아이를 보고 환하게 웃는 공작부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 어머니가 저렇게 웃는 건 정말로 10년 만에 보는 것 같구나.”
누나의 죽음 이후, 코넬은 모친의 미소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누나를 닮은 여자를 아버지가 바로 내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코넬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애를 정식으로 입양하여 가르텐 공녀로 인정할 생각이다.”
***
이 소문은 수도 사교계에 빠르게 퍼졌다.
근래에 제국도 대륙도 평화로웠기 때문에, 소소한 가십 외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일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화제의 중심이라면 단연, 황녀의 봄의 축제 첫 춤이었지만.
그건 이미 승자가 결정 난 상태다.
물론 그때 좌절한 이들은 절치부심하며,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대중의 관심은 조금 시들해진 것이다.
그때, 딱 가르텐 공녀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가르텐 공작부인이 드디어 수도로 올라왔다면서요?”
“공작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사교활동에도 나선대요.”
“그게 전부 공작부인이 딸을 위해서 나서는 거라더라고요.”
“어머. 하지만 가르텐 공녀는 어릴 때 병으로 죽지 않았나요?”
“그 죽은 공녀와 꼭 닮은 친척 아이를 공녀로 입양했대요. 이름도 같은 로웨나 가르텐이라더군요.”
“세상에…….”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격이 높은 가문들이 바로, 개국 공신 세 가문이다.
그리고 세 가문 중 유일하게 안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가르텐.
그러니 사교계에서 가르텐 공작부인의 영향력은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딸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상심하여 칩거하지 않았다면, 이미 사교계는 공작부인이 장악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 가르텐 공작부인이 양녀와 함께 사교계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 나선 것이다.
당연히 화제의 중심이 그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아나트리샤의 경우 어떠한가 하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
그야말로 만개한 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비밀 데이트를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두 사람은 이제 서로의 마음을 속이거나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도 아나트리샤는 나스카인들에게 배정된 외궁으로 찾아와 미하일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황궁의 궁인들과, 나스카인들은 정말로 기괴한, 그럼에도 요 며칠간 반복되는 바람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던 광경을 눈에 담아야 했다.
“저, 저, 저 저놈이 우리 아가의 손목을 잡았어!”
“손가락을 부러트려 버려야 해!”
황제와 황후는 거대한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채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트리샤와 미하일의 시야에서만 안 보이게 대충 숨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궁인들과 나스카인들에게는 훤히 보였다.
이 팔불출 부부에게서 애매하게 떨어진 위치에서, 나스카의 장로가 작게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방금은 분명히 황녀님께서 먼저 우리 왕자님의 손목을 잡으셨는데…….”
그리고 이게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팔불출 황제 부부에게는 사실이 어떤가는 상관이 없었다.
“우리 아가가 먼저 잡으려고 해도 사양해야지! 안 그런 것도 죄야!”
“아, 하지만 감히 우리 딸의 손을 거절하다니, 그건 죽어 마땅한 죄 아냐?”
“그렇네! 여보 말이 맞아!”
누가 먼저 손목을 잡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받아들이면 도둑놈이고,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몇 배는 더한 대역죄인.
결국 미하일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루스템 제국에서 가장 죄질이 나쁜 죄인은 이미 확정이었다.
나스카의 장로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생기 넘치는 왕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토록이나 아름답고 잘 어울리시는 한 쌍인 것을…….’
그리고 장로를 비롯한 나스카인들은 모두 흐뭇함과 잔잔한 행복이 가득 담긴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왕자인 미하일의 감정이 일족 사이에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아나트리샤 황녀를 만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는 미하일의 힘이 확실하게 강해지고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어쩌면 곧, 정식으로 우리 왕자님을 왕이라 부를 수 있게 될 것 같군.’
그리고 그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저기서 환하게 웃고 있는 황녀일 것이다.
장로와 다른 나스카인들은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황녀에게 감사했다.
그들의 왕을 구해 내고, 그가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준, 저 소녀를.
그때, 옆 기둥에 대충 숨어 있던 하스티아의 국왕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손녀의 손목이라도 잡아 보려면 마땅히 나라 하나쯤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하는데 말이다!”
“그것도 부족하죠, 할아버님!”
죽이 아주 척척 잘 맞는 조손 간이었다.
크눔펜 국왕은 도끼눈을 뜨고 미하일을 노려보았다.
“저놈은 땅 한 뙈기나 저택 한 채도 없는 빈털터리가 아니냔 말이다!”
“아닙니다! 나스카의 성은 미하일 님이 다 회복되시는 대로 재생이 가능합니다! 전 대륙에 유일무이한 부유성이란 말입니다!”
“그래봤자 우리 빙해성보다 작거든?”
“게다가 황궁과는 비교도 안 돼!”
양쪽 집안(?)의 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 반면 멀지 않은 곳에서 아나트리샤와 미하일은 둘만의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 차림새가 왜 이래? 꼭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잖아.”
미하일의 옷차림이 특별히 화려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머리에 화관을 하나 쓰고 있었고.
여전히 왼손 약지에는 분홍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그게 유달리 잘 드러나도록 짧은 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리본 자체는 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 화관이 무엇인지 황궁에 모르는 이는 없었다.
‘황녀님이 지난 사냥대회 때 얻으신 화관! 그걸 나스카의 왕자에게 주신 건가?!’
이 소문은 곧 황궁을 한 바퀴 돌아, 황도 안으로도 퍼져나갈 것이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사방에 자랑하는 거야. 제발 보라고 말이야.”
아나트리샤는 살짝 볼을 붉히며 민망하게 웃었다.
“화관도 별거 아니고, 리본도 그냥 리본일 뿐인데.”
“나한텐 아니야.”
화관을 쓰고 부끄러운 듯 곱게 눈웃음친 미하일은 곧,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도 사실이야.”
“뭐가?”
“내가 참여해서 이 화관을 얻은 다음, 너에게 바치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자 아나트리샤는 까르르 웃었다.
“내년이 있잖아.”
“……그렇지.”
미하일의 금빛 눈동자가 잠시 떨렸다.
“왜 그래? 설마 자신이 없는 건 아닐 테고……. 혹시 아직도…….”
그들 정도 수준의 능력자에게 사냥대회 우승은 장난 같은 일이다.
미하일이 참여한다면 루퍼스리안이 진지하게 방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승을 못 한다면, 전생의 S급 헌터 자격을 내려놔야 할 터였다.
문제는 그쪽이 아닐 것이다. 아나트리샤가 걱정하는 것도 다른 쪽이었다.
혹시, 아직도 자신이 살아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냐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한 건지.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그보다는…… 좀 감격했어.”
“감격?”
“응. 너와 이렇게 미래를 말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미하일의 대답에 아나트리샤의 걱정 어린 표정이 눈 녹듯 흐무러졌다.
두 사람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 가운데에서 환하게 웃었다.
***
코넬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어머니?”
가르텐 공작부인은 꿈결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황자님께 네 누나의 데뷔탕트 파트너를 부탁드려보지 않겠니, 코넬? 이 엄마의 부탁이란다.”
공작부인의 등 뒤에서, 로웨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