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3)
코넬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황자 전하께, 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는 말을 질문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너도 알지 않니. 코넬. 네 누나가 병 때문에 오래 시골에서 요양만 하느라, 데뷔탕트도 제대로 못 치렀어.”
공작부인은 여기 있는 로웨나가 양녀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딸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딸이 죽고 닮은 아이를 입양한 것이 아니라.
병약했던 자신의 딸이 드디어 다 나은 것이라고.
“가르텐 공녀의 데뷔탕트가 미뤄진 것만으로도 말들이 많았을 거야. 황자 전하께서 로웨나의 옆에 서 주시면 그런 말들도 나오지 않겠지. 응?”
“가르텐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머니.”
“나도 안단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용납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내 딸이 얼마나 아파하며 고생을 했는데!!!”
코넬을 설득하려던 그녀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거의 비명에 가까워졌다.
공작부인은 아들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혹시 네 누나를 도와주기 싫은 거니? 오래 떨어져 지냈다고 남매의 정은 다 잊은 거야?”
“……그럴 리가요.”
그저 누나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입양된 데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남매의 정이 쌓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공작부인의 상태가 워낙에 안 좋았기 때문에.
코넬은 대놓고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말씀은, 드려 보겠습니다. 하지만 기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무슨 말이니. 황자 전하께서 거절하실 리 없어. 네가 황녀님의 첫 파티 때 은종을 울렸었잖아.”
“……하지만 봄의 축제 첫 춤의 파트너는 되지 못했죠.”
근래에 계속 이 사실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일까.
코넬은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의외롭게 이에 대답을 한 건, 공작부인이 아니라 내내 조용히 곁을 지키던 로웨나였다.
“저런, 황녀님께서도 너무하시지.”
공작부인을 닮은 맑은 물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코넬은 잠시 흠칫했다.
목소리마저 죽은 누나와 닮아 있었다.
상대가 진짜 누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코넬조차 놀랄 정도였다.
분명히 가까운 친척조차 아니라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누나와 닮을 수 있을까.
본디 모든 이들을 의심하고 공정하게 대하려 하는 것이 바로, 가르텐의 가풍이며, 코넬이 늘 지키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로웨나를 보고 있다 보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오래 앓았던 누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애꿎은 대상을 상대로 다시 살아나려 들어서.
최대한 이성으로 이를 막으려 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로웨나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하지 말렴. 황녀님께서도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으실 거야. 그러니까 도리어 다른 부탁은 잘 들어주시지 않을까?”
가르텐 공작 그리고 코넬과 똑 닮은 짙은 남색의 생머리가 로웨나의 웃음을 따라 흔들렸다.
공작부인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똑똑한 딸! 네 말이 맞아.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란다!”
“하지만 저는 굳이 그렇게까지 과분한 건 바라지 않아요, 어머니. 어머니 옆에서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쁜걸요.”
“말도 안 된다! 너는 가르텐의 공녀야! 제국의 유일한 공녀이기도 하지! 황녀님을 제외하면 이 루스템에서 가장 고귀한 아이야!!!”
그렇게 외치는 공작부인의 눈빛은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
코넬은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
궁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지금 루스템 황궁의 심장부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의 비장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세였다.
제국의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자까지.
여기에 황가의 측근들까지 함께한 본격적인 대책 회의.
기드온 기사단장과 재무부 대신이기도 한 파벨 백작 피오나. 시종장 웨인. 시녀장 등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측근들.
이건 공식적인 국무 회의는 아니었지만.
참석자들에게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회의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의의 의제가 바로…….
‘아나트리샤의 연애 대책 회의!’
-였던 것이다.
금빛 원탁의 가장 상석에서, 손깍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던 황제가 음울하게 말했다.
“내 딸이 우리 가족 앞에 놈의 손을 잡고 와서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라고 선언한 지 벌써 57시간이 지나 버렸다.”
빠득.
원탁의 모서리가 얼어서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황후가 남편의 말을 받았다.
“게다가 어제는 아버지께서 나서셨다가, 혈압이 올라서 뒷 목을 잡고 쓰러지시기까지 했어.”
미하일은 크눔펜 국왕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을 어떻게 들은 모양이었다.
땅 한 뙈기도 성도 없는 빈털터리라는 말.
그는 자랑하듯 파괴되었던 나스카 성을 복구하더니, 황녀궁의 옆에 보란 듯 띄워 놓았다!
“아니, 감히 객식구 주제에 황궁의 조망권을! 그것도 황녀궁의 조망권을 해치다니!”
“아, 할아버지! 저는 괜찮으니까 화내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왕 폐하.”
미하일은 자신만만하게 웃더니.
아나트리샤의 손등에 키스하며 당당하게 선언했다.
“내 선물이야, 리샤.”
“뭐? 저거 너희 일족 모두가 사는 성이잖아!”
“나스카 일족 중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는 없어.”
“아.”
그렇다. 이제 미하일은 더는 왕자가 아니라, 당당히 나스카의 왕이라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교제를 기념 삼아 선물하고 싶어. 그리고, 이것의 보답도 하고 싶고.”
“엥? 화관의 보답? 아니, 화관 하나에 성은 너무 과해!”
“전혀 과하지 않아. 네가 준 것인걸. 리샤.”
“미하일……!”
두 사람은 잠시 아나트리샤의 할아버지 앞이라는 것도 잊고.
‘오늘부터 1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풋풋한 연인들답게 금세 자기들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그 꽁냥꽁냥을 눈앞에서 본 크눔펜 국왕은, 그만…….
혈압이 올라 쓰러질 뻔하고 말았다.
쾅!
루퍼스리안이 참지 못하고 원탁을 내리쳤는데.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감히 리샤를! 내 동생을!”
“내 딸을!”
“우리 황녀님을!”
“제국의 보물을 훔쳐 가려 하다니!”
성별과 연령, 지위도 제각각인 이들이었으나.
그들은 지금 한마음 한뜻이었다.
카스톨트 황제는 비통하게 외쳤다.
“우리 아가는 결혼 안 하고 우리 가족하고만 살겠다고 했었는데!!!”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폐하!”
“아가는 아직 너무 어리다고!”
“그러니까요! 아직도 너무 아기 같고 안쓰럽기만 하신데!”
“크흡. 내가 우리 귀염뽀짝 황녀님을 며느리로 독점하려고 얼마나 오래 별러 왔는데!!!”
“……?”
이 사태에 대해 성토하던 말 중에 이상한 발언이 끼어 있었다.
“방금, 누구지?”
“피오나. 분명히 너였는데…….”
황제 부부의 살벌한 시선이 재무부 대신 피오나에게 향했다.
“아, 이런. 하지만…… 나도 갖고 싶었다고요! 황녀님 같은 딸!”
그렇다. 피오나는 아직도 아기 아나트리샤를 보고 가졌던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막내딸을 얻겠다는 욕망에서, 귀여운 황녀를 며느리로 들이겠다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것뿐.
옆에서 기드온이 아내의 역성을 들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피오나가 황녀님을 너무 귀여워해서…….”
“…그러고 보니, 기드온 경. 그대는 아직도 매일 면도를 잊지 않고 있군?”
“……!”
황제와 기드온.
황후와 피오나.
두 부부 사이에 긴장감이 파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날뛰었다.
그리고 검은 속내(?)를 숨기고 끼어들었던 두 사람은 이 비밀 회의장에서 바로 쫓겨났다.
“폐하--!!!”
“하지만 우리는 황녀님을 포기 못 해요!”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피오나 부부의 원념 어린 말에, 남은 황족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믿고 모은 충실한 신하들 사이에 이미 이런 음모를 꾸미는 이들이 있었다니.
결국 다른 이들은 물리고, 가족 셋만 남아 한탄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보는 눈은 다 같은 거군. 다들 우리 아가를 너무 원해서 큰일이야.”
“이러다간 진짜로 빼앗기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돼! 아니, 들어가도 안 돼!”
하지만 가족들의 고민은 깊어졌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대놓고 둘을 갈라놓을 수가 없어!’
미하일이 전생부터 해 온 희생을 알게 된 것도 컸다.
하지만, 그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바로…….
“하지만 리샤가 저렇게 웃고 있다고요!”
루퍼스리안이 가리킨 곳에는 황녀궁 앞에 착 달라붙은 나스카 성이 있었고.
지금 아나트리샤는 미하일과 그 성에서 데이트 중이었다.
그야말로 꽁냥꽁냥 중.
꽤 멀었지만, 이 자리에 아나트리샤의 표정을 못 알아보는 이들은 없었다.
“저렇게 기뻐하는데!”
“하지만 내 딸을 뺏길 순 없다고!”
황족들의 시름이 깊어가는 가운데.
루퍼스리안이 벼락 맞은 듯이 벌떡 일어났다.
“아! 리샤가 누구랑 연애를 하든, 나중에 겨, 결혼…을 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크흑!”
“우리 아가가!”
결혼의 가능성만으로도 가족 셋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리샤가 계속 우리 곁에 있는 거!”
“그렇지.”
“역시 우리 아들. 똑똑하구나.”
루퍼스리안은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지금 리샤를 황제로 만들어 버리면 되죠! 미래에 뭐가 어떻게 되더라도, 황제가 제국과 황궁을 떠날 순 없잖아요!”
마치 황위를 동생에게 나눠줄 푸딩 따위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이 의견은 꽤 큰 파동을 가져오게 되는데.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살아 있는 황제의 선위 파동으로 이어졌다가.
황녀에게 바로 진압당했고.
대신, 아나트리샤의 정식 황태녀 책봉으로 봉합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사자들이 전혀 예상 못 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된다.
***
무려 황제가 후계자를 지명하여 책봉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엄청난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소한 사교계의 행사들은 전부 뒤로 밀리거나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예정에 없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가르텐 공녀의 데뷔탕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작부인은 눈물까지 보이며 딸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로웨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아니에요, 어머니.”
공작부인을 위로하는 로웨나의 표정은 작지만 선명한 분노와 증오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나를 방해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