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4)
으득.
이 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러나 공작부인은 딸에게 최고의 것을 해 주지 못한 슬픔에 빠져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로웨나는 창밖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황궁을 노려보았다.
마치 그곳에 있을 누군가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방비 상태인 공작부인과 달리 코넬은 제 의붓누나의 행동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로웨나의 맑디맑은 물빛 눈동자가 붉게 빛난 듯 보이 것 같았는데.
‘뭐지?’
하지만, 로웨나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치자, 찌르는 듯한 두통이 코넬의 의식에 노이즈처럼 끼어들었다.
조금 전 그가 느낀 이질감은 곧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결국 가르텐 가문의 공녀 로웨나는, 별도의 데뷔탕트 없이 사교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가문의 행사에 모두 참석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사교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가르텐 소공작 코넬이, 늘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남매가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요.”
“하긴, 공녀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사교계의 가장 큰 화제가 되지는 못했으나, 로웨나 가르텐은 빠르게 사교계에서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누구도 로웨나의 급작스러운 입양이나 존재감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채.
***
얼렁뚱땅 황태녀 책봉식이 결정되었다.
대략 한 달 뒤로.
‘이렇게…… 대충 정해서 얼렁뚱땅 급하게 진행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아직 건강하신 데다 한창 일하실 나이의 아빠가 갑자기 나에게 황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신 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선위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온 가족들이 아빠의 억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게 더 경악스러웠지만.
뜯어말려야 할 엄마까지도 뿌듯하게 웃으시며 동조하고 계셔서.
나는 오빠에게 외쳤다.
“왜 오빠는 가만히 있어! 오빠가 장남인데 안 서운해? 불만 없어? 황태자 되고 싶은 생각 없어?!”
사실 나는 그다지 황제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세고, 우리 가족들이 짱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그걸 위해 반드시 내가 황제가 될 필요는 없었던 거다.
물론, 우리 가족 중 한 명이 황위를 이어야 하고, 하스티아 왕위도 우리 가족이 가져야 하지만!
‘우리 가족 권리면 그건 지켜야지!’
그런데, 이렇게 ‘우리 가족만 짱 먹으면 다 괜찮아’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오빠도 그랬다.
“나? 난 전혀! 상관없는걸! 리샤한테 황제의 보관이 짱 잘 어울릴 테니까 아무래도 좋아!”
“아니, 서운해해야지! 왜 안 서운해?!”
“안서운이니까, 안 서운한데?”
“…….”
오빠의 썰렁한 농담으로 내 질문은 어영부영 넘어가고 말았다.
전생에는 이름으로 놀리면 진지하게 화냈으면서.
환생해서 멋진 이름 생겼다고 그런 적 없는 척하고 있어.
“그리고 난 하스티아가 있잖아. 양쪽을 다 맡으면 과로사할지도 몰라. 당연히 외교 문제도 생길 거고.”
“아…….”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워프 포탈도 있고, 이제 국왕이 반드시 빙해성을 지켜야 하지도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제국과 하스티아는 멀었다.
황제 겸 국왕까지 하는 건 무리긴 했다.
하지만 어쩐지 가족들이 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 일을 밀어붙이는 것 같다는 내 의심을 확인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좋구나! 그럼 당장 우리 아가에게 황위를!”
아빠는 그대로 황제의 인장과 보관을 가져다가 나에게 줄 기세였던 것이다.
내가 필사적으로 방어한 끝에, 간신히 황태녀 책봉부터 공식적으로 진행하자고 얼버무렸는데.
‘음? 그런데 어차피 이제 하스티아 빙벽 유지할 필요 없으니까 굳이 얼음의 마력 없어도 되지 않나? 그럼 내가 해도 되는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든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황태녀 책봉이 결정되고 난 이후.
어째서인지 가족들은 미하일 앞에서 뿌듯하게 웃고 있었다.
일렬로 서서, 턱을 치켜올리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것이…….
‘꼭…… 우리 팀이 이겼지 하고 자랑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착각인가?’
하지만 미하일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책봉식이 너무 촉박하게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정도 다급했다.
소식이 들리자마자 달려온 알라나는 이미 마력 회로를 전력으로 개방한 상태였다.
눈에서는 빔을 뿜고, 두 손은 마력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황녀 전하의 책봉식 드레스는 제가 만들어야 합니다아앗!!!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면 황궁 입구의 분수대에 코 박고 죽어 버릴 거예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안 했어.”
“역시! 역시 황녀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실 줄 알았어요! 황녀님의 몸에 걸치는 모든 옷들은 응당 제 손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니, 기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 안 했어.
하지만 본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진짜 분수대로 달려갈 것 같아서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때 적당히 하자고 끊었어야 했다.
그 결과.
어떤 재난을 맞을지 미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지난 5년간 황궁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곳.
황녀궁에서 증축된 건물이었다.
이곳은, 황녀를 위한 추가 투왈렛 룸…이 아니라, 별궁이었다.
그렇다. 아예 황녀를 위한 옷과 장신구를 보관하기 위해, 아예 황녀궁 앞에 별궁이 새로 지어졌던 것이다.
황녀의 옷을 만드는 건 알라나의 기쁨이었고.
그 이상으로 황족들의 즐거움이자 취미였기 때문이다.
단 한 명, 당사자인 황녀만 빼고.
이 별궁에서는 난데없는 패션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촥-!
알라나의 능숙한 손길에 앞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벗겨졌고.
안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던 아나트리샤 황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자.
“오오! 역시 우리 아가에게는 아이보리색도 잘 어울리는구나!”
“후계자의 보관이 금이니 그걸 강조하기에도 좋아 보이는군!”
“하스티아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이에게 눈처럼 깨끗한 색은 무엇보다 잘 어울리지!”
황제, 황후, 크눔펜 국왕 세 사람의 열광적인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어쩐지 환영으로 세 사람이 ‘100점 만점에 120점!’이라는 팻말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한편 루퍼스리안은 그 옆에서 진지하게 피드백을 주고 있었다.
“아, 알라나. 어깨의 슬릿 각도를 좀 수정해 보면 어떨까? 이렇게, 옆으로 말이야.”
“오. 그것도 좋은 말씀이십니다. 역시 황자님!”
알라나는 아나트리샤에게 입힌 드레스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놀랍게도 드레스는 자기 혼자 루퍼스리안이 말한 대로 디자인이 변경되었다.
그렇다. 이제 알라나의 능력은 전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서.
실시간으로 드레스 디자인을 바꿀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자, 이제 14호 드레스 완성!”
알라나가 손뼉을 ‘짝!’ 치자, 아이보리색 드레스가 그대로 벗겨져서 대기 중이던 토르소로 ‘뿅!’ 하고 옮겨졌다.
그렇다고 해서 아나트리샤가 알몸이 된 건 아니다.
장식이 일체 없는 흰색의 기본형 드레스가 여전히 입혀져 있었다.
알라나는 이제 다른 디자인 스케치를 들고, 황녀가 입은 기본형 드레스를 마력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옷의 색과 재질, 디자인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이것이 알라나가 최근에 각성한 능력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무한의 드레스 룸’.
“이제 마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황녀님의 드레스를 빠르고! 완벽하게! 무제한으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아나트리샤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 줘!’
무아지경으로 옷을 매만지던 알라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디자인이 완성되고 커튼을 열어야죠!”
-라고 외치더니 다시 커튼을 쫙 쳐 버렸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으니 이 커튼도 사실 필요 없는데, 완성본만을 갤러리들에게 보여주겠다며 굳이 치고 있는 것이다.
15호 드레스는 진분홍이었다.
커튼이 다시 열리자, 황실 가족들의 감탄사가 울려 퍼졌고.
황녀는 피곤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열흘 동안 안 자도 피곤하지 않지만, 이건 그것보다 힘들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지치는데.”
그때 방구석에 유배당해 있던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다 예쁘고 잘 어울리는걸?”
그곳에는 미하일이 서 있었다.
아나트리샤의 가족들에게 견제당한 나머지, 방의 구석으로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 한마디에, 아나트리샤의 축 쳐졌던 표정이 확 피어났다.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더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걸 보고, 황실 일가족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
최근 몇 주 사이, 황도 사교계에서 단연 화제의 인물은 가르텐 공녀였다.
누구든지 그녀를 만난 이들은 쉽게 호감을 가졌고.
몇몇 이들은 추종자가 되기까지 했다.
덕분에 로웨나는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고 사교계에 입성한 영애로서는 이례적으로, 어느 파티에서든 구름 같은 인파를 끌고 다녔다.
그중에 많은 수가 늘 로웨나의 곁을 지키는 코넬 때문에 붙은 것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저는 크레티 백작가의 영애인…….”
“소공작님께서는 정말로 누님을 아끼시나 봐요.”
로웨나는 인파의 중심에 서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 파티장 한편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