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0화 (201/218)

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5)

“그랑디오르 공작님께서 오셨네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공자님은 누구죠? 별로 못 뵌 분 같은데.”

“아, 저분은 공작님의 동생분이신 리지드 님이세요.”

그랑디오르 전 공작과 소공작의 반란 사건 때.

사실상 그랑디오르 가문은 라이언의 공으로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가솔 전부가 라이언에게 감사하며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그 대표 격이 지금 모습을 드러낸 리지드였다.

리지드는 형과 달리 사교에 깊이 심취했었기에, 제 형을 배신자라 부르며 원망했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거의 미친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라, 그동안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난 5년간 라이언의 정성이 효과를 보였는지, 최근 리지드의 상태는 꽤 안정되었다.

라이언이 동생을 데리고 사교계 모임에 참석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니, 리지드?”

“…네. 공작님.”

리지드는 창백한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형이 아니라 공작님이라는 호칭에, 라이언은 잠시 쓰린 표정을 했다. 하지만, 곧 이마저도 지웠다.

사실 지금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나게 나아진 것이다.

1년 전만 해도 동생을 데리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오는 건 엄두도 못 냈었으니까.

그 정도로, 리지드에게 사교도의 사상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소녀가 사람을 구름떼처럼 달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옆에서 코넬이 에스코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넬은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며 라이언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그렇군. 코넬. 황녀님과 관련된 행사가 아닌 곳에서 만나는 건 정말로 오랜만이군.”

이들의 몇 안 되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사교 모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지만, 황녀와 연관된 행사에는 꼬박꼬박 참석한다는 것.

때문에 라이언과 코넬, 파비엘까지 묶어서 ‘황녀궁 그림의 꽃’이라고 부르는 별명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황녀의 추종자로 유명하고, 다른 영애들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다른 영애들에게는 그야말로 그림 속의 꽃 같다며 붙은 별명이었다.

“뭐, 근래에 자네는 꽤 자주 모습을 보인다고 듣긴 했지만.”

“예, 아무래도 모실 분이 계신 터라.”

“……?”

이 말에서 라이언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말한 당사자인 코넬은 위화감을 전혀 모르는 듯 말을 이었기에, 라이언도 그냥 흘려 버리고 말았다.

“누님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누님. 그랑디오르 공작님이십니다.”

“처음 뵙습니다. 로웨나 가르텐이라고 합니다.”

“라이언 그랑디오르입니다.”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라이언은 로웨나를 보고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한데, 공녀. 우리 전에 뵌 적이 있었던가요? 어쩐지 낯이 익은데.”

“…전 계속 시골에서만 자라 공작님을 직접 뵐 기회는 없었답니다.”

옆에서 로웨나의 추종자인 다른 영애가 소리가 다 들리도록 떠들었다.

“어머, 공작님! 그건 너무 흔한 레퍼토리가 아니신가요?”

“맞아요! 만나자마자 벌써…….”

그제야 라이언은 자신이 지금 한 말이, 굉장히 센스 없는 작업 멘트처럼 들렸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본인은 그저 느낀 바를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아, 이런 실례를 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웃는 로웨나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든 이들은 라이언이 로웨나에게 호감을 보였음을 기정사실로 밀어붙였다.

“공작님. 아직 가르텐 공녀께선 이 무도회의 첫 춤을 안 추셨답니다.”

“엄청나게 좋은 기회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며 우후후 웃는 소녀들은, 평소에는 라이언의 파트너가 되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이언이 로웨나에게 춤 신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로웨나의 옆에 서 있던 코넬마저 말을 얹었다는 것이다.

“공작님이시라면, 제가 누님의 손을 잠시 양보해도 되겠지요.”

라이언은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코넬이 만난 지 얼마 안 된 의붓누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은, 정말 의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였다. 굳이 장난스럽게 이렇게 물은 것은.

“누이를 꽤 아끼나 보군?”

“당연한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엷게 웃는 코넬의 모습을 보고, 라이언은 위화감이 더더욱 강해지는 걸 느꼈다.

결국, 라이언은 떠밀리듯 로웨나의 손을 잡고 파티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

“그러고 보니까 요즘 황녀궁이 좀 한산하네?”

이렇게 물어온 건 오빠였다.

나는 지쳐서 톡 쏘아 주었다.

“무슨 소리야? 어디가 한산해? 눈코 뜰 새 없이 난리 난 거 안 보여?”

내 말 대로였다.

엘제와 시녀들을 비롯해, 가장 말단 하녀들까지 바빠서 영혼이 날아갈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빠놈은 태평하게 앉아서 저렇게 말하고 있다니.

게다가 생각해 보니까, 이 난리에는 오빠의 탓도 좀 있지 않나?

“뭔가 양심의 가책 안 들어?”

주변에서 바삐 일하고 있는 궁인들을 가리키며 물었을 때.

오빠는 뺀질뺀질하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면 내가 우리 궁 궁인들 보내 줄 테니, 바통 터치하고 쉴래?”

“아니요!”

“절대 못 맡깁니다! 우리 황녀님이라구요!”

“우리 황녀 전하의 책봉식이라는 중대한 일은, 반드시 이 손으로!”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들 사명감과 의욕에 불타 재가 될 지경이었다.

알라나는 드레스를 연이어 50벌을 만드는 기염을 토하고는, 그대로 실려 나갔다.

마력 고갈로 내가 응급처치까지 해 줘야 할 정도다.

그런데도 실려 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아직! 아직 모자랍니다! 이 정도 완성도의 드레스로는 황녀님의 책봉식에 어울리지가……!”

오빠는 으쓱하며 나를 보았다.

“저러는데 어쩌겠어.”

“……그나저나 한산하다니, 진짜 무슨 말이야?”

“아. 다른 의미로 한산하다는 거지.”

무슨 의미?

오빠의 눈에 흉흉함이 잠시 스쳤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놈들이 요즘 거의 안 보이잖아.”

아, 누굴 말하는 건지 알겠다.

“원래 그렇게까지 자주 안 왔어. 일이 있을 때만 온 거지.”

“진짜 내 동생은 이 부분에만 이렇게 둔해서 어쩌면 좋지. 지금 연애는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

“내가 어디가 둔해! 나 예민하거든? 아주 날카롭거든?”

코넬이 날 좋아했다는 거야 알지만, 그건 애기 시절 옆집 누나 보는 설렘 같은 걸 착각하고선 아직 못 잊은 거고.

라이언이야 내 기사고.

피비는 내 동생 같은 애인걸.

내가 이 날카로운 사실들을 지적하자, 오빠의 표정이 아주 복잡 미묘해졌다.

“내가 그놈들을 조금이라도 동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

그때 오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계속 그렇게 둔하기만 하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고.

미하일이 응접실로 웃으며 들어왔다.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중입니다.”

“……벌써 다 이긴 것처럼 굴지 마라.”

오빠의 구박에 미하일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미하일에게 찰싹 붙으며 오빠에게 말했다.

“미하일 괴롭히지 마!”

“나는 괜찮아. 리샤.”

이렇게 말하면서도 미하일은 눈썹을 길게 늘어뜨린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더없이 처연해 보이는 표정.

나는 오빠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빠, 또 나 없는 데에서 애 구박한 거 아냐?”

“아니라니까, 리샤.”

“미하일 너는 너무 착하고 물러서 안 된다니까!”

오빠는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져 죽겠다는 듯이 외쳤다.

“진짜! 내가 그때 저놈 말에 넘어가서 도와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맞아, 리샤. 봄의 축제 때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어떤 말을 들어도, 어떤 취급을 받아도, 리샤 옆에만 있을 수 있으면……!”

다시 오빠가 옆에서 복장이 터져 죽겠다며, ‘저, 저 도둑고양이!’가 어쩌고 해댔다.

그러고 보면 가족들 다들 비슷한 이미지로 미하일을 보고 있었다.

왜 다들 오해하나 몰라.

미하일이 얼마나 착하고 순한데. 그래서 늘 걱정일 정도인데 말이다!

내가 이 생각을 그대로 다시 말했고. 

그러자 오빠는 진짜로 혈압이 올라 쓰러지겠다는 듯이 굴었다.

미하일은 여전히 예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바쁘지만 평온한 나날이었다.

***

라이언은 로웨나와 춤을 추는 동안 자신이 왜 기시감을 느꼈는지 잊었다.

그리고 어쩐지 멍한 상태로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돌아왔을 때.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저어, 공녀님. 제게 공녀님과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로웨나에게 춤 신청을 한 이는, 바로 리지드였기 때문이다.

늘 파리하고 의욕이 없던 동생의 눈이 이렇게까지 열정에 타오르는 모습을, 라이언은 실로 오랜만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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