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6)
의외라 생각하면서도 라이언은 기쁘게 생각했다.
사교의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던 동생이다.
겨우 나아진 뒤에는, 극도로 우울해하며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성장한 리지드가 이렇게 여성에게 춤 신청을 하는 경우는 아예 처음이었다.
때문에 라이언은 약간의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로웨나의 손을 잡은 채 홀로 나아가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일찍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라이언은 동생의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5년 전에는 정말 미안했어, 형.”
“리지드?”
라이언의 놀란 눈을 보며, 리지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라이언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동생의 표정이었다.
외조부와 부모의 영향으로 사교에 물들기 전.
천진난만하고 마음 약했던 동생.
리지드는 환하게 웃었다.
“전부 형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믿어 준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그야말로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었다.
라이언은 감격에 겨워 동생을 끌어안았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리지드. 다행이야.”
이전의 리지드는 형의 포옹을 격렬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의 동생은 라이언을 마주 안아 주었다.
“형. 그분께 감사드리고 싶어.”
“응? 그분이라니. 무슨 소리니?”
“가르텐 공녀님. 그분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는데. 그분과 손을 잡고 가까이 있을수록…… 점점 내 의식이 또렷해졌어.”
“그게 정말이냐?”
“응. 그러니까 그분을 또 뵙고 싶어. 감사를 전하고 싶기도 하고……, 그분을 더 뵈면 내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해.”
“그래. 알았다. 형이 가르텐 저에 요청해 보마.”
“신기한 일이지. 황녀님도 어떻게 해 주지 못하셨는데 말이야.”
“…….”
그날 이후.
그랑디오르의 두 형제가 가르텐 저에 드나들며, 종종 공녀를 만나는 것은 꽤 화제가 되었다.
***
나는 의아한 얼굴로 라이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라이언, 지금 몇 시간째 일하는 거야?”
“예?”
라이언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 질문에 라이언은 한 발짝 늦게 헤아려 보더니, 곧 대꾸했다.
“47시간이 좀 넘은 것 같군요.”
“그치? 좀 이상하다 싶어서 확인한 거야. 꼬박 이틀을 집에 안 들어가고 있는 거잖아. 괜찮아?”
라이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전혀 이상 없습니다. 요즘 좋은 일이 있다 보니, 들떠서 그런 모양입니다.”
“좋은 일?”
“예. 황녀님의 책봉식이 곧 아닙니까. 제국 전체의 기쁨이죠.”
“그런 거 말고.”
“아, 개인적으로도 좋은 일이 있는 건 맞습니다. 동생의 상태가 나아졌거든요.”
“아, 그 둘째?”
“예.”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은 진심으로 기뻐 보여서, 나도 함께 기뻐해 주었다.
라이언이 사교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생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는 걸, 잘 아니까.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상태 이상 해제나 저주 정화로는, 사교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것까지 어떻게 해 주지는 못하니까.’
그건 본인이 선택한 믿음의 문제였으므로.
“막내도 이젠 영지에서 올라오라고 해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진짜 다행이네.”
라이언은 둘째 동생의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막내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둘을 떨어뜨려 두고 있었다.
동생들에게 가진 극심한 죄책감 중에는 그것도 있었다.
가족들이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힘든 일인지, 나는 잘 알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라이언을 축하해 줄 수 있었다.
“축하해, 라이언.”
“감사합니다. 황녀님.”
그리고 라이언은 지나가듯 근래 몇 번 들어본 이름을 언급했다.
“전부 가르텐 공녀 덕분입니다.”
***
파셀 백작가의 귀염둥이 막내인 파비엘은 근래 14년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맞이했다.
‘황녀님께서…… 정말로 나스카의 왕자와 교제를 시작하셨다니.’
소년은 진심으로 실의에 빠졌다.
황궁 소식에 밝은 부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는, 이삼일 정도 식사마저 거를 정도였다.
막둥이를 아끼는 가족들은 한마음으로 소년을 위로하려 애썼다.
“걱정 말려무나, 피비. 너도 황녀님도 아직 어리니까.”
“네게 다른 좋은 인연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하지만 황녀님보다 멋지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한 분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파비엘은 자신이 언제부터 황녀를 사모하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이미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걸음마를 하고 말문이 트이기 전부터, 황녀를 보았으니까.
그때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황녀를 마음에 품어왔다.
하지만 아나트리샤 황녀는 자신을 그저 어리고 귀여운 동생으로만 대했다.
그리고 결국은…….
하지만 실의에 빠진 것과 별개로 여전히 소년에게 황녀는 가장 큰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스쳐 지나가던 소녀들의 말 속에서 누군가에 대한 언급을 바로 알아채고 말았다.
“……황녀님도 정말 너무하시지.”
“그러니까요. 희망 고문만 하면서 뛰어난 공자들은 전부 독점하고 있었잖아요.”
“진작 마음을 정하고 놔주셨으면 다들 다른 짝을 찾았을 텐데.”
“놔주긴 또 싫으셨던 모양이죠. 욕심이 많으시잖아요.”
“그거 들었어요? 나스카의 왕자와 교제를 하면서도, 그랑디오르 공작이나 가르텐 소공작과도 만남을 이어 가신다는 거요.”
“세상에, 그러면 그건 양다리 수준조차도 아닌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고, 악의적인 뜬소문이었다.
아직 감정을 제어하는 데에 익숙지 못한 파비엘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지금 감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영애들!”
소곤거리던 귀족 영애들은 파비엘을 보고 놀란 토끼눈을 했다.
“파, 파비엘 경?”
“파셀 공자가 왜 여기에?”
“설마 숙녀들의 대화를 훔쳐 들으신 건가요?”
“어쩌면 이렇게 무례할 수가……!”
“무례한 건 당신들이 아닙니까! 감히 황녀님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다니!”
파비엘의 감정이 격해지며,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멀쩡하게 이야기하던 한 영애가 갑자기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꺄악! 시멜 영애?!”
“정신 차려요!”
“눈을 떠 봐요! 어서 의사를 데려와!”
갑작스러운 상황에 파비엘은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쓰러진 영애 주변의 친구들은 한목소리로 파비엘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연약한 레이디를 이렇게 겁박하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설마 황녀님께서 이러라고 시키시기라도 한 건가요?!”
“갑자기 황녀님을 끌고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건 전적으로 나 개인의 일입니다!
당황한 와중에도 파비엘은 아나트리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했다.
저들이 감히 황녀의 험담을 누구든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한 것은 사실이고.
황녀와 상관없이 자신 혼자 나섰다가 일이 생긴 것도 틀림없었으니까.
영애들의 비명과 앙칼진 비난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가르텐 저.
가르텐 공녀가 처음으로 주최한 티 파티 자리였던 것이다.
가르텐 공녀의 영향력이 조용히 넓어지며,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영애의 파티치고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리고 이렇게 소란이 일자, 자연스럽게 파티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요?”
“로웨나 공녀님!”
“공녀님이 오셨어!”
로웨나 가르텐은 좌우에 마치 트로피처럼 두 고귀한 가문의 젊은이를 대동하고 있었다.
의붓동생인 가르텐 소공작, 코넬.
그리고, 그랑디오르 공작의 동생 리지드.
그 뒤로는 가문의 명성과 권력 순으로 도열한 영애들과 영식들이 구름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로웨나는 사정 설명을 듣고, 직접 다가와 쓰러진 영애를 살폈다.
가르텐 저의 의사가 불려와 영애가 그저 놀랐을 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진단해 주었다.
그러자 영애들이 로웨나에게 마구 하소연했다.
“공녀님! 들어보세요, 파셀 공자가 저희에게……!”
“시멜 영애가 쓰러진 것도, 저 사람이 너무 험한 말을 해서예요!”
마치 그녀에게 판결을 바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녀들의 부탁에, 로웨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맑은 물빛 눈동자가 파비엘을 향했다.
“영애들의 말이 정말인가요, 파셀 공자?”
“저는 영애들이 근거 없이 황녀님의 험담을 하는 걸 듣고, 이를 막으려 했을 뿐입니다. 겁박한 적도, 과하게 화를 낸 적도 없습니다.”
파비엘은 당당했다.
사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영애들은 파비엘이 뻔뻔하다며 더욱 화를 냈다.
로웨나에게 자신들의 편을 들어달라며 매달리는 것이 기이할 정도였다.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신뢰가 엿보였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감히 황실에 대해, 황녀님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험담하던 이들을 본 적 있었나?’
없었다.
황실의, 특히 황녀에 대한 지지와 인기는 대단했기 때문이다.
황실이 실정을 저지른 적도 없었다.
때문에 저런 의견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파비엘이 놀라고 분노한 데에는 그 이유 역시 컸다.
소년이 이 깨달음에 의아해하던 차였다.
로웨나 공녀가 의외의 말을 했다.
“영애들이 잘못하셨네요. 제 티 파티에서 감히 황녀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다니요. 그랬다간 제가 황녀님께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알려질 수도 있겠어요.”
그 말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영애들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그리고, 로웨나는 다시 파비엘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파셀 공자. 공자가 나서 준 덕분에 오해를 막았어요.”
“아, 그건…….”
파비엘이 연달아 벌어지는 의외의 상황에 굳은 사이, 로웨나가 갑작스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환하게 웃는 로웨나의 눈매가, 꼭 누군가를 닮은 것 같다고.
파비엘은 조금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