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7)
영애들은 허망하리만치 쉽게 꼬리를 내렸다.
조금 전 파비엘을 매섭게 몰아붙이던 기세는 남의 것인 양.
로웨나는 겨우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말이다.
누구든 위화감을 느끼는 이가 하나쯤 있을 법한 상황.
그럼에도 이 구도가 이상하다 느끼는 이는 없었다.
“역시 가르텐 공녀님이세요.”
“공명정대한 가르텐다워요.”
“공녀님의 단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다니. 대단한걸요.”
로웨나 가르텐이 입양된 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처음부터 고귀한 가르텐의 공녀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파비엘은 이 이질감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또한 불가항력이었다.
코넬이나 라이언처럼.
***
세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주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녀님. 요즘 에아루스 소후작이 안 보이네요?”
“응? 아. 내가 시킨 일이 있어서 그래.”
“저를 안 끌고 간 걸 보면 대장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세실리아는 몇 년이 지나도 자신을 노려보며 무섭게 망치질을 해대는 아멘다에겐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녀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가벼운 의도로 물었다가, 아나트리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건 궁금해한 적 없는 것처럼.
대신 해야 할 일이나 했다.
“조금 전에 도착한 전서구들입니다. 전부 긴급 표시가 붙어 있었어요.”
그녀가 아나트리샤에게 건넨 편지들은 특수한 봉인 마법이 걸린 것들이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 전서구 등을 통해 이런 기밀문서들이 황녀궁에 우르르 몰려들었고. 또 그만큼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세실리아는 그 내용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그녀가 아나트리샤의 시녀로 일한 지도 벌써 10년이다.
없던 눈치가 길러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조금 전 아나트리샤가 말해 줄 눈치가 아니자, 바로 호기심을 접고 업무와 관련된 일로 화제를 돌린 것처럼.
전서구의 내용을 유심히 살피다가 부드럽게 웃는 아나트리샤를 보고 오싹했을 뿐이다.
10년을 곁에서 모셨더니, 황녀의 표정을 제법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웃음은 이런 의미였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박살 나겠구나.’
저런 미소의 아나트리샤가 얼마나 무서운지, 세실리아보다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직접 당해 봤으니까.
새삼 그때 자신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고. 운도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실리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
황녀의 책봉식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한 백작가의 파티에서, 로웨나는 추종자들에 둘러싸인 채 걷고 있었다.
그 인파는 지난 한 달간 놀랄 정도로 늘어나 있었고.
그들의 중심에는 사교계의 영애들이 선망하는 귀공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로웨나의 의붓동생인 가르텐 소공작 코넬.
그랑디오르 공자인 리지드. 그리고 종종 동생과 함께 가르텐 저에 오간다는 라이언.
거기에 최근에 한 명이 더 늘었다.
“어, 파셀 백작가의 막내 공자 아닌가요?”
“얼마 전에 그랑디오르 공작님과 함께 가르텐 공녀가 파셀 백작가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는데…….”
“파비엘 경까지 가르텐 공녀님의 추종자들 중 하나가 된 건가요?”
“세상에. 가르텐 공녀를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들은 전부 공녀의 추종자가 되네요. 신기해라.”
“우리 공녀님은 충분히 그 정도 인품이 되시니까요.”
사방에서 놀라움과 의혹의 말들이 오고 갔고.
로웨나에게 우호적인 의견들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졌다.
그리고 누구에게 우호적이든, 황녀와 가르텐 공녀를 비교하는 말들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 로웨나의 주변을 지키는 청년과 소년들 대부분이 황녀의 추종자로 유명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공자님들이 이제 모두 황녀님이 아니라 가르텐 공녀를 따르는 걸까요?”
“최근에 황녀님께서 나스카의 왕자와 가까이 지내신다고도 하니까요.”
“맞아요. 저들도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그래도 황녀님이신데.”
“그러고 보니, 요즘 황녀님이 사교계에 잘 안 나오시지 않아? 무슨 일 있는 걸까?”
“그야 책봉식 준비로 바쁘시니까…….”
“아. 맞다. 황녀님의 책봉식이 얼마 안 남았었죠. 이런 중요한 일을 왜 자꾸 잊어버릴까요.”
조금 이상한 일이긴 했다.
황녀가 그동안 후계자로 대우받아 온 건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책봉식을 치르는 건 보통 수준의 화제가 아니었다.
제국의 중대사를 넘어서,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큰 관심거리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화제가 되어야 할, 아나트리샤 황녀의 책봉식의 존재감이 옅었다.
그전까지 황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얼마나 화제가 되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근래에 들어서 이상할 정도로 황녀의 존재감과 영향력, 주변의 관심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차지했다.
황녀의 책봉식 문제보다, 가르텐 공녀가 빈민구제 사업을 시작했다더라.
직접 빈민가에서 빵을 나눠주고 있다더라-는 이야기가 더 화제가 될 정도로 말이다.
‘뭐지?’
이게 좀 이상하다는 사실을 떠올린 한 귀부인이 새삼 놀랐다.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직 황녀님의 책봉식에 참석할 준비를 다 못했……!”
하지만 그녀의 경악은 순식간에 칼로 잘라 낸 것처럼 사라졌다.
바로 물처럼 파란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말이다.
어느새 가르텐 공녀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아. 공녀님……. 이렇게 가까이서 뵐 수 있다니, 영광이에요.”
“나도 반가워요, 부인. 내 파티에 참여해 주실 거죠?”
“당연하죠!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귀부인의 눈이 순식간에 흐리멍덩해졌다. 그 상태로 부인은 활달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한번이 아니었다. 파티 중에 이상함을 깨달은 이들 대부분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
무도회장을 손쉽게 손에 넣은 로웨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사람들 사이에 독과 같은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저와 친한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제게는 특이한 힘이 있답니다.”
“아, 그것 말씀이시군요. 누님.”
코넬이 자연스럽게 의붓 누이의 말을 받아, 대신 설명해 주었다.
“종종 꿈을 꾸신다고요. 그리고 그 꿈의 내용이 현실에서 맞아떨어지신다고 하더군요.”
“세상에. 예지몽 말인가요?”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라넬린 영애의 약혼자가 따로 애인을 둔 것도 공녀님이 알려 주셨다면서요!”
“제가 어머님의 유품을 잃어버렸을 때도 정확히 위치를 맞추셨어요! 그땐 얼마나 감사했는지…….”
놀라움과 선망의 눈초리가 병이 번지듯 퍼져나갔다.
“공녀님은 역시 특별하세요.”
“황녀님께서도 그런 능력은 가지지 못하셨다고 하던데!”
“혹시 저에 대한 미래의 꿈을 꾸신 적은 없나요?”
“아쉽지만, 영애에 대한 꿈은 꾼 적 없어요. 하지만…….”
로웨나는 일부러 중간에 말을 끊어서, 주변의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어떤 분과 관련된 꿈을 꾸었답니다.”
“누구의 꿈을 꾼 겁니까?”
“어떤 분이라니…….”
로웨나의 목소리는 묘한 울림을 가지고 홀 안으로 퍼져나갔다.
“이번엔 아주 추상적인 꿈이었어요. 그리고 아주…… 불길한 꿈이기도 했죠.”
“불길한……?”
삽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그 속에서 로웨나만이 웃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는 꿈속에서 울리는 계시처럼, 몽환적으로, 하지만 낙인을 찍는 것처럼 뇌리에 박혔다.
“어떤 존재가 이렇게 속삭이더군요. 부정한 아이가 잘못된 자리에 오르면, 태양이 가려질 것이고. 이로 인해 수많은 저주가 넘쳐흐를 것이다.”
누가 들어도 불길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경악과 두려움이 사방으로 번졌다.
그리고 이날부터,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이 예언에 대한 소문이 사방을 휩쓸기 시작했다.
악몽의 그림자가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보 역시 황궁으로 들어갔지만, 다른 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했을 황궁은 조용하기만 했다.
어쩐지 기이한 일이었다.
마치,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
밤. 황족의 예복이 아니라, 허름한 옷을 입어 신분을 숨긴 루퍼스리안이 그랑디오르 공작저로 들어섰다.
그는 친구에게서 의외의 연락을 받고 온 참이었다.
공작저의 곁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비밀리에 황자를 안으로 들였고.
사람의 눈이 적은 곳으로 안내했다.
“레오. 갑자기 왜 나에게 간자 흉내를 내게 하는 거지?”
“어서 오십시오, 황자님.”
방에 들어선 루퍼스리안은 놀랐다.
이 자리에 라이언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이언의 옆에 서 있는 리지드 그랑디오르도 의외였고.
또 맞은편에 선 파비엘은 더욱 놀라웠다.
“뭐지? 이 멤버는?”
리지드만 빼서 황녀궁으로 옮기고, 미하일이 얼쩡거리게 만들면.
딱, 루퍼스리안이 싫어하는 도둑놈 후보자들 무리가 완성된다.
최근에 황궁에 잘 안 보인다 싶었는데, 왜 이렇게 모여 있단 말인가.
‘다 같이 모여서 미하일 견제라도 해 보려는 건가?’
정말 그런 거면, 약간 놀려줄 겸 도와줄 용의도 있었다.
그 순간.
파비엘이 정중한 손길로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나온 소녀를 보고, 루퍼스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