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8)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낯선 여자의 이목구비에서, 루퍼스리안은 익숙함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코넬이나 가르텐 공작과 닮은 외모.
거기에 최근에 이상하리만치 자주 들려오던 소문의 주인공을 연결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르텐 공녀?”
“저를 알아봐 주시다니, 기뻐요. 황자 전하.”
로웨나의 입가에 희열 어린 웃음이 번졌고. 물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한 반응이라기엔 과할 정도였다. 그 상대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청년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시끄러우니 모를 수가 없어서 말이지.”
하지만 로웨나의 격한 반응과 달리 루퍼스리안의 대꾸는 싸늘했다.
로웨나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 끝이었다. 루퍼스리안은 바로 몸을 틀어 라이언을 책망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랑디오르 공작? 동생의 일로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며 비밀리에 만나자고 해 놓고, 왜 저 여자가 여기서 나오는 건가?”
루퍼스리안의 힐난에 대답한 것은 라이언이 아니었다.
로웨나는 두 손을 고이 모아 쥔 채로 나섰다.
“죄송해요, 황자 전하. 공작님을 너무 탓하지 말아 주세요. 공작님은 제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신 것뿐이랍니다.”
말은 사죄를 가장하고 있으나, 어조와 태도는 더없이 뿌듯해 보였다. 가슴을 내밀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지극히 자랑스러워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 뒤에 선 라이언은 아주 평온하게 대꾸했다.
“공녀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는 현 상황의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
루퍼스리안은 공작저에 들어설 때부터 느낀 미약한 불안감과 이질감이 구체화되는 걸 느꼈다.
라이언만이 아니었다.
그전에도 존재감이 없던 리지드는 차치하고서라도.
파비엘과 코넬까지.
저들이 하나같이 동생을 사모하며 그 주변을 떠나지 않던 날파리들임은 분명했으니까.
루퍼스리안은 청년, 소년들을 쭉 노려보며 말했다.
“요즘 잘 안 보인다 싶었더니, 여기 다 모여 있군. 그새 줄을 갈아탄 건가? 역시 지조도 없는 놈들이야. 리샤의 그림자도 밟을 자격 없어.”
그러자, 내내 멍하니 서 있던 남자들 사이에 미약하지만 생기가 살아났다.
평소의 정상적인 반응과 비슷한 대꾸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황녀님 외에 누구에게……?”
“제 대쪽 같은 절개를 의심하시다니 슬픕니다.”
“갈아타다니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루퍼스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발끈한 듯 뱉는 말들은 하나같이 평소와 같았다.
“뭐야, 이것들 왜 이래?”
그때, 얼굴을 흉악하게 찡그린 로웨나가 나섰다.
그녀의 그림자가 길고 너르게 펼쳐지더니 응접실의 바닥을 꽉 채웠다.
마치, 이 방에 모인 자들의 그림자를 먹어치우려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총기가 돌아왔던 청년들의 눈빛이 다시 흐리멍덩해졌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들이 한 말을 비슷하게, 하지만 상대를 전혀 다르게 바꿔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누님 외에 어떤 분도 친근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제 절개는 오로지 공녀님만을 향할 뿐이죠. 의심하시면 슬픕니다.”
“갈아타다니요! 저는 오로지 로웨나 님의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친애와 흠모의 말들은, 루퍼스리안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여태껏 자신의 동생에게 귀찮을 정도로 쏟아지던 감정이고 말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투와 열기 그대로 이름만 바뀐 채 눈앞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이것은 어딘지 모르게 불쾌감과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루퍼스리안은 코웃음 치며 마력을 움직였다.
그러나.
“……!”
눈과 얼음의 마력은 물론, 태양의 마력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사교도의 결계!”
태양의 마력까지 묶어 놓는 부정의 마력.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루퍼스리안은 이미 가지고 있었다.
우웅!
루퍼스리안의 손안에서 백금빛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트라.
루스템 황족들만이 가진 절대적인 위력의 무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창은 시린 은빛 대신 이글거리는 붉은 빛을 품고 있었다.
“내 앞에서 잘도 사악한 힘을 드러냈군.”
로웨나는 황홀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당신도 올바르게 인도해 드릴 테니까요. 그 끔찍한 계집애의 손에서 말이에요.”
“지금 감히 내 동생을 두고 뭐라고 한 거지?!”
루퍼스리안의 분노는 서슬이 파랬다.
흘러넘치는 살기에, 로웨나에게 세뇌된 남자들이 움직였다.
자신의 소중한 레이디를, 혹은 주인을 지키는 것처럼
루퍼스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체없이 달려들었다. 단번에 저 기이한 힘의 근원인 로웨나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캉!
놀랍게도 아스트라가 튕겨 나왔다.
로웨나 본인의 힘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로웨나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결계의 주인이 허락하면, 사교의 힘이 아닌 다른 종류의 마력도 발현이 가능한 모양이다.
라이언과 코넬, 리지드에 파비엘.
모두 뛰어난 마력의 소유자들이다.
지금 루퍼스리안의 마력은 절반이 묶인 상황이고.
넷의 마력에 로웨나의 마력이 더해져, 루퍼스리안만을 노린다.
로웨나의 몸에서 보랏빛이 감도는 거대하고 사악한 부정의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만한 힘은 이미 루퍼스리안이 본 적 있는 사교도의 추기경조차 드러낸 적 없었다.
루퍼스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너는……!”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로웨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
이튿날.
아나트리샤는 의아해했다.
“오빠가 자리에 없다고?”
“예, 황녀 전하. 어젯밤 침수 드실 때까지는 분명히 계셨는데, 오늘 아침에 깨우러 가니 방이 비어 있었습니다.”
카렐만이 난처해하며, 황녀궁으로 찾아와,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이언이랑 대련하러 간 것 아니야?”
루퍼스리안은 종종 유일한 친구인 라이언과 만나거나 대련을 하려 사라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도 그런 줄 알고 그랑디오르 공작저에 가장 먼저 확인을 해 보았습니다만, 안 들르셨다더군요.”
“흐응?”
확실히 드문 일이긴 했다.
황궁 외에 그랑디오르 공작저를 제외하면, 루퍼스리안이 사적으로 갈 곳은 없다시피 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세실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혹시 황자 전하께도…… 생긴 게 아닐까요?”
“응? 뭐가?”
“그러니까, 애인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는 세실리아의 눈빛에는 ‘대박 사건!’이라는 글자가 반짝거렸다.
“황자 전하의 나이도 벌써 스물이 넘으셨잖아요! 오히려 늦은 감이 있으시죠!”
“그렇긴 하지요!”
세실리아의 지적에 카렐만 역시 화색을 띠었다.
“음. 하지만 오빠가 그럴 만한 주변머리가 될까.”
아나트리샤는 떠올렸다.
전생에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모쏠이었던 오빠를.
거기에 이번 생에서 22년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눈물 나는 모쏠 기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제 모쏠 아니니까!’
외궁에 있을 미하일을 떠올리자, 아나트리샤의 두 뺨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세실리아도 한창 연애 중이라고 들었다.
굳이 루퍼스리안의 외박 소식에 결론이 저쪽으로 가는 건, 아마 본인이 한창 깨가 쏟아지고 있어서일 거다.
‘진짜면 오빠에게도 드디어 봄이 오는 건가?’
좋은 일이었다.
두 번째 삶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어 간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일 테니.
아나트리샤는 진심으로 오빠의 30년+22년 만의 모쏠 생활 청산을 기뻐하고 축하해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전에 잔뜩 놀려주고.’
하지만 세 사람이 흥미로운 사건에 기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루퍼스리안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처럼, 말도 없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자궁으로 향했을 때.
전혀 의외의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다.
***
황자궁으로 향하는 입구에서, 아나트리샤는 처음 보는 소녀와 마주쳤다.
그 주변에 마치 보호벽이라도 두른 것처럼 아나트리샤가 잘 아는 청년들과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말이다.
세실리아가 옆에서 주인에게 속삭였다.
“황녀 전하. 그 사람이에요. 가르텐 공작부인이 데려왔다는 양녀요.”
아나트리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 들은 적 있어. 요즘 사교계에서 꽤 인기가 많다던데.”
“황공합니다. 가르텐의 딸이 황녀님을 뵙습니다.”
로웨나는 곱게 인사 올렸다.
그 행동이 어쩐지 묘하게 불손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런데 가르텐 공녀가 여긴 어쩐 일이지?”
로웨나는 승리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기쁘게도 황자 전하께서 저를 초대해 주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