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09)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가 영애를 초대했다고? 금시초문인걸?”
“사실이랍니다. 황녀님.”
로웨나는 친절하게 품속에서 황자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꺼내 보이기까지 했다.
루퍼스리안이 직접 그녀를 초대했다는 증거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황자는 유일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라이언조차 자신의 궁에 직접 초대한 적이 없었다.
대련을 이유로 황자궁의 수련장으로 부르거나, 공작저로 직접 찾아가는 정도가 다였던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귀족 영애를 초대한다니.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봐도 좋을 상황이다.
로웨나의 급조된 추종자들은 이 사실을 입으로 퍼 나르기 바빴다.
“황자 전하께서 자신의 궁에 누군가를 초대한 건 아예 처음 아닌가요?”
“그렇죠! 게다가, 여성분을 초대하다니, 정말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꺄아, 로맨틱해요!”
운명적인 인연으로 포장해, 필사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싶어 하는 듯한 태도였다.
‘……하는 걸 보면, 황궁 입구에서부터 일부러 소문내면서 들어왔다고 해도 놀랍지 않네.’
게다가, 눈에 익은 이들이 로웨나의 바로 곁을 지키고 있다는 점도 새로웠다.
그러나 놀랍진 않았다.
아나트리샤는 평온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꽤 있고 말이야.”
그러자, 코넬, 라이언, 파비엘 등의 청년과 소년들이 의례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앞을 다투어 달려와 아나트리샤에게 한마디라도 더 걸려고 노력했을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황녀에게 그런 적 없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굴고 있었다.
사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들이 황녀님 앞에서도 공녀님 옆에 딱 붙어 있네요. 신기해라.”
“황녀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에요.”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신 것 아닐까요? 나스카의 왕자를 선택하셨으면, 다른 공자들은 놓아주셔야 맞잖아요.”
“그러니까요. 설마, 자신은 연인을 두어도 다른 공자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까요?”
질투심에 조롱까지 섞인, 악의적인 말들이 기이한 용기에 힘입어 튀어나왔다.
백치로 오해받던 때 이후, 황녀에게 이런 식의 악의적인 조롱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마치 다들 숨기고 있던, 숭배받는 이에 대한 질투심과 악의를 누군가가 부추기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대단한 지위에 있는 이라도 저런 악의 넘치는 조롱이 집중되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로웨나는 이를 기대하듯 눈을 반짝이며 아나트리샤를 보았다.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파문 하나 없는 호수처럼 평온했다.
이런 하찮은 악의와 질투 따윈 아무리 증폭시킨다 해도, 자신에겐 티끌만큼의 영향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티 없이 맑은 청보랏빛 눈동자가 그 증거였다.
로웨나는 당혹감을 억눌렀다.
‘아냐.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리 없어. 이런 악의와 조롱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끔찍한데.’
사람은 자신에 비추어 남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로웨나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상황을, 적에게 그대로 겪게 해 주려 한 것이다.
그게 조금도 타격이 없을 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제 존재가 황녀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
“하지만 공자들이 이제 황녀님이 아니라 저를 따르는 것도, 또 황자 전하께서 저만 특별히 불러들이신 것도 제 탓은 아닌걸요.”
‘저는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 유달리 사랑받고 있을 뿐이랍니다’라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가련한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아나트리샤는 피식 웃었다.
“그게 네가 간절히 바라던 것인 모양이구나. 존재만으로도 주변에게 사랑받는 거.”
“……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할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로웨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불쌍해라. 그만큼 사랑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간절히 바라는 거겠지.”
내내 가련하고 사랑받는 공녀님을 연기하던 로웨나의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
아니, 여기선 일그러뜨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로웨나는 재빠르게 그렇게 판단 내리고,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너, 너무하세요, 황녀님! 아무리 제가 거슬리셔도, 어,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주변에 몰려든 이들은 하나같이 로웨나를 걱정하고 그녀의 편을 들었다.
감히 면전에서 황녀를 비난하고 원망할 만큼.
“공녀님께서는 그렇게 심한 말을 들을 짓은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님을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가혹하신 건, 공녀님이 한 말이 황녀님의 정곡을 찔러서 아닌가요?”
로웨나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비죽이 웃었다.
‘그래.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대귀족가의 후계자들이야. 아무리 황족이라도 이들 모두의 항의를 무시할 순 없어! 절대로!’
그때 내내 당당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아나트리샤가 슥-, 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손목을 잡아채어 당기자, 로웨나는 새된 비명을 울렸다.
“꺄악! 아파요! 용서해 주세요, 황녀님!”
로웨나에 대한 동정과 아나트리샤에 대한 비난이 들불처럼 번지려던 찰나.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널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죽지 않았다는 것도 예상한 바였고.”
그러자 로웨나는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낮게 속삭였다.
“흥.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주제에.”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로웨나의 조롱은 이어진 아나트리샤의 말에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 거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더라도 너를 소피아라고 착각해 주길.”
“……뭐?!”
아나트리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시스템 창이 없다고 해도 말이야. 내가 소피아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너 따위가 소피아라니, 착각하고 싶어도 불가능해.”
아나트리샤는 자신이 아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 그래, 에릴?”
로웨나는, 아니, 에릴은 얼굴을 한층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발악하듯 외쳤다.
“아니. 이젠 내가 소피아야! 그 멍청한 것의 영혼과 힘은 내가 흡수했다고! 내가 그걸 이겼어! 그러니 이제 내가 진짜 소피아야!”
***
갑작스레 나타난 가르텐 공녀.
게다가 그녀에게 감화되는 이들의 숫자는 너무 많았고.
속도도 지나치게 빨랐다.
아무리 미하일과의 설렘을 즐기고, 가족들과 실랑이를 하면서, 책봉식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 이상을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멘다를 비롯한 수족들이 진작 명을 받아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고.
하늘에 뚝 떨어진 듯한 ‘가르텐 공녀’에 대해 정보 역시 당연히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정체의 첫 번째 후보는 소피아였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뿜어내는 이가 있으면, 당연히 소피아인지부터 의심할 수밖에.’
로웨나라는 여자가 보이는 힘들을 보면 소피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행동을 보면 절대 소피아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너무 과시적이고 유치해.’
갑자기 얻은 커다란 힘을 마구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 어린아이 같았다.
소피아의 방식이 아니다.
소피아라면 철저하게 모든 걸 숨긴 채,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릴 테니까.
명예욕이나 소유욕 같은 건, 소피아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보다 완전한 멸망을 불러들이는 것이 몇 배로 중요하다고 생각할 테니까.
거기에 예외가 있다면 하나였다.
‘내 절망과 좌절을 원하겠지.’
그것이 유일하게 소피아의 사사로운 욕망에 가깝다.
갑자기 나타난 가르텐 공녀에게 사교계의 인기와 화제성, 그리고 남자들의 애정을 빼앗긴다고 해서 내가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받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그럴 거라는 걸 소피아도 알았다.
‘이건 소피아의 방식이 아니야. 하지만 힘은 소피아의 것.’
그러고 보면 나는 한 번 만난 적 있었다.
사교도와 연이 닿아 있고, 소피아를 닮은 외모의 아이.
아빠의 사생아라 주장하며 우리 가족을 찢어 놓으려 했던 존재.
그 아이가 소피아를 닮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단순히 행방을 알 수 없는 소피아의 대역을 하고 사라져도 되는 아이가 아니라면?
예를 들어, 소피아의 육체가 망가졌을 경우를 대비한 스페어로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일 가능성은?
게다가 하스티아에서 이상하게 사교도의 숫자가 적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시벨을 가장하고 있던 사교와 그 외 몇몇을 제외하면 지나치게 빈약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소피아가 없었는데도 엄청난 규모로 자라나 있던 제국 내 사교도의 규모와 비교하면 명백히 이상했다.
소피아가 그것만을 마련했다기 보단, 만일을 대비해 다른 뿌리를 숨겨 두었다는 게 더 가능성 높을 터였다.
하지만, 이것만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 에릴이 미친 듯이 웃으며 내뱉는 말들은.
“소피아 그년 따위는 내가 먹어치워 버렸다고! 그러니까 내가 진짜야! 나야말로 진정한 멸망의 사도이며, 성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력하며 고귀한 존재라고!”
로웨나, 아니, 에릴의 몸에서 소피아의 것보다 더욱 강력한 부정의 마력이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