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10)
나조차 이번만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막지 못했다. 그 정도로 놀라운 말이었던 것이다.
“네가…, 소피아를 먹었다고?”
“그래!”
에릴은 아주 자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었다.
저 미소는 미숙하고 단순했던 에릴의 것이었다.
소피아와는 달랐다.
‘설마, 정말로?’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
에릴을 그 지옥 같은 유형지에서 끄집어낸 것은, 아나트리샤의 예측대로 사교도의 잔당들이었다.
이제 몇 달 안에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인조차 체념하고 있던 때였다.
그들은 가짜 시체를 만들어 두고 에릴을 유형지에서 빼낸 다음, 안전한 아지트로 옮겼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그리고 그들은 에릴을 꽤나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반각성과 코어 이식으로 점점 무너져 가는 몸을, 제물을 써서까지 회복시키고.
아나트리샤가 봉인한 마력 코어를 다시 풀려 노력했다.
그 자체는 실패했으나, 덕분에 목전까지 왔던 죽음이 상당히 멀어졌다는 걸, 당사자는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에릴의 의식주는 유형지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몸이 회복되고 기운이 돌자, 아이는 바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내 종인 거지? 나를 모시는 거지? 그러면 어서 나를 황궁으로 데려가! 그곳이 내 집이야! 아바마마와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
카스톨트 황제에게 몇 번이나 부정당하고도.
그리고 이 비참한 유형지로 자신을 보낸 당사자가 루퍼스리안이라는 걸 알면서도.
에릴은 희망을 가졌다.
그들이 자신의 가족이니, 다시 찾아가면 자신을 받아주리라고.
하지만 사교도들이 에릴을 구해 온 이유는,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릇이 시끄럽군.”
“굳이 말을 할 수 있게 놔둘 필요는 없겠지요.”
“……어?”
에릴은 순식간에 목소리를 잃었다.
그들은 에릴을 목적 없이 구한 게 아니었다.
필요한 물건을 회수해서 잘 보관하려는 것에 가까웠다.
혹은 곧 잡아먹기 위해 가축을 살찌우는 것이거나.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을, 에릴은 갇혀서 지내야 했다.
만약을 위한 ‘그분’의 스페어로서.
‘싫어! 싫어! 싫다구!!!’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때가 왔다.
사교도의 잔당이 에릴을 구해 와 보호하며 대비하던 만약의 경우가.
하스티아에서 그들의 성녀가 아나트리샤에 의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소피아는 전 대륙에 준비해 둔 스페어 증 하나를 선택하여 스며들었다.
바로, 에릴에게로.
어두운 감옥 안에서 에릴은 검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스며드는 걸 느꼈다.
곧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악! 아아악! 놔! 날 놔줘! 싫어어!!!’
강대한 힘과 의지, 그리고 어마어마한 기억을 가진 존재가 에릴의 육체를 빼앗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에릴은 이겨 냈다.
그 존재를 짓누르고 자신의 몸을 지켜 내는 것을 넘어서, 도리어 그 힘까지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 에릴은 소피아의 강력한 부정의 마력과 그 영혼, 기억까지 일부 손에 넣었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목소리를 되찾았다.
“아하! 아하하하! 그래! 난 특별해! 특별한 존재라구! 이게 내 운명이었던 거야!”
어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두고 있던 사교도를 모조리 죽여 버린 뒤에, 제 발로 땅 위를 걸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달이 뜬 밤이었다.
세상이 그녀를 축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으로 나온 뒤에는, 자신이 정말로 오래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아가 타격을 입은 이후로 육체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고통스러운 기간이 예상보다 길었던 것이다.
그 기간은 무려 5년에 가까웠다.
긴 감금에 이어 소피아와의 주도권 쟁탈이 끝난 뒤 정신을 차렸을 땐, 에릴의 몸은 열일곱의 소녀로 성장해 있었다.
소피아의 기억과 힘이 섞여 들어 혼란한 가운데.
에릴의 자아를 선명하게 유지시켜주는 지주는 하나였다.
증오.
자신에게서 모든 걸 빼앗은 존재에 대한 증오였다.
‘아나트리샤!’
이번에는 그 밉살스러운 것에게서 모든 걸 빼앗아 주겠다.
그것이 바로, 에릴이 다시 생을 얻은 날 몸과 영혼을 걸고 한 맹세였다.
***
새로운 신분을 손에 넣고 스며드는 건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다.
어릴 때 홀덴 영애와 함께 황도로 올라오는 건 그렇게나 어려웠는데 말이다.
자신을 싫어하던 공작부인의 마음을 손에 넣어, 에릴일 때는 얻지 못했던 번듯한 가문과 지위도 손에 넣었다.
자신의 편을 드는 게 마땅했음에도 고개를 돌렸던 이들의 호의와 애정을 얻는 것도, 이번엔 너무나도 쉬웠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왜 과거엔 다들 자신을 싫어하고 배척하기만 한 걸까.
어쨌든 상관없었다. 이젠 전부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코넬, 라이언, 리지드, 파비엘.
하나하나가 다 만족스러웠지만, 가장 기뻤던 건 그들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 자신을 바라보던 파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에릴은 희열에 몸을 떨었다.
‘그걸 보면 넌 어떤 얼굴을 할까, 아나트리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것이다!
저 밉살스러운 황녀의 앞까지!
태양빛을 가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부정의 마력이 폭사했다.
“이젠 내가 진짜야! 널 죽여버리고 이 세상을 손에 넣을 진정한 성녀라고!”
두 번이나 아나트리샤 하나 이기지 못하고 패배한 소피아가 아니라.
소피아의 영혼을 꺾고 그 힘과 기억까지 모조리 손에 넣은 자신이야말로, 진짜 성녀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쾅---!
벽이 무너지고, 정원이 파헤쳐졌다.
아나트리샤는 에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면서 비웃었다.
“헛소리.”
“진짜라니까?! 믿고 싶지 않은 거야? 내가 소피아를 먹어치우고 돌아왔다니까, 두려운 거지?”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소피아라면 이렇게 유치하게 행동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너!!!”
“하지만 여전히 믿기 힘드네. 제대로 된 이름도 받지 못했던 너 따위 하찮은 것에게 소피아가 졌다는 건 말이야. 내가 너무 큰 타격을 줘서였을까?”
“이이익!!!”
에릴에겐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다.
‘에릴’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홀덴 영애가 자신의 딸에게 임시로 붙인 아명이었고.
홀덴 영애의 친딸은 소피아였으니까.
결국 에릴이라는 아명조차도, 그녀의 것은 아닌 셈이다.
아나트리샤는 놀랍게도 그녀의 약점이자 콤플렉스를 정확하게 찍어서 공격한 것이다.
에릴은 거의 발작을 하기 시작했다.
‘꼭 소금 맞은 미꾸라지 같네.’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위력만 강할 뿐 흥분해서 자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공격을 너무 쉽게 피해 냈다.
‘아, 이게 얘 약점이구나. 이성이 흐려질 정도로.’
아나트리샤의 산호색 입술이 말려 올라가며, 노골적인 비웃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네가 소피아를 이겨서 다행이야. 소피아보다는 네가 훨씬 상대하기 쉬우니까.”
“날 무시하지 마!”
에릴이 흥분한 사이, 아나트리샤의 아스트라가 금빛 활로 변해 세 대의 화살을 쏘아 보냈다.
집중이 흐트러졌어도 날아오는 화살을 못 볼 순 없었다.
정면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쳐 냈으나, 사각을 노리고 접근한 두 개의 화살은 놓치고 말았다.
퍽! 퍼벅!
“아악!”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렸다.
두 소녀가 강대한 마력을 뿜어내며 적대하기 시작한 순간.
주변에 있던 이들은 저마다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스스로를 보호하려 애썼고.
또 일부는 누군가를 보호하려 애썼다.
“공녀님!”
“안 돼!!!”
“어떻게 저런 짓을……!”
에릴이 상처 입은 것을, 자신의 상처보다 아파하고 분노하는 이들.
에릴이 가장 강력하게 세뇌를 걸어놓은 공자들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버려 가며, 에릴과 아나트리샤의 사이로 뛰어들려는 순간…….
누군가 갑자기 뛰어들었다.
백금빛 창이 바닥을 찍어 누르자, 얼음의 마력이 장벽을 만들어 방해꾼들을 막아냈다.
“꺼져. 날파리들.”
“황자님!”
푸른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가 공자들을 노려보더니, 곧 대치 중인 두 소녀를 향했다.
루퍼스리안은 빛과 어둠처럼 싸우고 있는 두 소녀 중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한 친애와 걱정으로 말이다.
부상의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에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루퍼스리안의 애정과 걱정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이미 네 오빠는 내 것이니까! 내가 빼앗아, 아니, 되찾아 왔단 말이야!’
그녀는 기쁘게 루퍼스리안을 불렀다.
“오라버니!”
그에 응하듯, 루퍼스리안의 신형이 사라졌다.
에릴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아나트리샤를 노려보며 외쳤다.
“그래! 이제 네 차례야! 하나뿐인 오라버니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너도 느껴 보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