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11)
***
라이언을 이용해 루퍼스리안을 공작저로 유인했을 때.
에릴은 이미 루퍼스리안마저 세뇌하는 데에 성공했다.
자신의 친구와 죄 없는 이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던 루퍼스리안이 결국 찰나의 틈을 허용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에릴이 쏘아낸 새카만 부정의 마력에 휩싸인 청년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 탁한 푸른 눈을 보며 에릴은 만족스럽게 웃었더랬다.
거의 하룻밤 내내 세뇌를 반복한 끝에 가능한 결과이긴 했지만 말이다.
“자아, 이제 말해 보세요. 저는 누구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내 목숨보다 먼저 지켜야 할 내 가족, 내 연인.”
“그래요. 맞아요. 이제야 제대로 날 봐주시는군요. 오라버니!”
강대한 마력을 가진 황자를 세뇌시킬 정도로 압도하는 일은 에릴로서도 꽤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특히나 루퍼스리안은 태양의 마력 소유자였으므로, 세뇌가 가능할지부터가 의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꼭 가지고 싶었는걸.’
에릴은 땀에 젖은 채 환하게 웃으며 루퍼스리안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매정하게 뿌리쳤던 황자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더없이 다정하게 마주 안아 주었던 것이다.
희열이 뇌리를 물들였다.
루퍼스리안의 애정을 손에 넣은 것도 기쁘고 즐거웠지만.
그보다 더 기대되는 것이 있었다.
‘이걸 보면 대체 어떤 얼굴을 할까? 얼마나 화가 나고 절망스러울까!’
물론 과거 에릴이 겪은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리는 없었지만.
그동안 자신의 것을 훔쳐서 행복을 누려 왔으니, 이 정도 대가는 치르게 해야 하지 않는가.
악의와 기대 어린 미소가 입가에 피어올랐다.
***
‘너도 똑같이 당해 봐야 해!’
에릴의 두 눈에 희열이 번뜩였다.
유형지에서도, 사교도들에게 갇혀서도, 소피아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우면서도.
이것만큼은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아나트리샤에 대한 증오.
마치, 자신의 탄생부터 누군가가 아나트리샤에 대한 증오를 일부러 집어넣어 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루퍼스리안의 탁한 푸른 눈동자가 엉겨 붙은 두 소녀를 향했다.
백금의 창이 날카롭게 휘둘러졌고.
푹!
피가 튀고, 고통이 가슴을 찔렀다.
“어?”
에릴은 경악하여 고개를 돌렸다.
세뇌된 루퍼스리안은 그녀의 명령에 복종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창끝이 꿰뚫은 것은 아나트리샤가 아니었다.
에릴 자신이었지.
“어, 어째서?! 오라버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평소의 총기를 되찾은 루퍼스리안이 내뱉었다.
“그 역겨운 오라버니 소리 좀 집어치워. 나는 리샤 외의 여동생 같은 건 둔 적 없다고! 특히나 너처럼 못생긴 것은 더더욱!”
가슴을 찌른 창끝에서부터 강력한 두 종류의 마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을 조각조각 내어 부숴 버리려는 듯한 얼음의 마력.
그리고 그 남은 파편마저 다 태워 재로 만들려는 듯한 불꽃의 마력.
두 마력의 상반된 힘이 나선처럼 회전하며, 에릴의 몸 내부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꺄아아악!!!”
에릴의 절망 어린 비명이 정원을 쩌렁쩌렁 울렸다.
***
오빠가 에릴을 꼬치로 만들고 있는 사이.
나는 미리 작전을 짠 대로 움직였다.
품속에 있던 물건을 꺼내어 던졌고. 내 아스트라로 그것을 찍어 부쉈다.
금빛으로 빛나던 수정이 ‘쩡!’ 소리를 내며 박살 나자, 그 빛은 내 아스트라에 스며들었다.
곧 금빛 사이로 무지갯빛이 아스트라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스트라는 그대로 형태를 잃고 꾸물꾸물거리더니, 곧 기묘한 모양을 취했다.
그건 내 몸의 절반만 한 망치였다. 크기는 크지만 재질은 말랑말랑했고, 디자인 역시 좀 귀여워서 내 거부감을 줄여 주긴 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손에 들고 있기 거북할 정도의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망치라니…….
좀, 아니, 꽤 많이 민망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갓 구운 빵처럼 말랑거리는 거대한 무지개 망치를 휘둘렀다.
누구에게?
에릴이 아니라, 에릴에게 세뇌당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망치가 재빠르게 남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뾱!
뾱! 뾱! 뾱!
일단, 라이언!
코넬! 파비엘! 그리고, 라이언 동생!
박력 있게 휘두른 몸짓에 비해 어쩐지 힘이 빠지는 어이없고 귀여운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리고 머리를 무지개 뿅망치에 한 대씩 얻어맞은 남자들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물론 그들만이 목표는 아니었다.
에릴이 세뇌해 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종횡무진하며 급조된 에릴의 추종자들의 머리를 무지개 뿅망치로 두들겨 주었고.
뾱! 뾱! 뾱! 뾱! 뾱! 뾱! 뾱!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귀여운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오빠의 창에 찔린 에릴마저 잠시 넋을 놓고 뿅망치 난무를 펼치는 나를 바라볼 정도였다.
나는 자기 자신을 세뇌하려 애썼다.
‘난 안 부끄럽다! 전혀 수치스럽지 않아! 이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구!’
하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만은, 도저히 가릴 수 없었다.
에릴의 추종자들을 남김없이 쓰러뜨리면서, 나는 아멘다를 잠시 더 원망했다.
그렇다.
나에게 이 흉악한(?) 뿅망치를 준 건 바로, 아멘다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내 마력을 강화하고 증폭해서 부정의 마력으로 인한 세뇌를 깰 수 있다는 거지?”
“예. 이 수정으로 변화시킨 황녀님의 아스트라와 접촉하면 돼요.”
근 한 달 내내 밤을 새우다시피 한 아멘다는 눈빛이 시커메진 채로 웃으며 말했다.
에릴이 나타난 걸 알면서도 한 달 가까이 지켜만 보고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다.
부정의 마력으로 사람을 세뇌시키는 걸 확인한 후에도 바로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도 같다.
세뇌당한 인질들을 안전하게 구할 방법을 먼저 찾아야 했다.
방법을 찾기 전에 에릴에게 우리가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인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또한 세뇌가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 확신이 불가능했기에, 이에 대해 아는 사람의 숫자는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 끝에 아라에몽……이 아니라, 아멘다의 도움으로 세뇌를 깰 무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막상 수정을 발동시켜 내 아스트라를 변환시켰더니, 이 괴상망측(?)한 무지개 뿅망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왜 이래?! 내 멋있는 아스트라가!”
그러나 아멘다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웃음보를 손으로 애써 누르며 대답했다.
“제 탓이 아니에요. 변환된 형태는 황녀님의 무의식적인 이미지에 따라 구현된 거라구요!”
“…….”
세뇌된 사람과 접촉하여 깨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뿅망치로 ‘뾱! 뾱!’ 두드리며 깨우는 걸 상상해 버리긴 했다.
하지만 사람 구하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건 너무하잖아!
그 뒤로 몇 번 이 뿅망치의 모양을 바꿔 보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나는 이 뿅망치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고 휘두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따흑! 어흐흑!’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도, 뿅망치를 움직이는 건 잊지 않았다.
뾱! 뾱! 뾱! 뾱! 뾱! 뾱……!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뿅망치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르르 기절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 사이에 홀로 우뚝 선 아나트리샤 황녀는 무지갯빛이 찬란한 뿅망치를 들고 있었다.
“드디어! 다 했다!”
여전히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로, 아나트리샤는 망치를 치워 버리려 했는데.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루퍼스리안이 달려왔다.
“리샤! 잠깐만!”
“왜?”
혹시 에릴을 제압하다가 어딘가 다치기라도 한 건가, 하고 아나트리샤는 걱정했다.
하지만 그건 전혀 쓸모없는 걱정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루퍼스리안이 눈을 반짝거리며 외쳤던 것이다.
“나도 한 번만 때려 줘!”
“……뭐? 미쳤어?”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진지했다.
“나도 귀여운 리샤의 뿅망치로 맞고 싶은… 게, 아니라! 저 못생긴 것의 세뇌 때문인지 머리가 멍해!”
태양의 마력을 가진 데다 아스트라까지 소유한, 루퍼스리안에겐, 부정의 마력으로 일으키는 세뇌에 대한 저항력이 있었다.
아무리 어둠의 마력으로 구속해도 아스트라까지 지닌 루퍼스리안에겐 애초부터 통할 리 없었던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 루퍼스리안은 아멘다가 만든 정신방어 마도구까지 지참하고 그랑디오르 공작저로 갔었다.
이 모든 사실을 계획한 아나트리샤는 분명 세뇌가 통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루퍼스리안이 이렇게 말하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응! 으으! 두통이……!”
루퍼스리안이 이마를 찡그리기까지 하자, 아나트리샤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귀염망측한 망치를 오빠의 뒤통수에 톡 댄 것이다.
뿅!
하고 어이없는 소리가 또 울렸고.
루퍼스리안은 비로소 만족한 듯이 환하게 웃었다.
“와! 두통이 싹 가시네.”
아나트리샤는 잠시 의심이 들었다.
‘진짜 맞아? 혹시 이 뿅망치에 굳이 맞아 보고 싶어서 거짓말했다거나…….’
하지만 곧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젓고는, 신빙성이 너무 높아서 더욱 부정하고픈 생각을 지워 버렸다.
늘 ‘수치심은 왜 내 몫’의 산증인 같은 오빠지만. 어쨌건 유일한 오빠였으니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오빠에게 일말의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가능성도 없앤다면 잠깐의 수치심 정도야, 감내할 수 있었다.
그때, 루퍼스리안의 아스트라에 치명상을 입고 벽에 매달린 에릴이 고통과 절망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야! 왜! 왜? 아아악!!!”
발버둥 치는 에릴을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보며, 아나트리샤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설사 네가 진짜 오빠를 세뇌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빠가 날 공격할 리 없잖아?”
그 자신감은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했다.
새삼스럽게 에릴은 깨달았다.
자신이 정말로 부러워하고 가지고 싶었던 건, 바로 저 단단한 자신감이었단 걸.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아낌없이 사랑받아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저것이, 에릴은 너무나도 간절하고 부럽고, 미웠다.
절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순간.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귓전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역시 네 쓸모는 이 정도구나. 실패작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어째서인지 에릴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을.
‘소피아!’
조금 전 난도질당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몸과 영혼이 가장 내부에서부터 붕괴하는 듯한 고통이 에릴을 집어삼켰다.
“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