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8. 메인 퀘스트 : 꿈의 그림자 (12)
에릴은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소피아를 이기고 그 힘을 흡수하는 데에 성공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소피아는 자신을 다음 육체로 고른 적이 없었다.
그저 미끼였을 뿐.
애초에 에릴은 소피아와 육체의 주도권을 두고 쟁탈을 벌인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고통스럽고 길었던 시간은, 소피아가 불어넣은 힘에 적응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었을 뿐.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연이어서 찾아왔다.
자신이 어째서 아나트리샤 황녀를 끔찍하게 싫어했는지.
여태껏 에릴은 그 맹목적인 감정이, 마치 누군가가 영혼에 새겨 놓은 명령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아나트리샤를 증오하고,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이 네가 태어난 이유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렇게 속삭이던 목소리의 존재를, 이제야 깨닫는다.
소피아였다.
에릴의 존재 자체가 소피아의 인형이자 미끼였던 것이다.
그리고 주인은 쓸모를 다한 인형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죽어 버리렴. 가능성은 높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다면 더 좋겠지.
에릴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싶었다.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몸과 마력은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이미 저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전신의 마력 회로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
‘싫어어!!!’
그때 에릴의 시야에 한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은발. 경악과 걱정으로 가득한 짙은 푸른 눈동자.
분명히 찰나지만 에릴은 그와 눈이 마주쳤음을 알았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게 된다.
어릴 때에도, 그리고 조금 전에도, 그토록 매정하게 내쳐 버렸지만, 하지만,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지 않은가.
소피아에게 이용만 당한 자신이 불쌍하지 않은가. 가엽지 않은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동정심이라도 베풀어 줘야 하지 않아?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제발, 살……!”
하지만 청년은 매정하게 눈을 돌려 버렸다.
그의 눈빛과 걱정이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위험을 감지한 순간, 바로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에릴의 떨리는 시선 또한 움직였다.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금발. 경악으로 커다래진 청보라색 눈동자.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고, 또 시기했던 소녀에게로.
결국 마지막 순간, 에릴은 생존에 대한 욕구마저 잊을 증오에 사로잡혔다.
시작은 분명히 소피아가 새긴 명령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이 온몸과 영혼을 불태우는 증오는 분명히 에릴 자신의 것이었다.
에릴은 제 몸을 그대로 아나트리샤에게 내던졌다.
“너도, 너도 죽어 버려!!!”
그 순간, 마력이 그대로 폭주하여 에릴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
콰과광---!!!!
폭발의 여파는 엄청났다. 아마도 소피아는 에릴을 이용해 황궁 정도는 박살 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하지만, 폭발의 결과는 소피아가 바랐을 것과는 달랐다.
황녀궁에서 황자궁으로 향하는 정원의 일부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에릴을 제외하면 사상자 역시 없었다.
나와 오빠의 마력으로 결계를 친 덕분이기도 했고.
난장판이 벌어진 걸 한 발짝 늦게 알아챈 부모님이 달려온 덕분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 넷의 마력이 합쳐진 상태에서 막아 내지 못할 것은, 마왕 외에는 없으니까.
정원 한가운데 뚫린 거대한 크레이터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에릴의 존재는 그야말로 흔적조차 없었다.
마지막 순간 발악처럼 달려들던 시도는 정작 내게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가엽다거나 동정심을 느끼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보인 살기와 악의는 결국 그 애 자신의 것이었으니까.
그것까지 내가 받아 줘야 할 의무는 없다.
나는 망가진 정원의 구덩이 앞에서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게 무슨…….”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습니다…….”
에릴에게 당한 피해자들은 곧 깨어났다.
의식이 돌아옴과 동시에 자신이 세뇌당한 동안 저지른 행동들까지 전부 기억하게 된 건 재난이었지만.
“맙소사!”
“내가 대체 무슨 짓을!”
다행히 평소에도 뻔뻔한 편인 라이언이나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리지드는 좀 덜한 듯했다.
하지만 내 동생처럼 자란 파비엘은 지독한 자괴감에 시달리는 중이었고.
코넬은…… 여파가 가장 심각했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했다.
“감히 반역자를 가문의 일원으로 들이고, 황녀님을 모욕한 죄! 목숨으로 갚겠습니……!”
“목숨으로 갚지 마!”
에릴에게 세뇌당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성격상 에릴을 누님이라 부르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대했던 게 충격이 큰 모양이다.
코넬의 멍한 눈을 보고 나는 바락 외쳤다.
“목숨이나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는 헛소리 내 앞에서 절대 하지 마!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죄를 씻을 방법을 생각하란 말이야! 죽겠다는 소리 말고!”
“황녀님…….”
코넬은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너희는 세뇌당했던 거라고! 세뇌한 걔가 나쁜 거지 왜 당한 놈이 죽겠다고 난리야!”
그러자 옆에서 오빠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리 세뇌당했어도 감히 리샤를 못 알아본 놈들은 죽어 마땅해.”
오빠는 저리 가 있으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양옆에서 끼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당연하지! 세뇌든 뭐든 우리 아가에게 어떻게!”
“죽을죄가 맞단다. 그냥 본인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두지 그러니?”
아빠랑 엄마가 고요히 분노하고 계셨던 것이다.
두 분의 호통에 피해자들은 더더욱 부끄러워하면서 내게 사죄를 반복했다.
받는 내가 도리어 민망해질 정도로 말이다.
***
에릴이 로웨나로서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 바로 가르텐 저였다.
당연히 가르텐 가문의 사람들이 가장 상태가 안 좋았다.
특히 악질적인 건, 얼마나 강력한 마력이었는지 세뇌를 건 당사자가 이미 죽었는데도 풀리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아나트리샤가 직접 행차해야 했다.
정말로 수치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한 번 무지갯빛 뿅망치를 들었다.
다만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뿅망치를 휘둘렀고.
뾰뵤뵤뵥!
-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린 뒤, 가르텐 저의 사람들은 한꺼번에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들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였다.
코넬은 다시 한 번 아나트리샤에게 사죄와 감사를 반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녀님. 이 은혜는, 제가 반드시 살아서 갚겠습니다. 이 영혼과 목숨을 다 바쳐서!”
“아니, 영혼이나 목숨까진 필요 없는데…….”
다행히 가르텐 공작은 세뇌에서 빠르게 벗어나 안정을 찾았지만.
공작부인은 그렇지 못했다.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병인 든 상태에서 세뇌까지 당했던 게 치명타였던 듯했다.
결국, 다시 요양을 위해 영지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 했다.
그 전에 그녀는 아나트리샤에게 진심 어린 감사와 사죄의 편지와 함께, 한 가지 선물을 보내왔다. 아들을 통해서.
바로 가르텐 공작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석, ‘인어의 눈물’이었다.
이것은 에아루스 가문에 있어 ‘화룡의 심장’과 비슷한 상징성을 가진 보석이다.
초대 황제가 초대 가르텐 공작에게 하사한 선물로, 가르텐의 가장 중요한 가보였다.
인어의 눈물이 장식된 피불라를 직접 들고 온 코넬의 앞에서, 아나트리샤는 난감해했다.
“아니, 내가 이런 걸 받을 정도까진…….”
“아닙니다. 부모님과 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만일 황녀님께서 구해 주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그 여자를 돌아가신 누님처럼 여기고 있었을 테니까요.”
“…….”
“황녀님께서 받아 주지 않으시면, 저희 가문을 용서치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시겠다 하셨습니다. 두 분 모두.”
“너도?”
“예. 그리고, 이는 전하께서 황족이 아니시라 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정의 가르텐 역시 아나트리샤에게 절대적인 충성의 맹세를 바쳤다.
황위 계승자로서가 아니라, 아나트리샤라는 한 개인에게.
가르텐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일이었다.
***
결국 소피아의 행방은 알아내지 못했다.
에릴에게 소피아가 잡아먹혔을 리 없다는 내 예상은 맞았지만.
이건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소피아는 멀쩡히 여기 남아 있다는 거니까.’
에릴을 이용해 음모를 꾸민 것처럼, 소피아는 결국 나를 노릴 것이다.
미끼를 세워 둔 것은 자신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숨기기 위해서일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대체 지금 소피아는 어디에서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솔직히 불안했다. 안 그럴 수가 없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깊이 잠든 미하일이 있었다.
그동안 꽤 오래 눈을 뜨고 자유롭게 움직였던 미하일은 얼마 전부터 또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에릴 사건 때 직접 끼어들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5년간 깨어나지 못했을 정도로 영혼과 마력에 타격이 컸던 그다.
잠깐 잠들어 있는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불안하고 힘겨워서, 투정 부리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또 잠자는 왕자님 흉내 내는 거야? 언제 일어나려고.”
미하일은 대답 없이 천사처럼 고운 얼굴로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흉흉한 소식이 갑작스럽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