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8화 (209/218)

Level 29. 메인 퀘스트 :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서 (01)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라이언이 습격을 당했다고?”

“예, 전하. 그리고… 흉수가 바로 공작의 동생인 리지드 경이라 합니다.”

“……!”

분명히 에릴에 의한 리지드의 세뇌는 완전히 풀렸다.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리지드는 제정신으로 라이언을 습격한 거야. 그리고 아마도 그 배후에는…… 소피아가 있겠지.’

부정의 마력에 홀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교도를 따르는 이들의 마음까지는 바꿀 수 없었다.

그건 결국 그들의 신념이니까.

리지드는 제 신념으로 형을 배신하고, 인류를 버리는 걸 택한 것이다.

라이언이 얼마나 동생들을 아끼고 신경 썼는지 잘 아니, 뒷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태연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오빠도 안색이 희게 질린 게 티가 났다.

다행히 시종장이 아뢴 말에 따르면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했다.

“다만 내일 황녀님의 책봉식에 참석하시는 건 무리일 듯합니다.”

“어쩔 수 없지. 궁의를 보내서 잘 치료하도록 말해 줘.”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나 대신 직접 가서 상태를 보고 올래?”

“아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네 기사인 라이언을 공격한 걸 보면, 결국 누구를 노리고 있는 건지 분명하니까.”

“루퍼스 말이 맞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희 둘 다.”

엄마는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와 오빠를 바라보았고.

내 책봉식 때문에 다시 와 계신 할아버지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리되면 책봉식을 미루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사교의 무리가 리샤의 책봉식 때 무슨 짓을 벌이려 할지 걱정이 되는구나.”

당연한 걱정이긴 했다. 어떤 형태로든 소피아가 돌아온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녀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그 수하들 역시 최종적으로 노리는 건, 나일 테니까.

내일이 바로 황태녀 책봉식.

책봉식처럼 공식적인 행사의 주인공인 내가, 군중 앞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나를 표적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미룰 수는 없어요.”

“네 안전이 가장 우선이야, 리샤.”

가족들은 오빠와 의견이 같았다.

하지만 나만은 반대 의견이었다.

“이미 오늘 황궁에서 에릴이 벌인 일과, 라이언이 습격당한 일은 다 퍼졌을 거예요. 그 상황에서 책봉식을 미루면 어떻게 되겠어요?”

“……황실이 놈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식을 주게 되겠지.”

아빠가 입매를 굳힌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그랬다간 기세에서 밀려 버리고 말 거라고요. 싸움은 기세잖아요.”

우리는 지금 사교도 놈들과의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가 이긴다면 이 두 번째 생을 온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이 이긴다면, 미하일의 희생으로 얻은 두 번째 세계마저 잃게 될 것이다. 

절대 질 수 없는 싸움.

그런 싸움을 앞둔 상황에서 약한 인상을 적들에게 주긴 싫었던 것이다.

‘우리가 쫄았다고 보이는 건 절대 안 돼!’

그리고 에릴이 남긴 여파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책봉식은 반드시 열려야 했다.

***

그날 밤.

긴장되어 결국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책봉식 자체가 긴장된 건 아니다.

역시 걱정되는 건, 소피아와 사교도의 움직임이다.

그들이 걸어올 마지막 싸움에서 가족들을 지키고, 두 번째 삶을 지킬 수 있을지.

그리고.

아직도 눈뜨지 못하는 미하일이 떠올랐다.

내 책봉식이 결정된 후에 아직 깨어 있던 그가 했던 말도.

“내가 옆에서 가장 먼저 축하해 주고 싶어. 허락해 줄 수 있어?”

미하일은 더없이 수줍은 얼굴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한 걸 보면, 결국…….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그때였다.

밤과 어둠의 틈새로 익숙한 기척이 스며들었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인가 그러했던 것처럼, 미하일이 밤의 어둠을 타고 내 앞에 스며들어와 있었다.

다정한 미소를 띤 그대로.

나는 환하게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미하일! 일어난 거야?”

“응. 늦어서 미안.”

“아니야. 책봉식 시작하려면 멀었는걸, 뭐.”

미하일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내가 진실을 알게 되고, 그와 마음을 확인한 이후에도, 끝내 버리지 못했던 불안감이 지금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고운 눈매가 반달처럼 접히며, 짙은 금빛 눈동자에 언뜻 붉은 그림자가 어려 보였다.

“……?”

언뜻 비쳤던 붉은 빛은 눈을 한번 깜빡이는 사이 사라지고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고, 어떤 조명도 없었으니까.

원래 어둠은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가 아닌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애써 웃었다.

***

날이 밝았다. 숨 가쁘게 서둘렀던 책봉식이었지만, 준비는 완벽했다.

국내외에서 귀빈들이 모두 참석해, 제국의 다음 황위 계승자를 축복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황녀를 사랑하는 제국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있었다.

우레와 같은 열광에 황궁 앞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렸다.

“와아아!!!”

“황녀님 만세!”

“아니, 이제 황태녀 전하시지! 황태녀 전하 만세!!!”

황실에서 내린 술과 고기가 사방으로 나누어졌고.

황실의 시종과 시녀들이 금화를 던지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가려 뽑힌 시동들은 꽃바구니를 들고 사방에 꽃가루를 뿌려댔다.

많은 이들의 얼굴에 미소와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물론, 전부가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근래에 황실을 주변으로 있었던 불온한 사건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미약하지만 분명한 불안감이 사방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랑디오르 공작이 습격당한 건 들으셨죠? 오늘 참석이 어려울 거라면서요.”

“그러게요. 황녀님의 첫 번째 기사인데, 이런 기쁜 날에 변고라니.”

“불길한 소식들이 너무 많아요.”

“황궁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까지…….”

“가르텐 공녀에 대해 들었어?”

“그 때문에 가르텐 공작가는 근신하느라 이번 책봉식에 참여를 못 한다던데.”

“그러면 세 공신 가문 중 둘이 참석을 못 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황실의 후계자 책봉에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일부는 기쁨으로, 또 일부는 불안감으로 책봉식을 기다리고 있다면.

또 일부는 아예 부정과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가장 작고 은밀했지만, 내용은 누구보다 과격하고 악의에 차 있었다.

“그 소문 들었어? 예언이 있었다는 거?”

“무슨 예언?”

“부정한 아이가 잘못된 자리에 오르면, 태양이 가려질 것이고. 이로 인해 수많은 저주가 넘쳐흐를 것이다.”

“황녀가 황태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세 공신 가문 중 두 가문이 참석을 못 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잖아.”

“혹시 그것부터가 예언에서 말한 저주인 건가?”

수군거리는 이들은, 마치 종교의 경구라도 되는 것처럼 그 예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입에서 입을 타고, 광장 가득한 이들 사이로 불길한 예언의 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예언을 입에 담은 이들에게는 본인도 모르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로웨나로서 활동하던 에릴과 직접 마주친 적 있는 이들이라는 것.

에릴은 본인의 성격과 달리 소피아가 남긴 암시를 따라, 귀족들만이 아니라 평민들 사이에서도 활동했기 때문이다.

빈민 구제를 명목으로 최대한 많은 이들을 만나고 돌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부정한 씨앗이 사방에 뿌려진 상태였다.

에릴은 이미 죽고 흔적조차 없음에도,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지금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에릴을 직접 만나지 않고 남이 말하는 예언만 들은 사람들은, 코웃음 치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태양이 저렇게 멀쩡하게 번쩍거리고 계신데, 무슨 헛소리를!”

“우리 황녀님이 부정한 아이라는 소린가요? 말도 안 돼!”

“맞아! 맞아! 우리 황녀님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백성들을 생각해 주시는 분이신데!”

그들의 말대로 태양은 제 자리에서 밝게 빛나며, 온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행사의 하이라이트,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황녀가 성장을 한 채, 지붕이 없어 외부에서 들여다보이는 금색 마차에 앉아 있었고.

그 주변을 황녀의 기사단과 시녀들, 그리고 귀족들이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다.

“와아아아!!! 황녀님이시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세요, 황녀님!!!”

“너무 아름다우셔! 오늘따라 더 빛나시는 것 같아!!!”

아나트리샤는 군중의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언을 입으로 나르던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반대되는 상황과 마주했다.

황녀를 호위 중인 기사들 사이에 이 자리에 없을 것이라 하던 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 저건 그랑디오르 공작 아닌가?”

“정말이네. 못 온다던 거 아니었어? 큰 부상을 입었다고.”

라이언은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누가 지금의 그를 보고, 어젯밤 동생의 칼에 찔린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이언은 어머니와 같은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공격한 동생의 기억을 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그런 감상에 젖어 괴로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깊은 부상을 입었어도, 나는 황녀님의 첫 번째 기사. 오늘 같은 날 자리를 비울 수는 없어.’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주변을 경계했다. 황녀의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게다가 라이언만이 아니었다.

황녀의 주변을 따르는 귀족들 사이에는 코넬 역시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부모를 대신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족 모두가 근신하겠다는 말에, 황녀가 직접 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일은 너와 네 가족 잘못이 아니야.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지.”

“황녀님.”

“그리고 책봉식에 가르텐 가문의 대표가 없는 건, 황녀로서 또 곧 황태녀가 될 사람으로서 곤란해.”

“참석을 명하신다면,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니. 좀 전에 한 말은 황녀로서의 의견이고.”

“……?”

“그냥 아나트리샤로서는 내 친구가 참석 못 한다면 정말 아쉬울 거야.”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참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코넬은 쓴웃음을 지은 채, 황녀의 마차 가장 가까이 서서 호위하며 움직였다.

어디에서 누가 고귀하고 소중한 황녀를 위협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에아루스 소후작 아멘다는 시녀로서 아나트리샤를 지근거리에서 따르고 있었다.

세 공신 가문 중 둘이 참석을 못 하는 상황 자체가 불길함의 상징이 아니냐던 헛소리는 단박에 사라졌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퍼레이드의 행렬 위로 드리워졌다.

아나트리샤는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모양의 검은 성이 허공에 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기다리던 부유성이었다.

그리고 성 위에 서 있는 청년의 그림자 역시.

“미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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