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10/218)

Level 29. 메인 퀘스트 : 가장 깊고 어두운 밤에서 (02)

나는 환하게 웃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스카 성을 휘광처럼 두른 채, 미하일은 천천히 허공을 걸어 내게로 왔다.

몸에 걸친 이국적인 검은 예복은 금 자수가 화려하게 놓여 있어, 어두운 색과는 상관없이 기쁜 날을 축하하는 데에 잘 어울렸다.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기도 했다.

밝은 햇살 아래 미하일의 금빛 눈동자가 유달리 짙어져 거의 주황색에 가까워 보이는 듯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도 여전히 허공에 선 채로 손을 내밀었다.

“오늘같이 기쁜 날, 당신을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물론, 제단까지만입니다만.”

그와 내가 이미 약속한 내용 대로였다.

“내가 옆에서 가장 먼저 축하해 주고 싶어. 허락해 줄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을 마주 내밀었다.

발이 부드럽게 허공을 밟았다.

“화, 황녀님!”

“이런…!”

나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귀족들은 당혹스러워했다.

하긴,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돌발 행동이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미하일의 손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함께 손을 잡고서 걸었다.

예정된 것과는 달랐지만, 분명한 퍼레이드였다.

공중 산책이 시작되자, 몰려와 있던 군중들은 놀람을 거두고 더욱 환호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황녀님 만세!!!”

“태양신이시여. 황태녀 전하를 굽어살피소서!”

“당신의 딸을 축복하소서!”

황도 르펜시아의 중앙 광장은 황궁 앞에 황궁보다도 거대한 너비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황실의 중요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대관식이나 책봉식 등의 공식적인 행사라면 더더욱.

행사가 이루어지는 날이면 중앙 광장에 금빛 제단이 놓이고. 황궁 꼭대기에 모셔진 태양석 역시 제단의 위로 옮겨지게 된다.

태양신이 굽어보는 앞에서 그 대리자, 혹은 후계자로서 인정받았음을 고하고. 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태양석이 황궁 꼭대기에서 광장의 제단으로 옮겨진 것은 카스톨트 황제의 대관식 이후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신물을 마주하게 된 백성들은 새삼 경이로워하며 태양석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와 태양석을 불온한 시선으로 보는 무리도 존재했다.

에릴이 남긴 불길한 예언을 계속 중얼거리는 자들.

그들의 소리가 발아래에서 점점 커져 가기 시작했다.

“부정한 아이가 잘못된 자리에 올라서는 안 된다!”

“저 여자가 황태녀로 책봉되어서는 안 돼! 저주를 불러올 거야!”

“마녀 때문에 우리는 태양을 잃을 거다!”

“봐! 저 검은 성에 태양이 가려졌어! 예언대로다!”

하나같이 모욕적이고 모독적인 말들.

제국의 황녀, 이제 황태녀로서 차기 황위 계승자라 결정된 이에게 쏟아져서는 안 될 말들.

하지만 나는 간지럽지도 않아서, 그저 웃고만 있었다.

‘책봉식 때 다 튀어나올 줄 알았으니까.’

에릴이든 소피아든 나를 노리는 이들이 책봉식 때 나타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내 입장에서 책봉식은, 곧, 거대한 덫이었다.

모든 적을 한꺼번에 모아서 처리하기 위한 덫.

그러니 저들의 등장에는 놀랄 것도, 분노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예상한 대로 되었다고 기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난 행동이 옆에서 벌어지자, 이건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버러지들이, 감히……!”

뭐지? 이게 미하일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너무 위화감이 심하게 드는 말이라, 놀라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보고 말았다.

미하일의 표정은 평소처럼 더없이 평온했다. 다만, 그의 손에 떠오른 강대한 마력은 대조적으로 흉포한 기세였다.

“……!”

그리고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 미하일이 쏘아낸 마력탄이 그대로 군중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라서 굳어 있을 여유도 없었다.

내가 친 결계가 반구형으로 광장 아래쪽을 감쌌고. 

쾅---!!!

엄청난 소리와 충격이 사방을 흔들었지만. 

덕분에 미하일이 쏘아 보낸 마력탄은 결계에 막혀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미하일의 손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하는 질문 이전에.

“네가 왜 부정의 마력을 쓰는 거야!!!”

그렇다. 조금 전 미하일이 나에게 험한 말을 하는 군중을 향해 공격한 힘은 밤의 마력이 아니었다.

훨씬 뒤틀리고 위협적이며 사악한 힘.

부정의 마력이었다.

***

미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화내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

가장 기이한 것은 지금 그의 얼굴이었다.

그가 화를 내거나 경멸하는 기색을 보였다면 차라리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지나칠 정도로.

그저 걷다가 존재가 잠시 거슬린 개미를 가볍게 밟는 것처럼.

“저들이 감히 너를 욕했어. 네 덕분에 삶을 얻은 버러지들이 주제도 모르고. 나는 마땅한 벌을 내리려 한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 리샤?”

믿어지지 않는 말들이었다. 미하일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 대체 누구야?’

왜냐하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미하일이 맞았으니까.

그걸 내가 못 알아볼 수는 없었으니까.

일부의 위화감은 있었다.

특히나 지금 부정의 마력을 드러낸 직후부터,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꽤 익숙한 것이었다.

‘마왕……?’

하지만, 그럼에도.

미하일이 맞았다. 지금 내 손을 잡고, 내 앞에 선 이는 분명히 미하일이었다.

다만, 평소의 그와는 다를 뿐.

그리고,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경악했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녀님을 놔!”

“저자를 당장……!”

“어서 황녀님을 구해야 한다!”

아래에서 소란이 일었다.

주로 내 기사들과 나를 호위해 온 귀족들이 주축이 된 움직임.

그러자 조금 전 군중을 향해 마력탄을 쏘아낼 때와는 명백히 다른 반응이 미하일에게서 나왔다. 확실히 감정적인 반응.

“거슬리는 것들.”

“미하일!”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라이언에게 닿았다.

라이언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검을 뽑아 들고,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황녀님을 놓지 못……? 커헉!”

미하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라이언은 갑자기 피를 토하며 낙마했다.

쓰러진 라이언의 가슴팍에서 검은 피가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어제 입었다는 상처가 단순히 벌어졌다고 보기엔 이상했다.

누구의 짓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미하일! 너지? 방금, 네가…!”

미하일은 해사하게 웃었다. 천진한 소년 같은 미소. 상황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그럼에도 예쁜 미소였다.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특히 저자는. 네 주변을 맴돌면서 감히 분에 넘치게 욕심내는 티가 너무 많이 나서. 얌전히 살려 두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거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분명히 미하일이 맞다.

지금 내가 아무리 시스템 창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아우라를 보는 능력은 그대로였다.

미하일은 미하일 그대로가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미하일은 절대 내가 아는 미하일이라면 하지 않을 법한 말과 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미하일의 다정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답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 사실, 그동안 엄청나게 내숭을 떨고 있었던 거야.”

“뭐?”

“진작 이러고 싶었거든.”

미하일의 시선이 이번에는 라이언이 아닌 주변의 이들을 향했다.

“네 첫 티 파티에서 감히 은종을 울렸지. 손목을 비틀고 손가락을 전부 잘라 버리고 싶었어.”

코넬.

“귀여운 동생인 척 알랑거리며 네 옆자리를 노리는 게 아주 꼴사나웠어. 짓눌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파비엘.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그 말이 향한 이들에게 타격이 갔다.

그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곧 몸이 허물어졌다. 마력 흐름이 순식간에 헝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능력은.

‘용언!’

분명히, 이번 생에서 미하일이 가진 고유의 능력이다.

“큭! 갑자기 이게 무슨!”

“화, 황녀님!”

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라이언 정도로 타격을 받은 건 아닌 듯했다.

“흠. 직접적인 상처 같은 매개체가 없으니 이 정도가 한계인 건가.”

미하일은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라이언은 사교도인 리지드의 손에 깊은 부상을 입었다. 그 상처 자체를 매개로 해서, 강한 타격을 직접 준 모양이다.

다른 두 명에겐 그게 불가능하다는 거겠지.

“뭐, 큰 상관없겠지. 죽이는 건 어렵지 않으니.”

그때.

제단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달려들었다.

“네놈! 어서 리샤를 놔줘!”

“감히 내 딸을!”

“어서 떨어지지 못해?!”

부모님과 오빠의 아스트라가 폭발적인 마력에 둘러싸인 채, 미하일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음. 역시 미움받는 처지인 건 어쩔 수 없나. 걱정하지 마, 리샤. 네 가족이잖아. 너에게 미움받을 일은 하지 않아.”

미하일이 더없이 해사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딱, 하고 울린 순간.

구웅-! 하고 하늘과 땅이 동시에 울렸다.

우리 머리 위에 뜬 나스카의 성을 중심으로 밤을 잘라낸 듯한 거대한 구체의 결계가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결계 안쪽에 있는 모든 이들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엄마나 외할아버지는 물론, 아빠도, 오빠도. 아스트라마저 힘을 잃고 녹아내렸다.

그런데도 가족들이 추락해 다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미하일의 마력이 그들을 안전하게 지상에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안에서는, 내 마력과 아스트라조차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가능한 힘을 가진 이는 한 명뿐이다.

어둠으로 가득 찬 결계 안에서, 미하일의 금빛 눈동자는 이제 거의 노을에 가까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전생에 내 손으로 직접 죽인 그 얼굴.

망연한 목소리가 절로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왕.”

미하일은 대답 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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